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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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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을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다. 5.18이 민주화운동으로 복권되고 국가적 기념일로 지정되고 희생자들이 국가유공자로 존중되고 학살 책임자들이 법정에 서면서 이제 5.18의 한은 어느 정도 풀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으며 내가 아는 5.18은 빙산의 일각이었고, 우리가 풀어야 숙제가  아직 많이 남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역사의 진실이든, 개인의 진실이든 아픈 과거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사건 모두가 사실이라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피하고 싶은 아픔이 아니라 더 다가서고, 더 느끼고 싶은 종류의 아픔이었다. 개인이든 사회든 이런 아픔과 고통을 딛지 않고는 극복이나 발전은 없을 것임은 분명하다.

 

소설을 읽으며 위로받고 치유 받아야 할 분들이 거꾸로 투쟁의 선봉에 서도록 밀려가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이 자꾸 겹쳐졌다. 철저한 진상 규명이라는 최소한의 요구가 이렇게 힘들다는 것은 5.18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의 하나일 것이다. 5.18을 직간접적으로 겪은 분들의 처절한 아픔과 고통이 세월호 유가족에게는 반복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15살, 중학교 3학년, 밤톨같이 깎은 머리의 ‘소년’ 동호의 이야기다. 동호보다 먼저 총에 맞아 죽은 친구 정대와 실종된 누이 정미의 이야기다. 동호와 함께 시신을 수습했던 수피아여고 3학년 은숙과 노동자 선주의 이야기다. 동호를 살리려 애썼고 끝까지 도청에 남았던 대학신입생 진수의 이야기다. 동호의 어머니와 장미넝쿨이 우거진 중흥동 집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야기를 읽어나가면서 이들이 특별히 “용감하지도 강하지도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에 놀란다. 우리와 우리 아이, 친구, 부모들의 친숙한 이미지가 상상할 수 없이 참혹한 이야기와 겹치면서 공포심과 공감이 함께 느껴졌다. 평생을 끔찍했던 고문의 기억과 상처 속에 죽은 사람처럼 살아온 선주가, 같은 상황이 닥쳐온다면 다시 비슷한 선택을 하게 될지 모른다고 독백하는 장면은 처연하고 의미심장하다.

 

아마도 작가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이런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것 같다.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어떤 군중은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 군중은 개인이라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는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 보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다.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다.”

   
▲M16자동소총을 휴대한 공수부대는 도망치다 쓰러진 시민마저 뒤쫓아가서 곤봉으로 내려치고 군화발로 짓밟았다. (출처 : 5.18기록관 홈페이지)

   
▲망월묘역 관앞에서 오열하는 어머니 (출처 : 5.18기록관 홈페이지)

 

이야기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집중하면서도 5.18의 열흘 동안과 진압 이후의 인고의 시간들을 복원해낸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고통이 이렇게 극심했을 줄은 미처 몰랐다. 극한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모습과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몸서리치는 잔인성을 통해 작가는 인간 보편성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으로까지 나아간다.

 

