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와 공작새
주드 데브루 지음, 심연희 옮김 / 북폴리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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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사랑받은 로맨스 소설 작가를 꼽으라면, 난 주저 없이 "제인 오스틴"을 말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오만과 편견》은 내 첫 로맨스 소설이었고, 내가 처음으로 반복해서 읽은 로맨스 소설이었다. 누군가는 200년 전 로맨스 소설을 왜 그렇게 좋아하느냐고 물어볼지도 모른다. 그런데,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는 마음을 간질거리게 하는 힘이 있다. 뻔한 결론이 보이지만, 그럼에도 그 뻔한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알고 싶게 만드는 힘 말이다. 스킨십도 없었고 절절한 애정 표현보다 오해와 편견 속에 어긋나기 바쁜 사랑과 그 사랑이 결실을 이루기까지의 과정을 읽으며 참 설레었던 기억이 난다. 여기에 불을 붙인 사람이 있으니, 지금은 중후한 매력으로 전 세계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콜린 퍼스다. 1995년 BBC에서 만든 <오만과 편견>의 다아시로 출연해 책 속의 다아시가 엘리자베스에게 보낸 "여러 감정이 뒤엉킨 (뜨거운) 눈빛"을 이보다 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연기했다. 그의 연기는 약 20년이 지났지만, 바스에 있는 제인 오스틴 문학관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오만과 편견》은 드라마뿐만 아니라,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 외에 <오만과 편견>을 사랑한 작가들은 영화 <브리짓 존스> 시리즈나 드라마 <오만과 편견 다시 쓰기> 등 저마다의 방식으로 오마주 하여 세상에 선보였다.
그리고 할리퀸 로맨스계 대모라 불리는 주드 데브루도 《오만과 편견》을 자신의 방식으로 각색해 세상에 내놓았다. 《파이와 공작새》는 200년의 시간을 넘어 《오만과 편견》이 우리 시대에 다가올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을 연 소설이다.
로맨스 소설의 전형적인 공식이 다 녹아진 소설이 할리퀸 소설이다. 그렇다면, 《오만과 편견》은 할리퀸 소설의 효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유명한 《오만과 편견》을 주드 데브루는 어떻게 이야기할까? 저자는 《파이와 공작새》의 세계로  《오만과 편견》 소설을 과감하게 들고 간다. 비슷한 이름을 사용해 넌지시 《오만과 편견》을 말하거나, 《오만과 편견》의 세계로 여자 주인공이 들어가지 않는다. 영국에 아주 작은 마을에서 연극 《오만과 편견》을 선보이는 설정으로, 《오만과 편견》과 《파이와 공작새》가 공존하는 가운데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제껏 난 이 감정과 싸워 왔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비천한 출생과 환경,
수준 낮은 당신 집안사람도
내 마음속에 이 감정을 꺾지는 못했습니다.
내가 얼마나 열렬한 마음으로
당신을 숭배하고 사랑하는지
고백하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신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저야말로 어째서
당신이 제 기분을 상하게 하고
모욕하시는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당신의 이성이나 의지와는 정반대로
저를 좋아하신다고요?
수준도 맞지 않다고 하셨죠!
예전에는 저도
당신을 좋아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가게도 없고, 택시도 잡을 수 없는 작은 영국 마을에 할리우드 최고의 남자 배우 테이트가 찾아온다. 《오만과 편견》 연극의 "다아시 역"을 맡게 되어, 썩 내키지 않은 시골 마을 생활을 시작한다. 물론 그는 혼자 오지 않았고, 그의 친구가 "다이시"의 친구 "빙리 역"을 맡으며 함께 찾아온다. 원작에서 어리숙한 매력을 뽐내던 빙리와 달리, 테이트에게 "매력을 못 느꼈다고? 뻥치시네."라며 부정하는 마음을 부정하는 꽤정확하게 지적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또 다른 주인공은 리지처럼 이 마을에만 살았던 사람일까? 그렇지 않다. 자신의 커리어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케이시는 유명한 레스토랑 요리사였다. 하지만, 남자친구에게 영문도 모른 채 이별 통보를 듣는 상황을 겪게 된다. 씩씩한 케이시는 일단, 당황스러운 일은 뒤로 두고, 작은 마을에 휴가를 내고 찾아온다.


두 사람은 《오만과 편견》 연극이 펼쳐질 곳이란 걸 알았지만, 그곳이 자신의 인생의 무대가 될 거라곤 생각도 못한채 도착한다. 여느 소설처럼 말이다. 처음에 분주한 도시 속에 있던 두 남녀가 조용하다 못해 한적한 시골 마을에 찾아와 무슨 사건이 있을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이건 내 착각이었다. 샤워하는 주인공을 몰래 염탐하며 관음 하기도 하고, 집에 무단으로 침입해 파이 한 조각을 먹는 (현실 속에서는 절대로) 이해도 납득도 할 수 없는 기막힌 상황이 벌어진다. 놀라운 건 납득 불가능한 상황은 서로에 대한 오해와 편견과 또 다른 감정을 남긴다는 점이다. 생각해보면 결과적으로  몹시,  《오만과 편견》스러운 상황이 벌어진다. 그리고 이 상황들은 1부에서 다아시와 리지의 대사를 통해 넌지시 드러나기도 하고 속마음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두 사람의 말 속에서 직접적으로 또 솔직하게 나타난다.

 

"제인 오스틴은 중요한 대화를 전부 생략해 버렸어. 그래서 지금 대본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고."

 

흠잡을 데 없는 제인 오스틴의 작품을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케이시는 동의할 수 없다며 못마땅한 신음을 내었다.

