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되는 법 - 꿈이 너무 많은 당신을 위한 새로운 삶의 방식
에밀리 와프닉 지음, 김보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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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많은 것은 축복이다. 많은 일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고, 그 호기심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을 즐기는 사람은 남다른 성공 방식을 가진 사람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장점을 강점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나를 다듬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세상은 우리에게 '주요 직업군을 선언하고', '우리의 장점을 살려서', '자신에게 꼭 맞는 일을 찾으라고' 재촉하지만,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나로서 사는 삶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지 이해하려 애쓴다. 이는 외부적인 동시에 내부적으로도 커다란 압력이며, 실존적 회의 및 정체성의 혼란과 뒤섞인다. 이런 혼란은 청소년기에만 겪는 것이 아니라 대개 일생에 걸쳐 지속된다.

꿈이 많고,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들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 전력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종종 듣곤 한다. 나도 그랬다. 좋아하는 것이 많았고, 좋아했던 것도 많았고, 그래서 좋아할 것이 많은 나는 무슨 일이든 '꾸준히' 해나가지 못하는 편이었다. 그럼 문득 마음에 두려움이 스며든다. "이렇게 여러 분야에 돌아가면서 관심을 두는 건 오직 나뿐일 것이라 생각하니 외롭기까지 했다. 확실히 내 또래들은 나처럼 모든 걸 다 알려고 하기보다 어떤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보였다."라는 저자의 말이 내 말처럼 느껴졌다. 외로움과 함께 나만 미래로 나아가는 레이스에서 점점 뒤처지는 것 같아서 두렵기도 했다. 다양한 것에 관심을 가지며, 외로움을 느끼거나 두려움을 느꼈던 나에게 《모든 것이 되는 법》은 좋은 위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 삶을 더 가치있게 만들어나갈 수 있는 설명법이 되었다. 

꿈에 대한 책이 넘쳐나는 요즘이다. 꿈을 찾는 방법부터 꿈을 이루는 방법까지. 꿈에 대한 다양한 방법을 소개한다. 하지만 꿈이 많은 사람들을 위한 책은 극히 드물다. 정확하게 《모든 것이 되는 법》 외에는 찾지 못했다. 왜 그럴까. 그건 옳은 것이 아니라는 고정관념이 있기 때문이다. 꿈은 찾기 힘든 것이 있을 수도 있지만, 많을 수도 있는 것이다. 꿈이 많다는 것은 그 많은 것을 융합해서 나만의 꿈을 찾을 수 있다는 뜻이라고 《모든 것이 되는 법》의 저자 에밀리 와프닉은 말한다. 하지만 이 사실에 닿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은 좌절을 하거나, 자신감을 잃어버린 채 자신의 능력을 한정한 채 삶을 보낸다. 꿈이 많고, 다양한 것에 흥미를 느끼고, 몰두하는 것이 자주 바뀌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장점을 강점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 첫 번째가 바로 "다능인"이란 사실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능인. 많은 관심사와 창의적인 활동 분야를 폭넓게 아우르는 사람, 여러 분야에 대해 많이 알고 있거나 백과 사전식 지식을 지닌 사람, 다양한 분야에 흥미가 많고 지식이 있는 사람, 다양한 업무를 해낼 수 있고, 손재주가 있는 다재다능한 사람 등을 가리킨다. 《모든 것이 되는 법》은 이 다능인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린다. 

'다능인 기질'을 살릴 방법은 없을까? 

이를 위해 저자는 다능인의 세계에 대해 설명해준다. 다능인이 무엇인지, 다능인에 대한 오해가 무엇인지, 궁극적으로 다능인들이 어떻게 해야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 이야기한다. 그리고 다능인이 어떻게 일하면 좋을지 다능인 유형에 따라, 어떤 목적인지에 따라 설명한다. 뿐만 아니라 다능인이 일을 하면서 겪을 수 있는 어려움을 해결하는 방법도 함께 이야기한다. 이 책의 다양한 방법을 읽다 보면, 다능인으로 삶을 살아가는데 유용한 방법을 가득 알 수 있다. 

《모든 것이 되는 법》의 부제는 "꿈이 너무 많은 당신을 위한 새로운 삶의 방식"이다. 부제처럼 꿈이 너무 많은 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어준다. 

다능인에게 생산성이란 일을 완수하는 것 그 이상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이 올바른 일인지, 스케줄은 일을 완수하기에 적절한지 확실히 해야 하고, 언제 프로젝트를 포기해야 하며 언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지루함이란 당신이 다른 주제로 옮겨갈 때라는 것을 마음이 당신에게 알려주는 방법이다. 하지만 지루함과 두려움의 증상과 상당히 유사한 또 다른 힘이 존재한다. 바로 저항이라는 것이다. 저항은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고자 하는 우리 안에 존재하는 힘이다.