5.18은 반복되고 있다. 베트남전에서의 잔인함을 포상 받은 군인들은 광주에서 동족을 상대로 같은 짓을 반복했다. 제주도에서, 관동과 난징에서, 보스니아에서, 모든 신대륙에서 인간은 동일한 잔인성을 반복해왔다. 2009년 용산을 보며 작가는 “저건 광주잖아”라고 중얼거린다. 광주는 고립된 것,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정말 잘 쓴 작품이지만 단순히 ‘잘 쓴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소설 쓰는 기예를 논하기에는 내용이 갖는 무게감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평론가 신형철은 ‘한강을 뛰어넘은 한강의 소설’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 작품을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사실에 기초한 ‘소설을 뛰어넘은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5.18이 없었다면 87년 6월이 그렇게 빨리 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87년 이후에 그나마 누리고 있는 성취는 상당 부분 5.18에 빚지고 있는 셈이다. 최근의 상황을 보면 우리 사회는 5.18과 6월항쟁의 피와 땀의 열매를 다 빨아먹고 소진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정치적 경제적 양극화가 더 심해지는 등 상황이 자꾸 더 나빠지고 있다. 5.18이 마무리되어 일단락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작가의 눈으로 보면 세월호도 또 하나의 광주다.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이다. 5.18이 6월항쟁을 낳았고 우리 사회를 한 단계 도약시켰다면, 세월호 참사는 제2의 6월항쟁을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 억울한 죽음과 남아있는 유족들이 조금이라도 위안을 받을 수 있도록 87년 6월 보다 더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이것은 우리 모두의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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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향기 - 머무름의 기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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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위기를 맞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빨리빨리”를 입에 달고 사는 것으로 유명하다. 늘 바쁘고 시간이 없다. 잠은 부족하고 달콤한 잠을 자기도 어렵다. 시간은 쏜 살 같이 날아가 사라져 버린다. 그 시간동안 무엇을 했고 지금 무엇이 남아 있는지 생각하면 불안하고 허망하다. 한번 뿐인 내 인생의 시간이 이렇듯 덧없이 흘러가버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2012년을 강타한 ‘피로사회’(건치신문 북카페에 2012년 5월에 소개)의 저자 한병철이 ‘시간의 향기’를 가지고 다시 왔다. ‘피로사회’와 내용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책이다. ‘피로사회’가 규율사회와 성과사회라는 개념을 통해 근대 이후의 노동의 성격과 삶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다루고 있다면 ‘시간의 향기’는 이것과 시간과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다루고 있다.

 

저자는 오늘날의 피로사회가 시간을 인질로 잡고 있다고 말한다. 시간을 일에 묶어두고, 일의 시간으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휴식도 재충전의 시간이고 결국 일의 한 양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휴일이나 휴가가 유급 휴일과 유급 휴가가 된 것은 이런 현실을 잘 드러내주는 사례일 것이다. 저자는 심지어 잠잘 때도 일의 시간을 데리고 간다고 한다. 우리의 잠자리가 편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일의 시간에는 향기가 없다. 저자는 일의 시간이 아닌 새로운 시간을 생성하는 시간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시간에 향기를 되돌려주는 시간 혁명이.

 

저자는 근대 이전의 신(화)적 세계나 근대의 세계는 이야기가 있는 시대라고 규정한다. 신학적 세계관은 신과 구원의 세계관을 통해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야기를 만들었고, 근대는 자유와 행복이라는 현세의 희망을 목적으로 하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었다. 이야기의 시간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후기 근대, 포스트모던의 시대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사라져버렸다. 신, 이념, 인류의 목표 같은 모두를 포괄하는 공통의 지향점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말한다 “목적과 의미를 잃은 인간은 세계나 사물도 덧없게 느끼고 스스로에 대해서도 극단적으로 무상해진다. 인간은 급격하게 공간과 시간을, 세계를, 공동의 삶을 상실해 간다. 남는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 그래서 인간은 그 작은 육체라도 건강하게 지키려고 악착같이 애쓰게 된다. 그것밖에는 가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육체의 건강이 세계와 신을 대신한다. 죽음을 넘어 지속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오늘의 인간은 그토록 죽기 힘들어하는 것이다. 인간은 나이만 먹을 뿐 늙지는 않는다.”(16쪽)

 

