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럴드 프라이의 놀라운 순례
레이철 조이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순례라 함은 일반적으로 종교적 성지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말한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편지를 부치기 위해 나선 해럴드가 갑자기 나선 이 여행을 왜 순례라고 부를까.

바로 그가 걸었던 길 위는 모두 상처를 치유하는 성지와 같았고 그가 만났던 많은 사람들은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성가와 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순례란 꼭 종교적인 성지일 필요는 없다. 그 이상의 행복과 힐링을 느꼈다면 말이다.

 

 

 

 

어느 날 영국 남부의 킹스브리지 포스브리지로 13번지의 프라이의 집에 편지 한 통이 배달된다.

아주 오래전 같은 양조회사에서 근무했던 동료 퀴니 헤네시가 보낸 편지였다.

'이 편지를 받고 좀 놀라실지 모르겠네요....'로 시작된 퀴니의 편지는 그녀의 성격답게 타자기로

정갈하게 타이핑 되어 있었으며 거의 1000km 떨어진 버윅어폰 트위드의 소인이 찍혀 있었다.

 

이 십여년전 갑작스럽게 회사를 떠난 그녀가 암으로 투병중이라는 소식을 전하게 된 것일까.

해럴드는 답장을 쓰기위해 펜을 들었지만 '편지 고마워요. 정말 안타깝네요. 모든 일이 잘되기를 빌며...'

라고만 쓰기에는 뭔가 어설프고 진심이 담긴 것 같지가 않았다.

어쨋든 그 편지를 부치기 위해 집 앞의 우체통을 향하던 해럴드는 입고 있던 셔츠와 보트 슈즈 그대로

퀴니를 향한 대장정을 시작하게 된다. 물론 현관문을 나설 때 그 곳까지 그런 차림으로 여행을 시작하리라는

계획은 전혀 없었다.

 

 

왜 그는 기억속에서도 가물가물한 퀴니를 만나기 위해 순례라고 부를만큼 어려운 여행을 시작한 것일까.

물론 그가 만날 풍경과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제대로 된 옷차림이나 여행장비를 갖추었다면 단순한 그의 여행기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죽음을 눈앞에 둔 퀴니에게 '내가 당신에게 걸어가고 있는 동안 살아 있어야 한다'는 숙제를 주고

그는 무작정 걷는다.

주유소에서 만난 아르바이트 소녀는 배고픈 그에게 치즈버거를 주었으며 암으로 죽어가던 고모가

있으며 좋아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해럴드는 소녀의 그 말에 큰 감동을 받고 여행내내 소녀에게 편지를 보내고 위안을 얻는다.

 

 

'해럴드는 다른 사람들의 소리로 가득한 도회지를 걷고, 도회지들 사이의 땅을

통과하는 길을 걸었다. 그러면서 그의 삶의 순간들을 마치 방금 일어난 일처럼 받아들였다.

가끔 자신이 현재보다는 기억이 되어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바깥에 갇힌 구경꾼처럼

그의 삶의 장면들을 다시 돌려 보았다. 실수, 모순, 하지 말았어야 할 선택이 보였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204p

 

해럴드는 길을 걸으면서 무심한 듯 펼쳐진 풍경과 사람들을 바라보고 이제는 사랑이 식어 버린

아내 모린을 떠올린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 데이비드를 떠올렸다.

댄스파티에서 만나 첫 눈에 사랑에 빠졌던 모린은 이제 손님방으로 나가 더 이상 그를 안아주지 않았었다.

자신을 조롱하고 하찮게 여겼던 아들 데이비드에게 그는 어떤 아버지였던가를 기억해내려 했다.

술주정뱅이 였던 자신의 아버지와 뉴질랜드로 떠나버린 어머니, 늘 바뀌었던 아버지의 여자들.

 

해럴드는 버림받았다는 어린시절의 상처로 모린과 꾸민 가정에서도 언젠가 깨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머리 좋고 잘생겼던 아들과는 왜 이렇게 멀어지게 되었던걸까.

 

누구에게나 상처는 있다. 단지 크고 작을 뿐.

해럴드가 퀴니에게 가기 위해 집을 나선 것은 더 이상 가정이 그를 안아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남남처럼 되어버린 모린과 자신을 떠나버린 아들. 공허한 인생에 퀴니에게 도달하기 위해 내 딛은 발자욱은

자신을 만나는 여행이 되어 버렸다.

길에서 만난 누군가는 해럴드의 이 여행을 멋지게 포장하고 광고해서 이익을 얻으려고 했다.

또 누군가는 비슷한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그와 함께 걷고자 했다.

물론 그런 이들은 고통이 따르는 그 여행을 끝까지 해내지 못한다. 다만 멍한 상태가 되어버린 해럴드만이

퀴니에게 당도한다. 그의 도착을 기다리며 죽음을 밀어내며 기다렸던 퀴니.

 

아주 오래전 친절했던 해럴드를 위해 누명을 쓰고 회사를 떠났던 그녀.

해럴드는 그녀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저 편지 몇줄로는 자신의 마음이 당도하지 못할만큼.

하지만 해럴드의 여정은 결국 식어버린 사랑과 돌이킬 수 없는 잘못들을 되돌아 보는 기회가 된다.

 

'아이가 더 있었으면 사랑하는 고통도 희석되지 않았을까? 아이가 자라는 것은 계속 부모를 밀어내는 것이다.'-73p

 

작별인사도 제대로 못한 채 떠나버린 아들은 해럴드와 모린의 상처였다.

누구나 자신의 분신인 아이에게 사랑을 준다. 하지만 언젠가는 모두 떠날 것임을 알기에 해럴드의 이런 아픔이

내게도 전해져왔다. 아이가 자라는 것은 나를 밀어내는 것....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해럴드의 이 여행이 모린에게 기적을 선물했다는 것이다.

더 이상 떠나버린 아들로 해서 서로를 아프게 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임을.

앙상하게 말라버린 해럴드를 목욕시키고 그의 얼굴을 만지던 모린의 눈빛이 얼어붙었던 두 사람의 마음을 녹이는

마지막 장면에 그동안 아팠던 마음이 가라 앉는다. 우리는 저마다 이런 아픔을 간직한 채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지는 않은지....1000km의 여행을 하지 않고도 아픔을 치유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기적인 셈이다.

87일간의 순례는 우리네 인생길과 너무나 닮아있어 해럴드와 함께 했던 여행길이 내내 숭고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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