다능인의 패러다임은 말 그대로 다능인을 위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저자는 보통 사람들과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을 제안한다. 그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 다능인이 일하는 방법을 ①그룹허그 접근법 ②슬래시 접근법 ③아인슈타인 접근법 ④피닉스 접근법을 통해 유형에 따라 다양한 방법을 가지고 있다. 혹시 자신이 다능인이었는데, 실패했던 경험이 있다면 이 방법으로 다른 방향의 결과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으며 스스로 다능인일까? 몇 번을 고민을 했다. 결론은 나 역시 다능인이란 것이었다. 잘 다듬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나의 지나온 과거, 현재를 살펴보면 다능인이 맞다. 읽으며, 나는 어떤 다능인으로 역량을 키워나가면 좋을지 고민을 해보았다. 나에게 맞는 제대로 된 방식을 찾는다면, 내 생각에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장점으로 바꿀 수 있다는 저자의 말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부터 신뢰를 했던 것은 아니다. "우선은 선택해야 한다는 중압감을 없앨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선택하지 않는 것 역시 선택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에 의심을 하기도 했고 현실을 도피하는 좋은 말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읽다 보면 내가 일이나 꿈을 대하는 패러다임과 다를 뿐이지, 충분히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방법들을 따라 해보고 싶어졌다. 지금 나에게 꼭 필요한 책이었고, 이 책을 만나서 다행이었다.

 

 


다양한 관심사와 열정으로 나만의 길을 걸어나갈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되는 법》의 저자가 준 가장 큰 힘은 "다능인인 자신을 알고, 자신을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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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4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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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을 했다."

 

첫 문장의 임팩트가 남달랐다. 마치 잔잔한 호숫가에 파형을 만드는 조약돌 같았다. 그 임팩트가 주는 힘이 소설 전체를 흐를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연이어 나오는 또 다른 조약돌이 등장했다. 잔잔해질 무렵, '퐁당'하고 새로운 파형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은 마치 혼자 사는 삶이 주는 고요함 중에 내 내면을 찌릿찌릿 울리는 느낌이 전해지는 소설이었다.

 

마쓰이에 마사시 작가는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통해 이미 만났던 작가였다. 처음 마쓰이에 마사시의 작품을 읽을 때, 굉장히 행복하게 책을 읽었다. 마치 한적한 어느 숲속에서 조금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공공 도서관 건축 공모전을 준비하며, 공간과 사람이 어떤 관계를 맺는지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의 글을 따라 서서히 책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 몹시 좋았었다. 그래서 이 작품이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처럼 녹음이 무성한 여름에서 흰 눈이 소복이 쌓인 겨울까지 서서히 흐르는 책 속의 시간에 빠져들 생각에 기대가 되었다. 하지만,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은 내가 기대한 것과 다른 소설이었다. 달라서 더 좋았던 소설이었다.

 

 

이야기의 전개와 문체는 일본 소설 특유의 느낌이 강하다.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일본 소설에서 종종 등장하는 클리셰들이 소설 곳곳에 나타난다. 그중에 소노다 할머니, 고양이 후미는 일본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독특함이 있다. 이야기 전체를 두고 보면 적당한 거리감이 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마음속을 관통하는 메시지를 준다. 이는 "마음에 남는 여운"을 소중히 여기는 일본 특유의 감성인데, 소설 전체를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든든한 버팀목과 같다. 이 버팀목을 멀리서 바라보기도 하고, 살짝 기대기도 하는 이가 바로 주인공 오카다다. 마흔여덟 살. 잡지사에서 일하는 주인공은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다. 인테리어에 돈과 시간을 들이는 데 돈을 아끼지 않는다. 자신이 삶을 보내는 집이란 공간을 오카다식으로 아끼는 방식이자, 자기 자신의 마음에 기쁨을 주는 일이다. 이토록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은 그가 보는 풍경은 그의 시각이 중첩되어 펼쳐진다. 마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에서 건축 용어를 통해 매우 구체적으로 가루이자와 곳곳을 표현한 것처럼, 도쿄의 어느 작은 마을의 집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서두에서 말했듯, 주인공의 이혼과 함께 시작된다. 오랜 시간 함께 해온 아내와 이혼을 하고, 5년 정도 부적절한 만남을 가진 연인과도 이별한 그는 혼자가 된다. 간간이 후미가 혼자된 그의 삶에 스치지만, 좀처럼 후미에게 곁을 내주지 않는다. 그런 그를 따라다니는 게 있으니, 바로 "우아함"이란 외롭고 고고한 감정이다. 그 스스로 붙인 것은 아니고, 혼자된 그를 두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붙인 표현이다. 처음 이 표현과 마주했을 때는 조금 무신경하게 지나친다. 하지만 "우아함"은 주인공에게 중요한 감정의 고리로 느슨해지기도 하고, 조여오기도 하며 이야기 속에 녹아져 있다. "우아함"이 주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라는 추론은 되지만, 주인공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선명하게 잡히지 않는다. 그 선명하게 와닿지 않은 감정은 아내와 이혼, 옛 연인과 재회, 아들의 고백 등 다양한 사건이 벌어진 후, 주인공의 마음속에 서글픔, 외로움, 덤덤함이 얽혀 있었다.