그렇다고 이야기의 시간이 사라진 것을 애석해 할 이유는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야기의 종언, 역사의 종언은 신학과 목적론이 없는, 자기만의 고유한 향기가 있는 삶의 시간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가능성이 실현되려면 사색적 삶을 되살려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저자는 사색적 삶을 복원하기 위해 사색과 노동에 대한 사유들을 돌아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삶을 두 영역으로 나누었다. 한가로움이 아닌 영역(아스콜리아, 노동의 영역)과 한가로움(스콜레)의 영역, 쉼 없음과 쉼으로 삶을 구분한 것이다. 노동은 꼭 해결되어야 할 삶의 욕구에 묶여 있지만 한가로움은 강요도 걱정도 없는 자유의 공간을 열어준다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실존의 본질은 노동이 아니라 한가로움이라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유로운 인간이 사는 삶의 양식(비오이)을 세 가지로 구별했다. 쾌락(헤도네)을 추구하는 삶, 폴리스에서 아름답고 고귀한 업적을 이룩하는 삶(비오스 폴리티쿠스, 영예와 미덕을 추구했다.), 진리의 사색적 고찰에 헌신하는 삶(비오스 테오레티코스) 이다. 이 세 가지의 삶은 모두 삶의 불가피한 필요와 강제인 노동에서 자유롭다. 이 중에 최고의 행복은 진리에 대한 사색적 헌신이라고 했다.(139쪽)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 등 중세까지는 사색적 삶이 활동적 삶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이어졌다. 중세 후기의 토마스 무어는 ‘유토피아’에서 “누구나 하루에 6시간씩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한가로움과 사색에 몰두한다.”고 이상향을 그리고 있다.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노동에 삶의 필요성을 넘어서는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한다. 루터는 직업으로서의 일을 신의 부름과 연결시켰고, 캘빈은 노동에 구원의 의미를 부여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현세적 금욕주의는 일과 구원을 결합했다. 일은 신의 영광을 증대시키는 삶의 목표가 되고 ‘한가로움’ 같은 시간 낭비는 무거운 죄악이 된다.

 

근면이라는 의미도 갖고 있는 산업화는 기계화만이 아니라 근면한 인간으로의 훈육의 과정이기도 했다. 저자는 여가사회, 소비사회라는 것도 노동사회의 이면일 뿐이라고 한다. 점점 증가하는 생산성은 점점 더 많은 여가시간을 만들어내지만 여가시간은 더 고차적인 활동이나 한가로움이 아닌 일에서의 회복이나 소비에 사용될 뿐이다.

 

저자는 이렇게 모든 사색적 요소가 추방되어버린 삶은 치명적인 과잉활동으로 귀결되어 자기 자신의 행위 속에서 질식할 것이라고 한다. 사색적 삶을 되살려야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열린다는 것이다. “행동 없는 사색적 삶은 공허하고 사색 없는 행동적 삶은 맹목이다.” 저자는 ‘노동의 민주화’와 ‘한가로움의 민주화’의 결합이라는 청사진을 제시한다.(182쪽)

 

저자가 강조하는 한가로움과 사색적 삶, 자기만의 고유한 향기가 있는 삶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저자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많이 인용하는데 그 중에 마르셀이 보리수 꽃잎차에 담근 마들렌의 향과 맛을 보며 완전히 독자적인 전대미문의 행복감을 느끼는 장면을 향기로운 시간의 최고의 예로 든다. 또한 “섬세한 것, 금세 사라져버리는 것, 보잘것없는 것, 사소한 것, 떠도는 것, 뒤로 물러서는 것 등, 폭력적인 손길에서 빠져나가는 모든 것.”(126쪽)을 인용하기도 한다.

 

저자는 (시간의) 향기가 지배하는 사회는 추억과 기억을 자양분으로 하는 사회, 느린 것과 긴 것을 먹고사는 사회일 것이라고 한다. 그는 조급성의 시대인 영화적 사회, 즉 시각의 영향이 두드러진 시대와 대비시키기도 한다. 즉각적인 향락이나 욕망에서 벗어나 정신이 자기 안에 편안히 머물러 있을 때 좋은 시간이 생겨난다고도 한다.

 

이런 삶의 구체적인 모습을 어떻게 전달할까 생각하다 우연히 발견한 책이 ‘우연한 산보’(쿠스미 마사유키 원작, 타니구치 지로 작화)라는 만화이다. 이 만화는 작가가 사전 조사하지 않고, 옆길로 새고, 계획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며 무조건 걷고 본 경험을 그린 만화다. 주인공은 ‘목적 같은 거 없이 자기 마음대로 느긋하게 걷는데서 오는 기쁨’을 말한다. 같은 작가들의 ‘고독한 미식가’라는 음식 만화도 있다.

