우리의 밤이 시작되는 곳 - 제18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고요한 지음 / 나무옆의자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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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밤이 시작되는 곳 2022년의 백귀야행

 


 

벛꽃이 만발한 밤거리와 죽음


장례식이 끝나면 재호는 마리를 뒷자리에 태우고 서대문과 종로의 밤을 질주합니다. 밤은 찬란하고 장례식장에서 피기 시작한 벚꽃은 소설 내내 흐드러진 채 흩날리죠. 이상한 조합이죠? 장례식과 죽음, 그리고 벚꽃과 맥도날드. 그러나 어쩌면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바로 그러할지도 몰라요. 누군가가 죽은 날, 누군가는 환하게 빛나는 불빛을 24시간 뿌려대는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먹잖아요. 죽음조차 상조회사의 수요이듯 24시간 불야성으로 반짝거리는 맥도날드는 2022년 서울의 자본주의 숙성도를 드러내는 상징이 될만하지 않나요?

 

장례식 아르바이트를 하는 재호와 마리는 왜 맥도날드 밤새 오토바이를 타고 맥도날드 순례를 떠나는 것일까요? 오랜 기간 입사 원서를 내고 탈락을 거듭한 그들에게 맥도날드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길래?

죽음과 내내 마주하는 등장인물들 누구도 심각한 표정으로 슬퍼하지 않아요. 우울하다고 이야기할 때도 뭔가 촌극같은 느낌이 들죠. 심지어 아죽사(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 회원들은 유니폼으로 빨간색 양복을 입고 장례식에 참석합니다. 히로시가 만들어준 빨간 양복은 고베에서는 루팡 3세를 의미한다고 하거든요. 이렇게 이 소설은 죽음과 벚꽃, 장례식과 빨간양복, 그리고 고베의 지진과 루팡 3세를 연결합니다. 이 낯선 조합이 작가가 말하고 싶은 우리 시대의 진실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루팡 3, 그리고 헤이세이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이야기를 조금 더 확장해 볼게요.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떠오르는 작품이 하나 있었어요. 루팡3세를 제작한 지브리의 94년도 작품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이하 폼포코)입니다. 자본주의가 한창 자리를 잡아가던 60년대의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루팡3세는 모든 면에서 기존의 모럴과 법을 무시하는 피카레스크였죠. 그러나 30여년이 흐른 폼포코에서 주인공 너구리들은 고도자본주의 시대의 인간에게 철저하게 패배하는 것으로 그려지죠. 이건 거의 잔혹동화 같아요(지브리의 진혹동화!)


너구리가 목숨을 걸고 펼친 마지막 항전, 백귀야행

 

인간에게 빼앗긴 터전을 되찾기 위한 마지막 대작전을 펼치는데 그것이 바로 백귀야행이었어요. 번역으로는 요괴대작전이라고 나오는데, 인간들에게 천지자연의 무서움을 보여주기 위해 너구리들이 온 힘을 다해 요술과 변신술을 부려 온갖 일본 신화와 동화속의 요괴들을 불러내어 밤거리를 배회하는 모습을 보여주자는 것이죠. 그러면 인간들은 두려움을 느끼고 자연을 파괴하는 신도시 개발을 포기하지 않을까 생각한 거죠. 자본주의를 너무 우습게 본 겁니다. 너구리가 목숨까지 버려가며 만든 이 어마어마한 이벤트를 한 놀이공원에서 자신들의 광고였다고 선전하니까요. 결국 너구리들은 인간으로 변신한 채 본성을 버리고 자본주의에 순응하든가 아니면 인간이 버린 쓰레기를 먹는 처지로 전락하게 됩니다. 맞아요. 이게 바로 고도자본주의죠. 순응하거나 전락하거나.

재호와 마리가 서대문에서 맥도날드를 먹으며 야행할 때, 그리고 그들 주변의 등장인물이 술에 취해 떠들고 부대낄 때, 떠오른 것은 너구리들의 백귀여행이었어요. 현실적인 시공간을 디테일하게 그렸지만 판타지의 이공간이 느껴진 것은 그래서일까요? 자본주의에 순응하지 못한 군상들이 펼치고 있는 하릴 없는 저항의 몸짓. 그러나 이미 그들은 알고 있죠. 이 모든 저항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작품에 자주 나오는 해머링 맨 (출처 : 게티 이미지)

 

그래서 재호와 은혁이 정규직이 되길 염원하던 광화문의 해머링맨이 의미하는 것은 노동의 숭고함이랍니다. 노동이 가장 가치 없는 이 시대에 소원을 비는 대상이 해머링맨이라니요. 그래요, 어차피 순응해야 하는 살아갈 수 있다면 재호와 마리가 잘릴 위험이라도 느끼지 않는 것이 소원이 될 수 있는 거죠. 덕분일까요? 마침내 소원을 이루어서 상조회사에 합격합니다. 첫 장면에서 아르바이트하러 향하던 장례식장, 재호는 마리를 태우고 마지막 씬에서 또 스쿠터를 그쪽으로 돌립니다. 44년동안 맥도날드에서 일한 어느 할머니처럼 일하고 장례식장에서 일하고 싶다면서. 그 삶은 어떤 것일까요? 재호와 마리에게 삶은 죽음과 멀지 않아요. 그래서 누구도 심각한 표정을 짓지 않는 이 소설이 잔혹동화처럼 보입니다. 맞아요.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어요. 소원을 빈다는 것이 해머링맨 앞에서 평생 일이라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말하는 시대. 그래도 응원하고 싶네요. 재호와 마리의 삶을. 부디 상조회사에서 44년간 일하면서 장례식 인생을 만들 수 있기를, 그래서 벚꽃이 흐드러진 그곳에서 무사히 늙어 갈 수 있기를.

교보문고에 갈 일이 있으면 해머링 맨 앞에서 재호와 마리의 소원이 이뤄지기를 빌어 볼까 합니다.

임종체험 센터에서 돌아오자마자 나는 오렌지를 들고 잘예식장 아르바이트를 나갔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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