 

 

"쓸쓸하거든. 마음은 편하지만." 소노다 씨는 쿡 웃고 말을 이었다. "애니웨이, 웰컴 투 아워 킹덤 어브 소로."
이번에는 갑자기 영국식 영어다. 소로? Sorrow 인가. 슬픔의 왕국? 아니면 불행의 왕국? 그럼 이 사람은 허 매저스티, 여왕 폐하인가.


처음 그가 소노다 씨를 만났을 때 그가 말하는 Sorrow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혼자 산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홀로 마주한 시간이 길어지자 소노다 씨의 말이 서서히 그의 말로 바뀐다. 그가 처음 "우아함"을 접했을 때, 몰랐지만 그의 우아함은 소노다 씨의 말이 주는 이미지로 옮겨진다. 외롭지만, 왕국과 같은 곳에 머무는 느낌.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지만, 이 묘사에서 복합적으로 전해지는 감정이다. 하지만 과연 이게 오카다가 느끼는 감정일까. 소노다 씨의 표현 자체는 적절하고 곱씹을수록 그 의미가 은은히 전해지지만, 주인공의 시각과 맞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그만이 할 수 있는, 자신의 삶의 순간에 대해 스스로가 정의한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표현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 부재해, 그럴싸하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다음을 살펴보게 만들었다.

 

 

무언가 분명하게 결정되지 않고, 결정된 삶도 다시 바뀌는 오카다는 자신이 홀로 있을 때 붙는 "우아함", "외로운 왕국"이란 감정을 가나의 표현을 자신의 말인 양 툭 말한다. 어쩌면 그가 혼자 살 때 가장 큰 영향을 받았던 사람이 가나였고, 그가 진짜 같이 살고 싶은 사람이어서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때 소노다 씨는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기 보다 반문한다. 진짜 그렇게 생각하냐고 말이다. 혼자가 정말 마음이 편하냐고 말이다. "우아함"이나 "외로움"이나 "혼자 있는 것"이 정말 마음을 편안하게 하느냐고 묻는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바로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소노다 씨도 그 답을 듣지 않았지만, 나올 답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미소를 짓는다.


그는 "우아한 독신"이나, "외로움", "혼자 있는 것"을 마음 편하게 느끼지 않는다. 때때로 오랜 생활 패턴이 붙잡고 있던 관성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느끼며 좋은 감정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차분하고 고요한 삶의 순간순간을 들여다볼 여유가 더 늘어나기도 했다. 좋아했던 집을 가꾸는 일에 집중하기도 한다. 오래된 집을 수리하며 맞이하는 시간을 즐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다양한 사건들 뒤에 혼자 있을 때 마음에 부는 쓸쓸함이 그는 싫었었다. 집 수리가 더뎌지지만, 가나를 만나는 일에 더 큰 설렘과 행복을 느꼈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채, "우아한 삶"을 좋다고 받아들였다.

 

