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경계해야 할 것은 환자가 현세의 일들을 원수에게 순종할 기회로 삼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세상을 목적으로 만들고 믿음을 수단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면 환자를 다 잡은 거나 마찬가지지. 세속적 명분이야 어떤 걸 추구하든지 상관없다. 집회, 팜플렛, 강령, 운동, 대의명분, 개혁운동 따위를 기도나 성례나 사랑보다 중요시하는 인간은 우리 밥이나 다름없어. ‘종교적’이 되면 될수록(이런 조건에서는) 더 그렇지. 이 아래에는 그런 인간들이 우리 한가득 득실거리는 판이니 원한다면 언제든지 보여 주마.

원수가 인간 영혼 하나를 제 것으로 확보하기 위해 꼭대기보다 골짜기에 더 의존한다는 걸 알면 아마 좀 놀랄 게다. 원수가 특히 아끼는 인간들은 그 누구보다 길고도 깊은 골짜기를 통과해야 했다. 그 이유를 알겠느냐?

원수가 인간을 사랑한다느니 원수를 섬기는 게 외려 완벽한 자유라느니 하는 말들이 단순한 선전문구가 아니라(우리야 그렇게 믿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만) 소름끼치는 진실이라는 점은 우리도 직시해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건 키워서 잡아먹을 가축이지만, 그 작자가 원하는 건 처음엔 종으로 불렀다가 결국 아들로 삼는 것이다. 우리는 빨아들이고 싶어하지만 그는 내뿜고 싶어하지. 우리는 비어 있어 채워져야 하지만 그는 충만해서 넘쳐 흐른다. 우리의 전쟁 목적은 저 아래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다른 존재들을 모조리 삼켜 버리는 세상이지만, 원수가 바라는 건 원수 자신과 결합했으면서도 여전히 구별되는 존재들로 가득 찬 세상이야.
바로 이 지점에 골짜기가 끼어든다.

환자에게 만사에 중용을 지키라고 말해 주거라. ‘종교는 지나치지 않아야 좋은 것’이라고 믿게만 해 놓으면, 그의 영혼에 대해서는 마음 푹 놓아도 좋아. 중용을 지키는 종교란 우리한테 무교(無敎)나 마찬가지니까. 아니, 무교보다 훨씬 더 즐겁지.

인간은 미묘한 표정과 말씨와 웃음을 통해 자기가 상대방과 한편임을 암시할 수 있는 동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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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또다시 다리가 마비된 친구에게 와 있다. 친구는 그 특유의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런데 이탈리아에 대해서는 아직 한 번도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없군요."
"그러니 그것을 곧 벌충하라는 말이군요."
에발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눈을 감은 채 귀 기울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시작했다.
"우리가 봄이라고 느끼는 것도 하느님의 눈에는 지상을 스치는 순간적인 미소로밖에 비치지 않습니다. 대지는 무엇인가를 생각해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름이 되면 그것을 만인에게 들려주면서 대지는 어느덧 가을의 커다란 침묵에 싸여 한층 현명해집니다. 이 커다란 가을의 침묵으로 대지는 고독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비밀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당신이나 내가 지금까지 체험해온 봄을 모조리 하나로 합산해도 하느님의 1초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눈에 틀림없는 봄이라고 인정받으려면 봄을 헛되이 수목들 사이나 초원 위에 머물게 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든 인간의 내부에서 위대한 힘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여 비로소 봄은 시간의 흐름 밖에서 오히려 영원 가운데 하느님 앞에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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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가 나를 비웃을 거라는 걸 알아." 바질이 대답했다. "하지만 난 이 그림을 절대로 전시할 수 없어. 이 그림에는 내 자신을 너무 많이 반영했거든."

이 세상에서 언제나 가장 이득을 보는 쪽은 추하고 어리석은 자들이야.

"아, 딱히 뭐라고 설명할 순 없어. 난 너무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의 이름을 누구에게도 절대로 말하지 않아. 이름을 말해버리면 그 사람의 일부를 내주는 것만 같거든. 나는 점점 비밀을 무척 좋아하게 됐어. 바로 그것만이 우리에게 현대의 삶을 신비롭거나 경이롭게 만들어줄 수 있는 것 같거든. 가장 흔한 것도 비밀을 숨기고 있으면 기쁨을 주는 법이지. 만일 지금 이 도시를 떠난다면 나는 어디로 갈지 사람들에게 절대 말하지 않을 거야. 그걸 말해버리면 내가 느낄 기쁨이 완전히 사라져버리거든. 어리석은 습관일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런 습관이 인생에 크나큰 로맨스를 가져다주는 것 같아. 자넨 이런 말을 하는 나를 아주 어리석다고 생각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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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또다시 다리가 마비된 친구에게 와 있다. 친구는 그 특유의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런데 이탈리아에 대해서는 아직 한 번도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없군요."
"그러니 그것을 곧 벌충하라는 말이군요."
에발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눈을 감은 채 귀 기울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시작했다.
"우리가 봄이라고 느끼는 것도 하느님의 눈에는 지상을 스치는 순간적인 미소로밖에 비치지 않습니다. 대지는 무엇인가를 생각해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름이 되면 그것을 만인에게 들려주면서 대지는 어느덧 가을의 커다란 침묵에 싸여 한층 현명해집니다. 이 커다란 가을의 침묵으로 대지는 고독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비밀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당신이나 내가 지금까지 체험해온 봄을 모조리 하나로 합산해도 하느님의 1초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눈에 틀림없는 봄이라고 인정받으려면 봄을 헛되이 수목들 사이나 초원 위에 머물게 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든 인간의 내부에서 위대한 힘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여 비로소 봄은 시간의 흐름 밖에서 오히려 영원 가운데 하느님 앞에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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