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Q84 3 - 10月-12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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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는 두 개의 큰 축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한 축은 후카에리 라는 여고생이 쓴 소설 ‘공기 번데기’를 중심으로 주인공 덴고와 비밀집단 ‘선구’로 이어지는 이야기이다. 다른 한 축은 여자들을 폭행하는 못된 남자를 응징하는 아오마메와 버드나무집 노부인으로 연결되는 이야기이다. 이 두 이야기는 아오마메가 ‘선구’의 리더를 죽이면서 복잡하게 서로 얽혀들다가 덴고와 아오마메의 극적인 상봉을 향해 달려간다.
소설 속에는 리틀 피플, 목소리, 공기 번데기, 두 개의 달 같은 비현실적인 설정이 섞인다. 평범한 사람들도 있지만 선구의 리더와 후카에리는 특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1Q84는 무엇보다 덴고와 아오마메의 소설이다. 총 3권의 소설 중에 1권과 2권은 아오마메의 시점과 덴고의 시점이 사이좋게 한번 씩 교차하면서 전개한다. 3권에는 2부에 잠깐씩 등장하는 우시카와가 덴고와 아오마메와 함께 중요 인물로 부상한다.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커다란 상처를 가지고 있다. 덴고와 아오마메는 둘 다 어려서 비정상적인 부모 밑에서 자라 평생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둘은 초등학생 때 동병상련의 호감을 갖고 둘 만 있는 교실에서 운명적으로 손을 잡는다. 이 특별한 경험으로 성인이 되어서도 서로를 그리워한다.

아오마메는 광신적인 ‘증인회’ 신도인 부모 밑에서 자라면서 독특한 생활 방식 때문에 왕따가 된다. 견디다 못해 초등학교 5학년 때 집을 나와 친척집에서 산다. 이 상처로 아오마메는 찡그리면 얼굴이 괴물처럼 뒤틀리는 증상을 가지고 있다. 사랑도 정상적으로 하지 못하고 친구도 거의 사귀지 못한다. 거의 유일한 친구인 다마키는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 자살하고 만다. 가장 최근에 알게 된 아유미 마저 살해된다.    

덴고는 어머니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아버지와 산다.  NHK수금원인 아버지는 일요일마다 원활한 수금을 위해 어린 덴고를 데리고 다닌다. 덴고는 그가 자신의 친아버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젖먹이 때 어머니와 관련된 흐릿한 기억은 평생 상처로 남아 있다. 어디서든 그 생각이 떠오르면 덴고는 자기도 모르게 온 몸이 마비되는 기묘한 경험을 한다. 그는  자기 또래 여자들과는 연애도 잘 하지 못하고 연상의 여자가 훨씬 편하다.

1,2권에서 관심의 초점이 되는 여고생 후카에리는 어린 시절 선구에서 특이한 경험을 하고 열 살 무렵 그 곳을 탈출한 후 아버지 친구 집에서 산다. 놀랄 만큼 아름다운 아이지만 난독증이 있어 책을 읽지 못하고 글을 잘 쓰지도 못한다. 말투도 독특하다. 사람들 하고 잘 어울리지 못하고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3권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우시카와 역시 이상한 생김새 때문에 부모를 포함해서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다. 결혼은 했지만 아내와 딸들에게 조차 버림 받는다. 집요하고 치밀한 성격이라 일에는 철저하지만 본의 아니게 덴고와 아오마메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 후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작가는 재일 교포 문제의 뿌리가 되는 종전과 함께 한반도 출신자들이 일본 국적을 인정받지 못했던 사실을 ‘1Q84’에서 언급한다. 자위대 특수부대 출신이고 게이이고 노부인을 위한 충직한 해결사인 다마루를 조선인으로 그린다.

부모는 모두 부산 출신이다. 일제시대에 일본으로 건너가 사할린 항만 부두에서 일하다 소련군의 점령으로 포로가 된다. 다른 일본인들은 송환되었지만 조선인들은 일본 정부의 거부로 일본으로 돌아올 수 없다. 북으로 갈 수는 있었지만 부산이 고향인 그들은 북으로 갈 바에는 일본으로 돌아갈 생각을 한다.

사할린의 식량 사정은 최악이었고, 일본인 귀환자의 손에 맡겨 다마루를 먼저 일본으로 보낸다. 그것으로 다마루는 부모와 영영 헤어져 일본에서 고아로 자란다. 얼마나 상처투성이 삶을 살았는지 짐작이 가는 설정이다. 