 

사색은 언어로 하는 것이고 언어는 생각뿐 아니라 대화의 도구이기도 하다. 저자는 “자유롭다는 것은 본래 어원상으로 ‘친구나 연인에 속해있는’이라는 뜻이며 인간은 사랑과 우정의 관계 속에서 자유를 느낀다.”(62쪽)고 말하고 있다. 나의 사색과 너의 사색이 만나고 나의 이야기와 너의 이야기가 섞여 우리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도 향기 있는 시간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후각과 미각을 자극하는 음식과 함께라면 금상첨화겠다.

 

자기만의 고유한 향기는 결국 자기만의 방식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한가로운 시간을 만들고 자기 자신과 인생과 세상에 대한 깊은 사색을 즐기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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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 유전자는 왜 살아남았을까?
강신익 지음 / 페이퍼로드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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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의학자 강신익이 들려주는 ‘인간의 삶’ 이야기 

 

불량유전자는 왜 살아남았을까?, 강신익, 페이퍼로드

2013년 04월 17일 (수) 전민용 gca027@hanmail.net

 

인간과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과학적 인문학적 답변이다. 어떤 주제를  파악한다는 것은 그 주제에 대한 역사적 계보를 세우고 최근의 연구 경향과 결과를 섭렵하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관점과 해석을 제시하는 것일 것이다. 이 책은 과거와 현재의 축적된 지식들 중에 핵심들만을 잘 간추렸고 저자의 관점과 해석 역시 미래지향적으로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생로병사의 경험적 현상을 과학적 방법으로 설명하고, 그것을 인문학의 가치와 규범을 통해 이해하려는 것이 인문의학이라고 정의한다. 이 책은 인문의학의 교과서 같은 책이다. 크게 ‘태어남과 늙어감’, ‘질병과 고통’, ‘뇌와 마음’, ‘유전과 진화’, ‘몸과 사회’라는 다섯 범주로 분류되어 있다.

 

태어남과 늙어감 

 

   
 
동물에 비해 사람의 분만은 시간도 많이 걸리고 위험 요소도 많다. 진화생물학에서는 인간이 두 발로 걷게 되면서 신체의 균형을 위해 골반이 작아지는 방향으로 진화했기 때문으로 본다. 지능이 발달하면서 뇌가 커져서 체구에 비해 큰 아기의 머리도 문제다. 분만의 고통과 위험은 인간이 똑똑해진 대가인 것이다. 원시인부터 문명 이후까지 분만 과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840년대는 아직 세균을 발견하지 못한 시기였다. 빈종합병원에는 두 개의 산부인과병동이 있었다. 의사가 관리하는 1병동에서는 평균 29%, 산파가 관리하는 2병동에서는 3%의 산모가 산욕열로 죽었다. 제멜바이스라는 의사가 책임자로 부임해서 의사들이 죽은 산모들의 시신을 부검하는 것에 원인이 있다고 보고 분만 전에 손과 기구를 염소 용액으로 씻게 했다. 사망률은 급격히 떨어졌다. 제멜바이스가 과학적으로 입증하지는 못했지만 일상적 삶의 지혜를 잘 활용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우리나라는 제왕절개가 차지하는 비율이 세계 최고 수준인 40%에 이른다. 이런 추세라면 분만의 규범이 바뀌어 자연분만이 사라질 지도 모른다. 이미 애완견 중에는 스스로 새끼를 낳지 못해 일일이 제왕절개를 해줘야하는 종들도 많다. 인공 환경에 적응한 결과다. 