"우아하단 말은 이제 그만 듣고 싶다."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그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졌다. 마지막 문장이 이 문장이에서 좋았다. 그의 마음에 공감하지 못했지만, 마지막 문장이 그의 진심이라는 건 확실히 전해졌다.
갑작스레 맞이한 혼자 있는 시간을 지나온 그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 누군가와 '함께'하는 삶이라는 메시지가 담긴,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사람들과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혼자 있는 선택이 합리적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잠깐 했는데. 그 생각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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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와 공작새
주드 데브루 지음, 심연희 옮김 / 북폴리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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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사랑받은 로맨스 소설 작가를 꼽으라면, 난 주저 없이 "제인 오스틴"을 말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오만과 편견》은 내 첫 로맨스 소설이었고, 내가 처음으로 반복해서 읽은 로맨스 소설이었다. 누군가는 200년 전 로맨스 소설을 왜 그렇게 좋아하느냐고 물어볼지도 모른다. 그런데,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는 마음을 간질거리게 하는 힘이 있다. 뻔한 결론이 보이지만, 그럼에도 그 뻔한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알고 싶게 만드는 힘 말이다. 스킨십도 없었고 절절한 애정 표현보다 오해와 편견 속에 어긋나기 바쁜 사랑과 그 사랑이 결실을 이루기까지의 과정을 읽으며 참 설레었던 기억이 난다. 여기에 불을 붙인 사람이 있으니, 지금은 중후한 매력으로 전 세계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콜린 퍼스다. 1995년 BBC에서 만든 <오만과 편견>의 다아시로 출연해 책 속의 다아시가 엘리자베스에게 보낸 "여러 감정이 뒤엉킨 (뜨거운) 눈빛"을 이보다 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연기했다. 그의 연기는 약 20년이 지났지만, 바스에 있는 제인 오스틴 문학관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오만과 편견》은 드라마뿐만 아니라,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 외에 <오만과 편견>을 사랑한 작가들은 영화 <브리짓 존스> 시리즈나 드라마 <오만과 편견 다시 쓰기> 등 저마다의 방식으로 오마주 하여 세상에 선보였다.
그리고 할리퀸 로맨스계 대모라 불리는 주드 데브루도 《오만과 편견》을 자신의 방식으로 각색해 세상에 내놓았다. 《파이와 공작새》는 200년의 시간을 넘어 《오만과 편견》이 우리 시대에 다가올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을 연 소설이다.
로맨스 소설의 전형적인 공식이 다 녹아진 소설이 할리퀸 소설이다. 그렇다면, 《오만과 편견》은 할리퀸 소설의 효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유명한 《오만과 편견》을 주드 데브루는 어떻게 이야기할까? 저자는 《파이와 공작새》의 세계로  《오만과 편견》 소설을 과감하게 들고 간다. 비슷한 이름을 사용해 넌지시 《오만과 편견》을 말하거나, 《오만과 편견》의 세계로 여자 주인공이 들어가지 않는다. 영국에 아주 작은 마을에서 연극 《오만과 편견》을 선보이는 설정으로, 《오만과 편견》과 《파이와 공작새》가 공존하는 가운데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제껏 난 이 감정과 싸워 왔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비천한 출생과 환경,
수준 낮은 당신 집안사람도
내 마음속에 이 감정을 꺾지는 못했습니다.
내가 얼마나 열렬한 마음으로
당신을 숭배하고 사랑하는지
고백하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신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저야말로 어째서
당신이 제 기분을 상하게 하고
모욕하시는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당신의 이성이나 의지와는 정반대로
저를 좋아하신다고요?
수준도 맞지 않다고 하셨죠!
예전에는 저도
당신을 좋아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가게도 없고, 택시도 잡을 수 없는 작은 영국 마을에 할리우드 최고의 남자 배우 테이트가 찾아온다. 《오만과 편견》 연극의 "다아시 역"을 맡게 되어, 썩 내키지 않은 시골 마을 생활을 시작한다. 물론 그는 혼자 오지 않았고, 그의 친구가 "다이시"의 친구 "빙리 역"을 맡으며 함께 찾아온다. 원작에서 어리숙한 매력을 뽐내던 빙리와 달리, 테이트에게 "매력을 못 느꼈다고? 뻥치시네."라며 부정하는 마음을 부정하는 꽤정확하게 지적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또 다른 주인공은 리지처럼 이 마을에만 살았던 사람일까? 그렇지 않다. 자신의 커리어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케이시는 유명한 레스토랑 요리사였다. 하지만, 남자친구에게 영문도 모른 채 이별 통보를 듣는 상황을 겪게 된다. 씩씩한 케이시는 일단, 당황스러운 일은 뒤로 두고, 작은 마을에 휴가를 내고 찾아온다.


두 사람은 《오만과 편견》 연극이 펼쳐질 곳이란 걸 알았지만, 그곳이 자신의 인생의 무대가 될 거라곤 생각도 못한채 도착한다. 여느 소설처럼 말이다. 처음에 분주한 도시 속에 있던 두 남녀가 조용하다 못해 한적한 시골 마을에 찾아와 무슨 사건이 있을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이건 내 착각이었다. 샤워하는 주인공을 몰래 염탐하며 관음 하기도 하고, 집에 무단으로 침입해 파이 한 조각을 먹는 (현실 속에서는 절대로) 이해도 납득도 할 수 없는 기막힌 상황이 벌어진다. 놀라운 건 납득 불가능한 상황은 서로에 대한 오해와 편견과 또 다른 감정을 남긴다는 점이다. 생각해보면 결과적으로  몹시,  《오만과 편견》스러운 상황이 벌어진다. 그리고 이 상황들은 1부에서 다아시와 리지의 대사를 통해 넌지시 드러나기도 하고 속마음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두 사람의 말 속에서 직접적으로 또 솔직하게 나타난다.

 

"제인 오스틴은 중요한 대화를 전부 생략해 버렸어. 그래서 지금 대본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고."