작가는 소설 속에서 최대한 쓸데없는 장식을 걷어낸 소설 쓰기를 좋아했던 체호프의 소설 쓰기 원칙을 인용한다.  체호프는 말했다. “이야기 속에 권총이 나왔다면 그건 반드시 발사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1Q84는 이 원칙에 충실하지 않는다. 필연성이 부족하거나 군더더기가 너무 많다.

경찰 아유미의 등장과 사망은 전체 소설 전개와 필연적 관계가 없다. 아유미와 아오마메의 자유분방한 하룻밤 남자 헌팅을 묘사해서 소설적 재미를 높이기 위한 억지설정이 아닌가 하는 의문마저 든다. 아오마메를 1984년의 세계에서 1Q84년의 세계로 안내하는 택시기사도 의문의 인물이다. 뭔가 다 알고 있는 것 같은 사람인데 아오마메가 그 택시를 타는 필연적인 설명도 없다.

후카에리와 그를 키워 준 에비스노선생은 1권과 2권 중반까지는 상당히 비중 있는 역할이다. 하지만 그들의 역할은 갑자기 미미해 지다가 사라져 버린다. 에비스노선생이 후카에리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상황으로 만들면서 까지 파헤치려고 한 농촌 코뮨에서 종교집단으로 변신한 ‘선구’라는 공동체도 한껏 궁금증만 키우다가 거의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목소리의 정체나 역할이나 의미도 끝까지 알 수 없다. 리틀 피플과 그들이 만드는 공기 번데기의 정체도 물음표이다. 소설의 중심 주제인 노란색의 정상적인 달과 왜소한 초록색의  달인 두 개의 달에 대한 의문도 끝까지 남는다. 왜 두 개의 달이 보이는지 그것이 세상에 어떤 변화를 주는지 왜 몇 사람에게만 보이는지도 설명이 없다. 공기번데기를 통해 생겨나는 마더와 도터의 관계와 비슷한 것이라는 추측만 가능하다. 1984년과 1Q84년이라는 두 개의 세계가 왜 어떻게 겹쳐서 전개되는지,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두 개의 달 외에는 논리적인 설명이 너무 부족하다.

추리소설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 비밀과 독특한 상황을 설정하고 전개되는 소설에서 작가의 상상력 속에서만 알 수 있는 내용들을 끝까지 밝히지 않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전작인 ‘해변의 카프카’에서도 느꼈지만 상상력을 발휘하여 기발한 소설적 상황을 전개하며 인간의 본성인 호기심을 잔뜩 고조시키고 빠져들게 하지만 뒷심이 부족하여 이야기를 다 주어 담지 못하고 흐지부지 평범한 결말로 마무리 하는 게 아닌가하는 독한 생각도 든다.  

그래도 1,2권은 속도도 빠르고 상당한 소설적 재미를 가지고 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게 된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3권의 전개는 매우 지루하다. 아오마메는 집에 틀어박혀 이런 저런 생각이나 NHK수금원의 방문으로 페이지를 채우고 덴고는 아버지 병실을 지키면서 시간을 때운다. 앞에서 말한 숱한 의문들은 뒤로한 채 말이다.

3권에서 후시카와의 급부상은 비밀을 파헤치는 역할이라 그렇다 치더라도 그가 파헤치는 비밀이 대부분 독자들이 알고 있는 내용이라 싱겁다.

소설 전체로 볼 때 1Q84년이라는 특별한 세계를 설정한 필연성은 부족해 보인다.  아오마메가 동정녀 임신을 통해 덴고의 아이를 갖고 덴고를 만나게 하기 위해 1Q84년의 세계를 만든 것인가?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독자들에게 어떤 생각을 전하고 싶었을까? 덴고와 아오마메라는 상처 많은 인물들이 초등학교 때 가졌던 첫사랑을 끝까지 간직하다가 천신만고 끝에 해피엔딩 하는 청춘소설을 쓴 것 이라면 너무 생뚱맞다.

작가는 마지막 부분에서 1984년으로 되돌아 온 아오마메의 생각을 통해 세상은 그래도 살 만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위협과 위험이 숨어있고 수많은 수수께끼와 모순이 가득한 세계지만 기꺼이 받아들이고 하나뿐인 달을 가진 이 세계에서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한다.