 

지금도 정력 강장제로 쓰이는 해구신은 수컷물개의 생식기다. 40-50 마리의 암컷을 거느리고 2-3개월의 번식 기간에 하루에 20-30회씩 통산 600-1800번의 교미를 하기 때문일 것이다. 19세기 프랑스 생리학자 브라운 세카르는 어린 개와 기니피그의 고환을 으깬 액체를 주사했다. 빈의 생리학자  슈타이나크는 남자의 정관을 묶어 남성호르몬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면 젊음의 활력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20세기에도 프랑스 의사 보로노프는 원숭이 고환을 500명이 넘는 남성에게 이식했다. 이 시술은 나중에 폐기되었지만 지금도 ‘원숭이 고환 Monkey gland’이라는 이름의 칵테일을 파는 술집이 많다고 한다.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의 욕망은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방향으로 진화했다. 식욕과 성욕도 그렇게 진화한 욕망이다. 인간의 성욕이 동물들과 달리 시기의 생리적 제한이 없다는 것은 생물학적 법칙보다 문화적 영향에 따른 현상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따라서 그 욕망을 억누르는 문화적 압력 또한 정당하다. 욕망은 무조건 따라야 하는 지침도, 억눌러야 할 괴물도 아니다. 생물학적이고 문화적인 자아를 통해 적절히 관리해야 할 대상이다.

 

현재 300개 이상의 노화 관련 이론이 있다고 한다. 가장 유명한 것이 텔로미어다. 염색체 끝에 붙은 DNA의 사슬인데 분열할 때마다 짧아진다. 정상적인 체세포가 50-60번 분열하면 더는 새로운 세포를 만들지 않는 이유다. 노화와 관련해서 돌연변이, 활성 산소, 식사량 등 여러 연구들이 있다. 오래 살고 젊어지기를 원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고 욕망이다. 자본은 이런 욕망에 기생해서 거대한 노화 방지 시장을 형성한다.

 

어떻게 늙는지 뿐 아니라 왜 늙는지도 생각해야 한다. 노화생물학자 스티븐 오스태드는 노화를 생존 환경과 번식의 시기와 관련해 자연선택이 진화시킨 적응 현상으로 설명한다. 중년 이후에 발병하는 치명적인 헌팅턴병은 이미 유전자를 후손에게 전해 준 뒤에 발병하므로 자연선택으로 제거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노화도 중년 이후에 발현되는 유전자라는 가설이다. 

 

두 번째 가설은 성장-번식-보전이라는 생물학적 과업 사이의 자원 경쟁의 결과로 본다. 포식자가 없는 섬의 주머니쥐는 잡아먹힐 걱정이 없으니 번식을 서두르지 않고 절약한 자원을 성장과 생명 유지에 쓰니 노화가 지연된다는 것이다. 거세된 환자들이 평균 14년이나 더 오래 살았다는 1960년대 연구도 있다. 

 

삶은 주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살아가는 것이다. 늙어감을 즐기고 늙어가는 자신을 좋아할 수 있는 사람만이 정말로 행복한 사람 아닐까? 

 

질병과 고통

 

오감 중 과거의 기억을 불러내는 데 가장 효과적인 것이 후각이라 한다. 진화의 역사에서 생존과 번식에 가장 중요한 감각이었다. 배설물과 부패한 냄새를 피하고 잘 요리된 음식과 매력적인 이성에게서 나는 냄새에 끌리는 것은 본능에 가깝다. 인간 등 많은 동물에게 있는 페로몬도 성적 파트너에게 정보를 전달한다. 인간이 더러운 하수를 정화하고 상처를 소독한 것도 냄새라는 본능이 작동했을 것이다.

 

제멜바이스의 무기가 손을 씻는 것이었다면 나이팅게일의 무기는 청소, 빨래, 환기 그리고 따뜻한 위로였다. 1848년 독일에 발진티푸스가 유행하자 현장에 파견된 의사 루돌프 피르코는 연구 끝에 전염병 문제에 대한 처방으로 사회의 민주화를  제시한다. 제멜바이스는 감염의 자연적 원인에 주목했고(자연의학), 나이팅게일은 환자가 병을 이기도록 도왔고(인문의학), 피르코는 사회 구조를 바꾸려고(사회의학) 했다. 이 세 가지는 현재까지도 의학의 귀중한 가치이며 목표다.           