 

흠잡을 데 없는 제인 오스틴의 작품을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케이시는 동의할 수 없다며 못마땅한 신음을 내었다.

 

"여길 보라고. 이 책의 주요 장면은 전부 간접적으로 나타날 뿐이잖아. 엘리자베스는 다아시가 청혼을 했을 때 뭐라고 했는지 설명이 하나도 없어. 그냥 자신을 모욕했다고만 했지. 어떻게 모욕했는데? 정확히 뭐라고 했기에? 이 작가는 이런 점을 지적해 줄 편집자도 없었냐?"


눈빛으로 손끝의 떨림으로 자신의 감정 상태를 표현하던 다아시와 달리 테이트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데 숨김이 없다. 서툰 감정 표현보다 솔직하고 진솔한 마음으로 다가간다. 그 강렬하고, 좀처럼 회복하기 힘든 상황을 돌이킬 만큼, 그는 케이시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처음 느낀 후, 어쩔 줄 몰라 하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툭 튀어나가거나, 리지의 생각을 고려할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커진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 다아시와 분명 다르다. 대신, 영화배우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또 힘든 유년시절을 보내며 가지게 된 그의 오만한 태도는 케이시와 갈등을 일으킨다.

 

케이시는 리지처럼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리지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누군가에게 창피함을 안겨주는데 망설일 정도로 예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성격이었던 반면에 케이시는 리지보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데 망설임이 없다. 처음으로 《오만과 편견》 연극의 리지 역할로 다아시와 대사를 맞출 때 그녀의 성격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러 사람들이 그들 주변에 있었지만, 그녀는 좀 전에 들은 그에 대한 이야기를 충분히 확인하지 않은 채 이야기한다. 이런 케이시의 성격은 테이트와 사이에 문제를 만드는 원인이 된다.

 

 

"아, 뭐. 오빠의 오만함과 당신의 편견이 만난 거죠. 아주 그럴듯한 맞수예요."

 

케이시와 테이트 사이에서 기막힌 사건 말고, 또 한번 벌어지는 오해와 갈등이 벌어진다. 물론 이 역시,오만함과 편견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처음에 나온 오만, 편견과는 사뭇 다르게 그려진다. 성격도 사랑에 빠지는 계기도 《오만과 편견》과 달라 과연 '오만', '편견'이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케이시 안에는 리지가 가지고 있던 '편견' 한 조각이 있었고, 테이트 안에는 '오만' 한 조각이 있었다. 그 조각들이 나타나는 방식이 200년 전과 달랐을 뿐이었다. 그리고 《파이와 공작새》를  읽는 동안, 나에게 있는 케이시의 편견, 테이트가 가지고 있던 오만을 발견하게 된다.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은 상처받기 두려워서다. 또 상처를 받을 수는 없어. 낭만적인 환상에 빠진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체리나무 아래에서 사랑을 나누는 모습. 웃으면서 손을 잡고 화가 난 공작새를 피해 이리저리 도망치는 모습. 벽에 기대어 서로를 탐하는 모습. 여름날의 소나기를 맞으며 키스하는 모습.

 

그를 열렬히 사랑하지만, 그 앞에서 때때로 작아지는 것 같은 자신의 모습에 홀로 상처 받을 때가 있는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행복했던 한때를 떠올리게 만드는 낭만적인 환상이나 상대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잔혹한 환상에 사로잡혀 상대를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는 일은 비단 케이트만의 일이 아니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자존감이 낮아지는 일과 마주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다. 나 역시 스스로가 만든 생각을 "편견"처럼 부여잡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편견은 아픔을 남겼지만, 케이시처럼 극적 반전을 만들어주지 않았던 씁쓸한 기억이 스쳤다.

 

"가끔 남자는 굳이 변명을 하지 않을 때가 있어. 자기의 명예를 지키고 싶어서 말이야. 그게 구시대적 발상이라는 거, 나도 알아. 하지만 네가 남자를 좀 이해해 줘. 우리 남자들이란 아직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사니까."