너무 싱거운 결론 아닌가? 누구라도 평생 사랑한 사람과 극적으로 만나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면 그게 1Q84년이든 1984년이든 더 나쁜 세상이든 긍정적 희망을 갖게 되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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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대학 - 대한민국 청춘, 무엇을 할 것인가?
이인 지음 / 동녘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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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과  인생을 공부할 수 있는 1년 과정의 강좌를 개설한 기발하고 당찬 청춘이 있다. 대학에서 변변한 공부를 하지 못한 저자는 남들 다 알아주는 변변한 직장을 갖는 대신 발품을 팔고 책을 뒤지며 대학에서 못다한 변변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쌓이면 넘치는 것이 세상의 이치. 저자는 혼자 알기 아까운 세상의 지혜를 나누고자 인생의 스승을 찾아다니며 쌓인 내공을 한 권의 책으로 풀어 놓았다. 대학에서 당연히 공부해야 할 내용이지만 현실의 대학들이 놓치고 있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질문과 고수들의 답변을 대학 강좌 형식으로 엮은 것이다.  

철학하는 박남희선생님은 " 모든 사람이 고통스러워하고 어려워하고 힘들어하고 낙담하고 절망할 때도 철학하는사람은 절망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그 이유는 " 자기 안에 있는 삶의 충동성, 역동성을 끊임었이 맛보기 때문"이란다. 이게 왠 자신감? 하지만 지금 우울하고 낙담하고 있는 분들 밑져야 본전인 솔깃한 말 아닌가?    

이택광선생님은 말한다. " 문자적 계몽에서 실천적 계몽으로. 이 두가지가 통합되는 작업". 니체가 한 말인데 무슨 내용인지 궁금하지 않으신지? 이어지는 인문학의 위기와 인문학의 열풍이 동시에 나타나는 아이러니한 시대상황에 대한 해석. 

저자가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스승들이 문자적 계몽을 꾀하며 쓴 책들을 많이도 읽었다는 점도 기특하다. 인터뷰의 바탕이 튼튼하다는 뜻이다. 그 중에서도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나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꼭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고병권씨의 명랑사회 만들기나 김미화씨가 남편하고 라틴재즈밴드를 만들어 공연하고 다녔다는 내용도 흥미있었다.  

내가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팍팍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나라의 10대와 20대가 자기 인생에 대한 통속적이지 않은 진지한 계획을 세운다면 한번쯤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내용들이 가득하다. 물론 정답을 주지는 못하겠지만 말이다. 정답은 어차피 구체적인 자기 현실에 기반해서 스스로 찾아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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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하는 인간 호모 루두스 - 존 내시의 게임이론으로 살펴본 인간 본성의 비밀
톰 지그프리드 지음, 이정국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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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티플 마인드’ - 인간행동의 법칙 탐구


영화 [뷰티플 마인드]를 보셨는지? 독창적인 게임이론을 체계화시켜 노벨상까지 받았지만 평생 정신질환으로 시달렸던 천재 수학자 존 내시를 그린 영화이다. 동명의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해서 많은 찬사를 받았지만 정작 집합적인 인간 행동의 복잡성을 설명하려 했던 내시의 수학이 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서양 근대의 초기 수학적 원리를 통한 눈부신 자연과학의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과도한 믿음이 생겨났고 이 믿음은 인간의 행동과 상호작용을 지배하는 ‘법칙’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지고 수많은 철학자와 과학자, 혁명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계몽주의가 탄생하고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커다란 흐름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과도한 믿음은 동구의 몰락과 자본주의의 부침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듯이 역사적으로 많은 한계를 보여 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수많은 학자들은 이 책의 주제이기도 한 “(집단적인) 인간 행동을 이해하고 예측할 수 있을까?”하는 화두를 붙잡고 있다. 이 화두의 중심에 내시의 게임이론이 있다.

현대 게임이론은 1928년 발표된 폰 노이만의 논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노이만은 2인 제로섬(한 명이 이기면 다른 사람은 무조건 진다는 의미)게임의 경우 언제나 최적의 전략-게임 규칙이나 상대의 전략과 상관없이 가능한 한 자신의 승률을 최대로 높여주는 전략- 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수학적으로 계산된 최적의 전략은 대부분의 경우 혼합전략이다. 카드게임으로 치면 좋은 카드를 가졌을 때만 베팅을 하는 것은 순수전략인데 간단히 말해 혼합전략이란 가끔은 나쁜 카드를 들고도 뻥을 쳐야한다는 뜻이다. 노이만은 어느 정도의 비율로 순수전략을 선택하거나 뻥을 치는 것이 최적의 전략인지 수학적으로 계산해 냈다.