 

"여길 보라고. 이 책의 주요 장면은 전부 간접적으로 나타날 뿐이잖아. 엘리자베스는 다아시가 청혼을 했을 때 뭐라고 했는지 설명이 하나도 없어. 그냥 자신을 모욕했다고만 했지. 어떻게 모욕했는데? 정확히 뭐라고 했기에? 이 작가는 이런 점을 지적해 줄 편집자도 없었냐?"


눈빛으로 손끝의 떨림으로 자신의 감정 상태를 표현하던 다아시와 달리 테이트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데 숨김이 없다. 서툰 감정 표현보다 솔직하고 진솔한 마음으로 다가간다. 그 강렬하고, 좀처럼 회복하기 힘든 상황을 돌이킬 만큼, 그는 케이시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처음 느낀 후, 어쩔 줄 몰라 하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툭 튀어나가거나, 리지의 생각을 고려할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커진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 다아시와 분명 다르다. 대신, 영화배우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또 힘든 유년시절을 보내며 가지게 된 그의 오만한 태도는 케이시와 갈등을 일으킨다.

 

케이시는 리지처럼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리지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누군가에게 창피함을 안겨주는데 망설일 정도로 예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성격이었던 반면에 케이시는 리지보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데 망설임이 없다. 처음으로 《오만과 편견》 연극의 리지 역할로 다아시와 대사를 맞출 때 그녀의 성격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러 사람들이 그들 주변에 있었지만, 그녀는 좀 전에 들은 그에 대한 이야기를 충분히 확인하지 않은 채 이야기한다. 이런 케이시의 성격은 테이트와 사이에 문제를 만드는 원인이 된다.

 

 

"아, 뭐. 오빠의 오만함과 당신의 편견이 만난 거죠. 아주 그럴듯한 맞수예요."

 

케이시와 테이트 사이에서 기막힌 사건 말고, 또 한번 벌어지는 오해와 갈등이 벌어진다. 물론 이 역시,오만함과 편견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처음에 나온 오만, 편견과는 사뭇 다르게 그려진다. 성격도 사랑에 빠지는 계기도 《오만과 편견》과 달라 과연 '오만', '편견'이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케이시 안에는 리지가 가지고 있던 '편견' 한 조각이 있었고, 테이트 안에는 '오만' 한 조각이 있었다. 그 조각들이 나타나는 방식이 200년 전과 달랐을 뿐이었다. 그리고 《파이와 공작새》를  읽는 동안, 나에게 있는 케이시의 편견, 테이트가 가지고 있던 오만을 발견하게 된다.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은 상처받기 두려워서다. 또 상처를 받을 수는 없어. 낭만적인 환상에 빠진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체리나무 아래에서 사랑을 나누는 모습. 웃으면서 손을 잡고 화가 난 공작새를 피해 이리저리 도망치는 모습. 벽에 기대어 서로를 탐하는 모습. 여름날의 소나기를 맞으며 키스하는 모습.

 

그를 열렬히 사랑하지만, 그 앞에서 때때로 작아지는 것 같은 자신의 모습에 홀로 상처 받을 때가 있는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행복했던 한때를 떠올리게 만드는 낭만적인 환상이나 상대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잔혹한 환상에 사로잡혀 상대를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는 일은 비단 케이트만의 일이 아니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자존감이 낮아지는 일과 마주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다. 나 역시 스스로가 만든 생각을 "편견"처럼 부여잡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편견은 아픔을 남겼지만, 케이시처럼 극적 반전을 만들어주지 않았던 씁쓸한 기억이 스쳤다.

 

"가끔 남자는 굳이 변명을 하지 않을 때가 있어. 자기의 명예를 지키고 싶어서 말이야. 그게 구시대적 발상이라는 거, 나도 알아. 하지만 네가 남자를 좀 이해해 줘. 우리 남자들이란 아직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사니까."

 

조시는 남자의 감정이라고 말했지만 누구나 사랑하는 상대가 내가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해주길 바라고, 때로는 설명을 통해 드러내고 싶지 않은 마지막 자존심이 있다. 최후의 보루일 수도 있고, 때로는 자신이 명예롭다고 생각하는 일일 수도 있다. 어쩌면 사랑하는 사이이기에 "말하지 않아도 이해"해주길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마음이든 중요한 건, 이를 상대가 사랑으로 이해하거나 믿어주길 바란다. 하지만 테이트처럼 그렇지 않았을 때 엄청난 서운함과 실망감이 전해지고, 심할 경우 배신감을 느끼기도 한다. 사실 말하지 않아도 이해되는 건 없다는 걸 머리로는 너무나 잘 알지만 마음으로는 참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 주드 데브르는 사랑과 엉키기 쉬운  '오만과 편견'을 현대적으로 우리가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상황으로 재정리한다. 200년 전 사람들의 '오만과 편견'과 비슷한 듯 다른 그 마음을 정확히 잡아낸 소설이  《파이와 공작새》다. 그러니 《오만과 편견》 을 읽듯이, 결론보다 그 과정을 깊이 있게 느끼는 책 읽기를 추천한다.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질 것인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인가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다. 두 사람이 어떤 감정 변화를 느끼고, 이를 어떻게 표현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이에 주목하다 보면, 《오만과 편견》 과 비슷한 듯 다른 《파이와 공작새》만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사실 《파이와 공작새》의 진짜 개성은 제인 오스틴이 읽으면 "깜짝 놀라며, 발칙한 소설!"이라고 할만한 할리퀸 버전에 있는데, 그건 직접 읽으며 느끼길 권한다. 그걸 표현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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