 

조시는 남자의 감정이라고 말했지만 누구나 사랑하는 상대가 내가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해주길 바라고, 때로는 설명을 통해 드러내고 싶지 않은 마지막 자존심이 있다. 최후의 보루일 수도 있고, 때로는 자신이 명예롭다고 생각하는 일일 수도 있다. 어쩌면 사랑하는 사이이기에 "말하지 않아도 이해"해주길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마음이든 중요한 건, 이를 상대가 사랑으로 이해하거나 믿어주길 바란다. 하지만 테이트처럼 그렇지 않았을 때 엄청난 서운함과 실망감이 전해지고, 심할 경우 배신감을 느끼기도 한다. 사실 말하지 않아도 이해되는 건 없다는 걸 머리로는 너무나 잘 알지만 마음으로는 참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 주드 데브르는 사랑과 엉키기 쉬운  '오만과 편견'을 현대적으로 우리가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상황으로 재정리한다. 200년 전 사람들의 '오만과 편견'과 비슷한 듯 다른 그 마음을 정확히 잡아낸 소설이  《파이와 공작새》다. 그러니 《오만과 편견》 을 읽듯이, 결론보다 그 과정을 깊이 있게 느끼는 책 읽기를 추천한다.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질 것인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인가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다. 두 사람이 어떤 감정 변화를 느끼고, 이를 어떻게 표현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이에 주목하다 보면, 《오만과 편견》 과 비슷한 듯 다른 《파이와 공작새》만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사실 《파이와 공작새》의 진짜 개성은 제인 오스틴이 읽으면 "깜짝 놀라며, 발칙한 소설!"이라고 할만한 할리퀸 버전에 있는데, 그건 직접 읽으며 느끼길 권한다. 그걸 표현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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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견주 2 - 사모예드 솜이와 함께하는 극한 인생!
마일로 지음 / 북폴리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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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예드 솜이와 함께하는
행복한 시간

 

 

몰랐다. 강아지와 일상이 이렇게나 다이내믹한지. 이렇게 극한 상황의 연속인지. 아, 물론 힘들어서가 아니라 진짜 사랑스러워서! 진짜 귀여워서! 그래서 숨 막히게 행복하게 만들어서. 사모예드 솜이와 함께한 시간을 보며 나도 모르게 눈이 반달로 휘어졌다. 큰 소리로 웃다가, 엄마 미소 짓다가, 시무룩해지는 걸 반복했다. 아마 솜이를 보고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

 

 

솜이의 표정은 생각보다 다채롭지 않았다. 사랑스럽다는 표현이 많았는데. 솜이의 사랑스러움은 표정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솜이의 표정 대부분은 “갸웃 갸웃” 거리는 것이다. 갸웃거리며 미소 짓는 솜이. 그런데 자신의 생각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황에 대해 삐죽 올라간 입꼬리로 많은 걸 표현하는 솜이. 그런 솜이가 정말 정말 사랑스럽다. 사고치고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솜이의 표정은 그 전후 맥락에 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기에 이 표정을 지을 때 난 가장 좋았다. 아마 솜이가 사랑스러운 이유는 솜이가 어떻게 해서도, 어떤 표정이어서가 아니라.. 아마 솜이 존재 자체가 사랑스러워서가 아닐까.

 

 

그러다가도 솜이의 표정이 다채롭지 않다는 말을 취소해야 할 정도로. 때때로 이렇게 치명적인 솜이의 표정이 나온다. 그 표정은 솜이의 본능(?)과 깊은 연관관계가 있다. 달걀을 맛본다든지, 털갈이인지, 개춘기인지 의심스러운 때 솜이의 표정이 몹시 귀엽다. 물론, 주인으로써는 마냥 귀여울 수 없지만.
강아지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실제로 이런 표정을 보지 않았을까 싶다. 강아지를 키우지 않는 나로서는.. 진짜 강아지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몹시 궁금해졌다. 정확하게, 나와 함께 사는 강아지에게서 이렇게 다채로운 표정을 읽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마일로 작가가 솜이의 표정을 섬세하게 포착한 것을 살펴보는 즐거움도 솔솔했다.

 

 

보다 보면 솜이의 생각이 나 역시 몹시 궁금하다.
"솜이는 이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솜이의 하루 하루를 보다보면, 솜이가. 강아지가 궁금해진다. 이렇게 점점 애견인의 삶을 염탐하게 되나 보다. 동물을 먼발치에서 감상하기 바빴던 내가, 이 귀여운 솜이에 대해 궁금해지다니.. 지극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마일로 작가의 표현처럼. “하찮고 귀여운 녀석...”이니까. 그런데 솜이를 보며 바보처럼 웃는 날, 솜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하찮고 귀여운 녀석...”이라고.

 

 

웹툰 속 (혹은 현실 속) 작가의 표정을 볼때면 대왕견과 동거하는 일이 쉽지 않겠구나 싶다. 정말 극한 도전일 것 같은 느낌이 <극한견주 2>를 보면 느낄 수 있다. 역시, 동물과 함께 삶을 공유하는 것은 쉽지 않구나. 싶다가도. 이 공존을 하고 싶어졌다. 동생이 대왕견을 키우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지만, 완고한 가족들의 반응에 늘 좌절되곤 했지만. <극한견주 2>를 보고 누나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동생이 좀 더 의욕적으로 추진하지 않을까 싫지 않은 걱정이 스친다.