폰 노이만이 2인 제로섬게임에 대해 수학적인 분석을 했다면 내시는 경기자가 여러 명인 비제로섬게임에 대한 수학적 분석을 했다. 경기자들이 각자 따로따로 최대의 이익을 추구할 때 게임을 안정적으로 만드는 전략들의 집합, 즉 모두에게 최대의 이익이 보장되는 안정된 상태인 ‘내시균형’이 적어도 하나 이상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이 ‘내시균형’ 상태에서는 누구든 전략을 수정하면 손해를 보게 되어 있다.

어떤 사회문제든 적절히 대응하는 게임을 만든 다음 내시의 수학을 적용하면 사람들이 안정을 찾고 싶어 한다면 어떤 행동을 선택할지 대략 예측할 수 있다. 이렇게 고안된 게임은 유명한 ‘죄수의 딜레마 게임’부터 ‘공공재 게임’ ‘최후통첩 게임’등 수없이 많은데 책을 보면 대표적인 게임들의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물론 수학적으로 ‘내시균형’을 계산해 냈더라도 항상 현실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이란 때로 자신의 이익보다 공정함을 우선하기도 하고 분풀이로 손해를 감수하기도 한다. 또한 현실의 사회는 경기자도 많고 보상 규칙도 매우 복잡하므로 내시균형을 계산하는 것이 쉽지 않다.


1979년 캠브리지대학 하퍼교수는 청둥오리들에게 똑같은 크기의 빵조각을 두 곳에서 한 곳은 5초 간격으로 다른 곳은 10초 간격으로 던져 주었다. 이 상황은 빵조각이 보상인 일종의 게임이다. 여러분이라면 빵을 자주 던져주는 곳으로 갈까 아니면 경쟁이 심하니까 가끔 던져 주는 곳으로 갈까? 내시균형을 계산해보면 1/3은 10초에 한번 던져주는 곳, 2/3는 5초에 한번 던져주는 곳이 최적의 전략이다. 재밌게도 오리들은 1분도 걸리지 않아 정확히 게임이론의 예측에 따라 두 그룹으로 갈라졌다. 만약 빵조각의 크기를 다르게 하면? 당연히 횟수에 크기까지 넣어 내시균형을 계산할 수 있다. 오리들 역시 시간이 더 오래 걸리지만 이 균형에 도달한다. 게임이론과 생물학이 만났던 지점이고, 현재 게임이론은 진화의 많은 양상들을 설명해 주고 있다. 정글의 법칙을 따르는 이기적인 인간들이 어떻게 협조적인 행동문화와 문명을 만들어 냈을까? 언어는 어떻게 나타났을까? 하는 의문들을 게임이론이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인간이 자기 두뇌 속을 들여다보지 못했던 시기에는 관찰 가능한 외적인 행동을 주로 연구하는 행동주의심리학이 각광을 받았다. 하지만 MRI의 개발로 특정 행동을 할 때 두뇌 속 어떤 영역이 활성화되는지 볼 수 있게 되면서 다양한 실험들이 진행되었고 신경과학과 경제학이 통합되어 신경경제학까지 등장하였다.

예를 들면 연구자들은 최후통첩게임과 뇌스캔을 결합하였다. 이 게임은 당신이 100달러를 받고 그 중 일부를 제3자에게 나눠주고 나머지는 당신이 갖는 게임이다. 단 제 3자가 당신이 제안한 일부를 거절하면 100달러 전부를 받지 못하게 된다. 이론적으로는 제3자는 당신이 제안한 액수가 아무리 적더라도 무조건 받는 게 이익이다. 그런데 실제로 게임을 해보면 사람들은 작은 액수는 그냥 거절해 버린다. 사람들은 자기가 손해를 보더라도 당신의 욕심을 응징하려는 생각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상당히 후한 액수를 제 3자에게 제안하곤 한다.