 

파스퇴르와 코흐 등에 의해 세균 이론이 공식화되면서 많은 의학적 발전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작은 부위에 생긴 국소적 감염이 퍼져 심각한 질병을 일으킨다는 ‘국소감염설’ 같은 엉터리 이론도 등장했다. 당시에 충치는 흔한 질병이었고 치과의사들은 썩은 부위나 결손 부위를 금으로 메우거나 인공치아로 대치해주는 치료를 했다.

영국의 내과의사들은 잘 못 만들어진 보철물이 국소 감염의 온상이며 이것이 정신질환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큰 병들을 일으킨다고 주장했다. 이후 조금이라도 문제 있는 치아는 모두 뽑아내는 발치의 열풍이 불었다.

 

이 이론의 극단적인 사례는 뉴저지 주립 정신병원의 헨리 코튼이었다. 그는 정신질환자의 썩은 치아와 보철물을 제거했다. 그래도 호전이 안 되면 국소감염이 의심되는 편도, 고환, 난소, 담낭, 위, 췌장, 자궁 경부, 대장 등의 장기를 차례로 들어내는 수술을 감행했다. 끔찍한 진실이 밝혀진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최근에는 세균을 적으로 여겨 물리치려고만 하지 말고 친구로 여겨 함께 살자는 견해들이 대두하고 있다. 미국 미생물학회는 “미생물을 구해서 세상을 구하자!”는 캠패인을 펼치고 있다. 과학은 자연을 정복하는 무기가 아니라 자연을 제대로 알아가는 앎의 도구라는 자각이 자라고 있는 것이다.

 

세균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나는 세균이다. 나는 같은 유전자를 가진 후손을 많이 퍼뜨리는 방향으로 행동한다. 의료인들이 손을 씻지 않아 쉽게 나를 감염시킨다면 그 사람이 심하게 앓거나 죽어도 나는 손해가 없다. 곧 다른 사람에게 감염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의료인들이 손을 자주 씻어 감염의 기회가 줄어들면 나는 지금 있는 곳에서 오랫동안 살아가는 길을 모색할 수  밖에 없다. 즉 독성이 약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하는 편이 이득이다.

 

전쟁터에서 중상을 입은 병사는 안전한 장소로 가서야 통증을 느낀다고 한다. 침술마취도 통증이 물리적 자극에 대한 반응일 수만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밀가루를 진통제로 알고 먹고도 통증이 사라지는 플라세보 효과도 있다. 통증은 물리적 자극의 결과만이 아니라 그 자극의 의미에 대한 뇌의 무의식적인 해석의 결과이다.

 

통증이 물리적 자극이 말초에서 중추로 가는 상향 회로와 그것을 해석해 의미가 부여된 뇌의 신호가 전달되는 하향회로가 상호작용한 결과라면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자극의 강도와 양을 줄여야겠지만 하향신호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고려한 다른 새로운 해결책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고통의 기원은 생존이다. 생존에 유리한 자극은 받아들이고 불리한 자극은 멀리한다는 생명의 법칙이 고등동물에 와서 쾌락과 통증이라는 감각으로 진화한 것이다. 포유류부터는 감정을 느끼는 변연계가 진화했고 사회생활을 하는 동물은 공감 회로를 진화시켰다. 거기다 인간은 생명 유지와 감정을 담당하는 뇌 부위를 통제할 수 있는 전전두엽을 진화시켰다.

 

결국 생존을 위한 일차적 통증은 이차적으로 발달한 속성인 감정, 공감과 교류, 이성의 통제가 더해지고 문화화 되면서 ‘의미’있는 고통이 된 것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가해진 고통의 의미를 찾아내도록 진화한 유일한 동물일 것이다. 지금은 그 의미 찾기의 첫걸음을 떼는 단계다.