 

 

울먹이는 솜이의 이야기와 <극한견주 2>에만 실려있는 솜이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궁금하다면, <극한견주 2>를 통해서 확인해보면 어떨까?
솜이의 사랑스러움을 한가득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강하게 확신한다!

 

 

친구에게 극한견주를 본다고 이야기했더니, 이 이모티콘을 나에게 보냈다.
몰랐는데, 마일로 작가의 극한견주를 나만 빼고 다 아는 유명 웹툰이었나보다.
그런데.. 책을 읽다보니, 왜 사랑 받았는지 알 수 있었던 <극한견주 2>.
두고두고 솜이의 사랑스러움을 확인하고 싶다면! 꼭 읽어보시길!
아마 나처럼 솜이의 사랑스러움에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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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복 - 누릴 복을 아껴라
정민 지음 / 김영사 / 2018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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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디게 읽어서 좋았던 책





오랜 시간 간직해온 글이 지닌 가치를 발굴해온 정민 교수
옛 문헌 속에서 발견한 '앎'의 가치를 공유하는, "석복"


내 또래 학생들이라면, 멋모르던 시절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로 한시의 고즈넉한 매력을 어렴풋 느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쓰는 말과 달리 툭툭 토막 나 있는 것 같은 한시에서 생각의 이음새를 발견해주던 정민 선생님의 글은 거의 10년이 지난 지금도 "좋았다"라는 느낌으로 남아있다.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신 이야기를 듣던 내가 이젠 정민 교수님이 말하는 이야기를 읽다니. 《석복》을 읽기 전에 벌써 오묘해졌다.


옛 글이 세상에 잊히지 않도록, 세상이 옛 글이 지닌 소중함을 잊지 않도록 끊임없이 글로 소통했던 정민 교수님이 2018년에 전하고픈 이야기가 담긴 《석복》은 낯설지만 궁금증을 자아내는 책이었다. 책에는 찬선 사자성어가 가득 들어 있다.


석복겸공. 어후반고. 소지유모. 첨제원건. 무소유의. 치이란이...


단어만 봐서는 좀처럼 어떤 뜻이 담겨있는지 예측이 되지 않았다. 역시, 한시 이야기 때처럼 정민 교수님의 해설이 필요했다. 간결하게 하나의 단어로 담은 네 개의 한자어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 그 궁금증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옛 글의 맥락과 이야기에 닿게 된다. 우리나라 역사뿐만 아니라 동양의 역사 곳곳을 자유자재로 종횡무진하는 정민 교수님의 지(知)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그 시간 속 수많은 지식인들의 이야기가 짧은 에피소드 속에 함축하다니,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저자는 그 시간의 간격을 글로 압축한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우리와 한참 다르다고 생각했던, 옛사람들이 마음에 품었던 생각과 이야기는 우리와 참 비슷하단 걸 깨닫게 된다. 일상에서 마주하게 되는 일들, 만나는 사람들, 공부하며 마주한 고민들, 살을 부딪치며 살아가는 삶에서 필연적인 인간관계와 자기 자신을 성찰해야 하는 것까지. 지금 이 시대의 고민과 생각들과 너무도 깊이 닿아있는 화두들이라는 걸 알 수 있다. 한자가 중간중간 섞여있는 글과 글 사이에 녹인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옛 글 속에 지금이 보이는 기묘한 마주침과 마주할 수 있다. 이렇게 한시의 대중화를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저자의 생각은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이 시대를 예리하게 관찰할 수 있는 시각과, 보이는 것을 깊이 사유할 수 있는 사유를 제공해준다.



인생의 지혜가 담긴 글에서 얻은 깨우침


조선시대 문인들의 글을 읽고 시대에 필요한 메시지를 포착해낸 저자는 다양한 동양 고전에서 이 시대에 필요한 이야기를 간결하게 정리했다. 저자가 풀어놓은 글들은 사자성어로 한번 압축을 거쳐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 뒤, 자신의 글로 다시 한번 풀어낸다. 하지만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처럼 촘촘히 생각을 담기 보다, 군데군데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을 할 수 있는 틈을 만들어준다.





《채근담》에서는 "총욕에 놀라지 않고 뜰 앞에서 피고 지는 꽃들을 한가롭게 본다. 가고 머묾에 뜻이 없어 하늘 밖의 구름이 말렸다 펴졌다 하는 것에 눈길이 따라간다"라고 했다. 사람들은 잠시 총애를 받으면 금세 으스대고 잠깐 욕을 보게 되면 분을 못 참고 파르르 떤다. 경솔함으로 쌓아온 공을 허무느니, 입 다문 만근의 무게를 지님이 마땅하다.