이런 방식의 게임을 하면서 제 3자의 뇌를 스캔해 보면 적은 액수의 제안을 이 사람이 받아들일지 말지를 미리 예측할 수 있다. 거절하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뇌섬엽’과 ‘전측대상피질’ 영역의 강한 활동이 관측된다. 특정 행동에 대한 원인이 고유한 속성일 수 있고 인간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행동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응징자들은 개인적 만족감을 느끼는 것 같다. 인류는 응징자 개인에게는 손해일 수 있지만 사회의 이기주의자와 비협조자들을 응징함으로써 협조자들의 이익을 보장하여 결과적으로 사회 전체의 이익에 기여했을 것이다.

이런 방식의 연구를 통해 인간은 다 다르게 행동하고 사람에 따라 배신과 협력, 그리고 응징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리고 인류는 인생이라는 게임에서 협력자, 경쟁자, 응징자 등의 적절한 혼합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최후통첩게임을 다양한 문화권에서 시행해서 비교해보면 인간의 사회성은 문화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기적이거나 협조적이거나 하는 다양한 편차가 발견되었고, 대체적으로 시장 거래 활동이 활발할수록 전체적인 공정함을 지향하는 경향이 관찰되었다.

요약해 보면 유전자와 환경, 문화는 서로 뒤엉켜서 다양한 행동 패턴을 만들어 냈고, 자연과 인류는 이런 행동 패턴들의 혼합전략을 선택해 왔다.


게임연구자들은 내시균형같은 고전적인 게임이론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다양한 학문 분야들을 접목하여 이론의 구체성과 현실성을 확장해 오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게임이론에 통계역학, 통계 물리학, 네트워크 수학 등을 접목하여 인간의 집합적 행동의 전모를 밝히기 위한 과학으로 ‘사회물리학’ 또는 ‘경제 물리학’이 등장한 것이다.


양자역학적으로 보면 이 세상의 물리적 실체 자체가 게임이론의 혼합전략을 취하고 있다. 원자의 위치 자체가 원래 정해져 있지 않고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한다. 아원자 세계에서는 모든 실체가 불분명하고 다양한 가능성들이 사이좋게 공존하고 있다. 게임이론의 최적 전략이 고정된 순수전략이 아니라 여러 행동 원칙들이 특정 확률분포를 가지고 혼합된 집합인 것처럼 양자물리학에서도 입자의 위치는 특정 확률분포로 존재한다. 저자는 인간의 행동, 사회의 변화 뿐 아니라 생명의 기원, 물질의 기원 나아가 우주 전체에 대한 통합적인 설명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게임이론에 있다고 생각한다.

한 권으로 읽는 게임이론의 모든 것, 한번 쯤 읽어 볼 만하다는 생각은 없으신지? 내시균형 계산법도 부록으로 달려있다.


호모루두스-게임하는 인간-, 톰 지그프리드, 자음과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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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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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문학 책으로는 드물게 4주 연속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한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이다.
저자는 정의로운 사회가 무엇인지 규정하는 것부터 논의를 끌어간다. 사회가 정의로운지 묻는 것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 이를테면 소득과 부, 의무와 권리, 권력과 기회, 공직과 영광 등을 어떻게 분배 하는지 묻는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는 각 개인에게 합당한 몫을 나누어 준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어떤 분배 원칙을 만들어야 하는가? 저자는 이 간단하지 않은 화두를 끝까지 붙잡고 다양한 사례와 아리스토텔레스부터 벤담과 칸트와 롤스 등의 이론들을 설명하며 계속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재화 분배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 행복, 자유, 미덕이 그것이다. 그런데 행복을 극대화하고 자유를 존중하고 미덕을 기르는 행위의 의미와 규정이 사람들 사이에 서로 충돌한다. 이 책은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에 대한 장단점을 살펴보고 우리가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할 것인지 집요하게 추궁해 나간다.

먼저 제레미 벤담의 공리주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도덕의 최고 원칙은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 옳은 행위는 공리(유용성)를 극대화하는 행위이다. 우리는 모두 쾌락을 좋아하고 고통을 싫어한다. 어떤 정책을 통해 얻는 이익을 다 더하고 거기에서 총비용을 빼서 이익이 많으면 많을수록 공리적인 정책인 것이다. 이 사상은 현재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국민 주권시대에 가능한 많은 국민들의 이익에 기여하는 정책의 선택을 누가 쉽게 부정할 수 있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공리주의에 대한 반박은 만족의 총합에만 관심을 두고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쉽지 않은 논쟁거리이다. 체니 전 미국부통령은 소수의 알카에다 테러리스트들에게 강력한 고문기술을 사용한다면 엄청난 인명 피해와 고통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 국민 중에는 이런 공리주의에 동의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테러리스트의 입을 열기 위해 죄 없는 그의 가족을 고문해도 되는가라는 질문에는 쉽게 답하지 못할 것이다.). 한편 극심한 고통 속에 나오는 자백은 믿을 것이 못 되고, 우리가 고문에 의존하면 우리 군인이 포로로 잡혔을 때 더 혹독한 대우를 각오해야 한다는 실용적인(공리적인) 이유로 고문을 반대하는 공리주의자도 있다. 어쨌든 공리주의자들은 고문 행위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물론 이런 공리주의와 다르게 고문이 인권을 침해하고 인간의 타고난 존엄성을 파괴하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공리주의에 대한 또 다른 반박은 중요한 도덕적 문제를 쾌락과 고통이라는 하나의 저울로 측정할 수 있는가하는 점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두 번째 문제에 대해 계산적인 원칙보다는 좀 더 인간적인 원칙을 통해 공리주의를 다듬어 살리려 했던 사람이다. 그는 공리를 극대화하되 매 순간이 아니라 장기적인 관점에서 해야 하고 오랫동안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다보면 인간의 행복이 극대화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밀은 벤담과 달리 욕구의 양이나 강도만이 아니라 고급 쾌락과 저급 쾌락의 구별처럼 질을 평가하려 한 것이다.

자유지상주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소유하는가? 내 몸은 나의 것인가? 대부분의 국가가 장기 이식을 목적으로 하는 장기 매매를 금지하고 있다. 미국에서도 해마다 수천 명이 신장 이식을 기다리다 죽어가고 있다. 시장에서 매매가 된다면 신장 공급이 늘어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이유로 신장 매매 허용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 몸은 내 것이라는 전형적인 자유지상주의 이념에 근거하고 있는 이들은 목숨을 구하는 도덕성, 신장은 하나만 있어도 살 수 있다는 점을 강조 한다. 하지만 2001년 독일에서 일어난 성인들의 합의로 이루어진 식인 행위처럼 자기소유권이라는 자유지상주의 원칙은 무한정 허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정의를 둘러싼 공방에서 자주 거론되는 시장의 역할에 대해 다양하게 질문한다. 자유시장이 공정한가? 돈으로 살 수 없는, 사서는 안 되는 재화도 있는가? 왜 문제가 되는가?
현재는 유급 자원군제이지만 미국에는 역사적으로 세 가지 병역 방법이 있다. 남북전쟁 때의 병역제도인 유급 대리인을 허용하는 징병제와 (유급)자원군제 그리고 (강제)징병제 이다. 공리주의나 자유지상주의 논리로 보면 노동시장에서 자유롭게 고용하는 자원군이 최고의 선택이고 강제 수단을 동원하는 징병제는 최악의 선택이다. 하지만 사회의 제반 여건이 상당 부분 평등하지 않다면 징병제는 법이, 자원군은 경제적 어려움이 강제하는 즉 강제의 형태만 다른 제도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오늘날 자원군 구성 계층을 보면 저소득층에서 중간 소득층 지역 출신 젊은이의 비율이 현격히 높다. 프린스턴 대학을 보면 1956년에는 졸업생의 과반 이상이 군에 입대했지만 2006년에는 1%도 되지 않는다. 의회 의원 가운데 자녀가 군에 가는 경우는 2%도 안 된다. 자기 자식을 전쟁터로 보내지 않는 사람들이 전쟁을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우리 군을 미국식 자원군제로 바꾸자는 주장도 있는데 참고해야 할 대목이다.)
시장을 통해 고용하는 자원군제에 대해 다른 반박도 있다. 모든 시민은 나라에 봉사할 의무가 있다. 군 복무는 여러 직업 중 하나가 아니라 시민의 의무이다. 의무를 시장에 내놓고 거래하는 것은 잘못이다. 실제로 배심원은 시장제도에 맡기고 있지 않다.