마음 간수 장에 나오는 "총욕불경(寵辱不驚)"을 두고 생각해보아도, 이 메시지가 단지 옛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다. 인생을 조금만 멀리서 들여다보면 일희일비의 연속이다.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하지만, 쉽지 않은 걸 저자는 "총욕불경"이란 단어 속에 담아냈다. 마음을 고요하게 간수하는 것이 마음에 치미는 감정 앞에서는 쉽지 않지만, 조금만 한발 물러서서 들여다보면 내 몸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내 마음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은 때라 그런지 마음을 지키고 감싸주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책이 정말 많다. 저자의 글은 마치 마음의 곳간을 든든하게 지키는 빗장처럼 단단하고 묵직한 감촉이 전해진다.


 




또 다른 예로 마음 간수 편의 조존사망(操存舍亡)은 좀 더 본질적인 마음 간수에 대해 이야기한다.

 

《대학》에서는 "마음이 나가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그 맛을 모른다"고 했다. 정자가 "나가버린 마음을 붙들고 와서 되풀이해 몸 안에 들여놓아야 한다"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줄임말 같은 조존사망은 붙들어야 남고, 놓으면 놓치는 마음의 속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누구나 잡념을 품을 수 있지만, 그 잡념에게 잠시의 틈을 주는 것과 마음을 빼앗겨버리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마음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마음을 지키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잃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담긴듯싶다. 마음을 지키는 것은 슬픔에 마음이 잠겼을 때뿐만 아니라, 기쁨에 마음이 두둥실 떠올랐을 때도 똑같이 지켜야 한다. 마음을 붙들어 간직하는 것이 어려운 건 비단 우리들만의 일은 아니었다고 저자는 심심한 위안을 더한다. 옛 선비들 역시 마음을 지키는 것을 참 어려워했으며 이를 위해 끊임없이 공부를 했다. '끊임없이 경계하고 삼가며 두려워하는 마음가짐(계신공구 戒愼恐懼)'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그들의 거쳐온 시간을 짧은 문장으로 살피다 보면, 마음에 대한 나의 태도를 돌아보게 된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마음에 품고 있는 《석복》 속 단어 하나가 있다.

 





글을 읽고 그 사람이 보여야 좋은 글이다. 글 너머로 작동하고 있는 한 가지 물건이 있어야, 어떤 글을 써도 그 사람의 빛깔이 나온다. 수사가 뛰어나고 주장이 제아무리 훌륭해도 이 한 가지 물건이 없이는 그저 그런 글이 되고 만다. 어찌해야 이 물건을 얻을 수 있나? 우리가 공부를 계속해야 하는 이유다.


내가 쓴 글에는 어떤 자취가 남아 있을까. 《석복》의 문유삼등(文有三等)의 글은 남다른 여운을 주었다. 나의 글은 어디에 속하고 있는가. 나만 감동하고, 읽는 이에 대한 배려는 잃어버리지 않았는지 돌아보게 된다. 중등과 하등 그 사이 어딘가에 놓인 글은 아닐까 생각이 깊어졌다. 그 고민을 안고 한 페이지를 넘기니 "글에는 꼭 이래야 한다는 일정한 법칙이란 없다. 다만 그 상황에 꼭 맞게 쓰면 된다."라고 한다. 상황에 맞는 글이라니 더 어렵다. 저자가 내 상각을 읽은 건지 "그게 참 쉽지가 않다."라는 한 마디를 더한다. 결국 글이란 생각의 힘을 길러야 하며, 그때야 글에 힘이 붙는다고 한다.


《석복》 은 내가 자주 읽지 않는 글들이었다. 그렇기에 참으로 낯설었고, 다른 책들보다 더디게 읽었다. 그래서 한 호흡으로 길게 읽은 책이 아니었다. 천천히 읽었고, 어떨 때는 한편의 글만을 읽기도 했었다. 그렇게 내가 평소에 읽는 속도보다 느리게 읽다 보니, 그 느린 속도를 따라붙는 생각들이 있었다. 결국 책을 다 읽고 나니 천천히 내가 읽어온 짧은 글과 글 사이에 채워진 나의 생각이 보였다.


많은 책들이 아름다운 꽃송이와 같다. 저자의 생각이 저마다 자신의 빛깔을 내며 아름다운 결과물을 피워낸다. 그 아름다움은 들여다보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한눈에 보여서 꽃과 같은 책을 많이 읽어왔는지도 모른다. 《석복》 은 꽃보다 '뿌리' 같은 책이었다. 뿌리는 좀처럼 들여다보기 힘들다. 하지만 단단히 식물을 바치며 눈에 보이지 않는 흙 속 틈을 메운다. 그래서 단순히 좋은 이야기를 전하는 책이 아니라, 생각의 바탕을 깊고 넓게 만들어주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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