다음은 대리모 거래에 대한 논란이다. 대리 출산 계약은 강제할 효력이 있는가? 대리모가 친권을 주장한다면? 자발적 합의라면 문제가 있는 합의라도 인정해야 하는가? 자궁대리모와 난자까지 제공하는 대리모의 차이는 있는가? 인도 같은 외국에서 하고 있는 체외수정 대리임신은? 현재 유럽의 많은 국가는 상업적 대리 출산을 금지한다. 미국은 10여 개 주가 합법화했고, 10여 개 주가 금지했으며, 다른 주들은 애매하다.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떤가?

칸트는 사람은 누구나 존중받을 가치가 있고, 그 이유는 이성적이고 자율적이고 선택할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칸트에 따르면 자유롭게 행동한다는 것은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것이고, 천성이나 사회적 관습이 아니라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자유로운 행동은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를 선택하는 것이다. 공리주의처럼 개인을 전체의 행복을 위한 도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목적으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어떤 행동의 도덕적 가치 역시 그 결과가 아니라 동기에 있다. 물론 책에는 칸트의 주장에 대한 한계와 여러 가지 의문에 대해서도 잘 정리하고 있다. 더해서 칸트는 왜 자유 성관계를 반대할까? 칸트라면 빌 클린턴을 옹호했을까?(놀랍게도 내용을 보면 이런 종류의 거짓말에 대해 칸트는 긍정적이다.) 흥미 있는 내용이다.

존 롤스의 정의론. 롤스는 정의를 고민하는 방법은 원초적으로 평등한 상황에서 어떤 원칙에 동의하는지 묻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원칙을 정하려고 모인 사람들이 “무지의 장막” 뒤에서, 즉 계층, 성별, 인종, 정치관, 종교관 등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가정하고, 말 그대로 평등한 위치에서 원칙을 합의한다면 공정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렇게 추론하여 롤스는 정의의 원칙 두 가지를 정립한다. 하나는 언론이나 종교의 자유 같은 기본적 자유에 대한 원칙이고 두 번째는 사회, 경제적 평등에 관한 것으로 소득과 부를 똑같이 분배하지는 않더라도 그 이익이 사회 구성원 가운데 가장 어려운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원칙이다.
시민들은 기본 자유를 평등하게 보장받고, 소득과 부의 분배는 자유 시장에서 결정되는 방식의 기회 균등을 공식 인정하는 자유지상주의 정의론이 있다(우리나라는 아직 이 수준에도 미달이지만...). 다음은 부모의 부나 교육 환경 등이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자유 시장 체제의 불공정을 다양한 제도를 통해 바로잡는 모든 사람이 계층이나 가정환경에 상관없이 동일한 출발선에 서서 경쟁할 수 있는 능력위주 사회가 있다. 롤스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간다. 능력 위주 사회가 사회적 우연을 제거한다 해도 타고난 능력과 재능이라는 개인적 우연이 불공정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롤스의 ‘차등원칙’은 재능을 개발하고 이용하게 하되 그 대가는 공동체 전체에게 돌아가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노력에 대한 평가 등 롤스의 주장에 대한 학자들의 다양한 논의를 따라가 보는 재미도 그럴 듯하다.

대학 입학 등에서 소수집단 우대정책은 정의로운가? 권리 침해는 없는가? 인종 통합 공동체를 목표로 한 뉴욕의 ‘스타렛 시티’ 아파트의 백인 우대정책은 타당한가? 기부금을 통한 기여 입학제는 정의로운가? 더 나가서 아예 일정 비율을 경매로 입학자를 뽑는다면?

“정치의 목적은 경제적 풍요나 다수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좋은 시민을 양성하고 시민의 미덕을 키우고 좋은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최고 공직과 영광은 시민의 미덕이 가장 뛰어나고 공동선을 가장 잘 파악하는 사람에게 돌아가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인데 동의가 되시는지? 아리스토텔레스는 목적론적 사고와 본성에 대한 적합성을 중요시 했다. 정의든 국가든 권리든 텔로스(목표, 본질)를 먼저 이해하고 거기에 가장 적합한 행위가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의와 권리에 대한 논쟁은 결국 사회 제도나 조직의 목적, 분배 원칙, 명예나 포상을 주는 근거 등에 대한 논란으로 갈 수 밖에 없다. 국가나 법이 이런 문제에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하기도 하지만, 좋은 삶의 본질을 거론하지 않고는 공정성이나 정의의 문제를 제대로 논의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독일은 여러 차례 다양한 방법으로 2차 대전의 여러 범죄적 행위에 대해 사죄했다. 미국은 노예제에 대해, 2차 대전 당시 일본계 미국인을 감금한 것에 대해 공식 사죄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역시 원주민에 대해 공식 사죄했다. 일본은 사죄하는데 인색한 국가이다.
조상의 죄에 대해 후손이 사죄해야 하는가? 배상을 한다면 아무 책임도 없는 현재 시민들의 돈을 사용해야 하는데 정당한가? 도덕적 개인주의 차원의 문제제기이다. 이들에게 자유란 내가 자발적으로 초래한 의무만을 책임지는 것이다. 이런 합의와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개념은 근현대 정의론에 자주 등장하는 개념이다. 존 로크나 칸트, 롤스의 정의론은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정부나 법 역시 강압적인 수단을 동원할 가능성을 경계해서 특정한 도덕적, 종교적 이상을 권장해서는 안 되고 중립을 지켜야 한다. 따라서 칸트나 롤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을 거부한다. 시민 스스로가 정의와 목적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집단적 책임의식이나 공동체 의식은 어떻게 가능할까? 공동체가 주는 부담이 억압적일 수 있다는 비판을 극복하고, 공동체의 도덕적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는 이 문제에 대해 설득력 있는 답을 제시한다. 그는 인간을 자발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로 보는 시각 대신 서사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인간은 이야기하는 존재이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답하려면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를 먼저 답해야 한다. 나는 가족, 친족, 부족, 나라에 둘러싸인 사람이고 사회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과거의 빚과 유산, 적절한 기대와 의무도 물려받는다. 현대의 개인주의와는 분명히 차이가 나지만 사회계약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제3의 의무인 연대 의무 또는 공동체 의무를 설명해 줄 수 있는 해석이다.

이어지는 질문들. 애국심은 미덕인가? 국산 애용운동은 정당한가? 연대는 우리 사람만 챙기는 편애인가? 마지막 질문에만 답한다면 역사적 범죄에 대한 사죄나 배상, 미국인의 베트남전쟁 반대운동도 애국심과 연대의식에 기초해서 나온 행동이라는 점이다.

정치에서 종교의 역할에 대해 존 F. 케네디와 버락 오바마는 양극단의 견해를 보인다. 케네디가 카톨릭 신자라 다수인 개신교 신자를 안심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것이지만 정부는 도덕적 종교적 문제에서 중립을 지켜 무엇이 좋은 삶인지는 개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해야 한다는 당시 철학의 반영이기도 하다. 반면 오바마는 자유주의적 중립을 거부하고 진보주의자들은 더 큰 아량을 베풀고 신앙 친화적인 공적 이성을 끌어안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본질적인 도덕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정의와 권리의 문제를 결정할 수 없다고 보고 오바마의 견해를 지지한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 중에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는 공동선을 추구하는 새로운 정치의 모습으로 1. 시민의식, 희생, 봉사의 확대 2.시장의 도덕적 한계 극복 3. 불평등의 개선과 연대 의식의 강화 4. 도덕이나 바람직한 삶에 개입하는 정치를 예로 제시하고 있다.

소개하고 싶은 사례들이 더 많은데도 글 길이가 늘어나 참았다. 흥미 있는 생생한 사례들을 직접 확인해 보길 바란다. 꼭 끝까지 읽기를 권한다. 처음에 다소 산만해 보이는 주제들이 후반부에 가서야 정리가 되고, 더욱이 저자의 결론은 거의 마지막 부분에 나온다. 더 잘 번역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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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 김열규 교수의 지식 탐닉기
김열규 지음 / 비아북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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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에 관한 책을 또 봤네요.다시는읽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제목인데... 고미숙의 호모쿵푸스를 읽고 그래도 조금 인정할만하다고 생각했다가 장회익의 공부도둑을 보면서 이런 자화자찬을 볼 바에는 다른 책 한권을 읽는 게 낫겠다고 굳게 결심했건만 흑흑흑... 

공부를 알라딘에서 검색해보니 상당히 다양하고 많은 책들이 있더군요. 유행의 반영이겠죠. 각설하고 이 책은 중딩, 고딩이 독서와 논술을 목표로 하고 읽는다면 나름 의미가 있겠어요. 그래도 읽으면서 상당히 가슴을 울리는 수준높은 글솜씨를 보여주는 미덕은 있더군요. 열공 하는 분들에게 은총이 함께 하길 기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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