 

뇌와 마음

 

자우림이 부른 ‘가시나무’에 “내 속엔 내가 너무 많아”란 가사가 있듯 내 속엔 통일 되지 않는 ‘나들’이 가득 들어 있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빠른 마음과 느린 마음이 있다. 본능과 직관에 따라 움직이는 코끼리와 목적에 따라 코끼리를 조정하는 사육사를 두 마음에 비유할 수 있다. 대체로 전자는 감성과 욕망, 후자는 합리적 이성이라고 볼 수 있다. 연구에 의하면 빠른 마음에 따라 행동한 후에 느린 마음으로 그 행동을 합리화하는 경향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진화심리학자들은 두 마음의 기원을 생존 조건에서 찾는다. 살기 위해서는 즉각적인 위험 회피 본능이 먼저였고 안전을 확보한 다음에는 시간이 걸리는 먹이를 찾고 번식하는 활동을 했다. 먹이와 배우자 선택을 위해 진화된 습성이 느린 마음의 뿌리이며 문명의 토대가 되었다. 하지만 빠른 마음이 없이는 느린 마음도 없다. 이성이 문명의 원동력이지만 빠른 마음인 다양한 감수성이 그 보다 앞선 뿌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느리고 확실한 마음과 함께 부당하게 억압되거나 무시된 빠른 마음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탈리아 파르마대학에서 원숭이를 대상으로 연구하다 우연히 거울뉴런(거울신경세포)을 발견했다. 다른 동물이나 사람의 상태에 동조해서 함께 활성화되는 신경세포를 발견한 것이다. 이것은 집단생활을 하는 동물이 뇌 속의 특정 활동을 통해 서로 공감하도록 진화했음을 보여준다. 함께 행동하고 기쁨과 아픔을 함께 느끼는 것이 생존과 번영에 유리했을 것이다. 최근 자폐환자나 사이코패스를 대상으로 거울뉴론의 결함 여부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 중이다.

 

함께 뛰노는 사람들이나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는 경우 모두 공감하는 대상과 같은 뇌 부위에서 비슷한 활성 패턴을 보인다. 사랑은 두 사람의 뇌 활성 패턴이 공명을 일으키는 작용이다. 마음은 1천억 개나 되는 뉴론들이 하나당 1천 개 이상의 뉴런과 닿으면서 만드는 무수한 연속적 활동의 패턴이고 이것이 세상에 펼쳐지면서 만들어내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라이트 씨는 림프육종으로 회복 가능성이 없는 환자였다. 기적의 치료약이라는 실험신약이 주사되면서 라이트 씨의 병세는 종양이 줄어드는 등 극적으로 호전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약의 효과가 별로 없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다시 악화되었다. 담당의는 편법을 써서 약효를 크게 개선한 후속약이 개발되었다고 속이고 증류수를 주사했다. 라이트 씨의 병세는 처음보다 더 극적으로 호전되더니 얼마 후 완치 판정을 받고 퇴원했다. 한 의학협회의 신약의 효과가 없다는 발표를 우연히 보게 되면서 병세가 재발된 그는 재입원한지 이틀 만에 사망했다.

 

‘할머니 손은 약손’처럼 마음과 이야기에 따라 몸이 달라지는 플라세보효과는 흔히 경험하는 현상이다. 그 이야기가 몸의 의도와 상반되어 악화되는 것은 ‘노세보’라 부른다. 플라세보는 아픈 가족과 동료를 정성껏 보살피던 진화적 조상들의 몸속에 차려진 천연의 약방이다. 동료를 보살피고 위로하는 행위는 침팬지, 보노보, 돌고래 사회에서도 발견된다. 상처를 핥거나 덮어주고 약초를 주는 등 치유 효과가 있는 행위와 위로의 행위가 동시에 행해지다 보니 두 행위가 조건화되어 위로의 행위만으로도 치유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의사들 사이에 내려오는 격언이 있다. “가끔 치료하고 자주 도와주고 항상 위로하라!” 치료라는 과학적 행위와 돕고 위로하는 사회적이고 인간적인 행위를 다시 연결하는, 현대 의학에서 잃어버린 고리를 플라세보 현상을 통해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팔이나 다리를 절단한 사람의 95%가 사라진 부위의 존재를 느낄 뿐 아니라 그 부위가 가렵거나 아픈 증세를 보인다. 뇌와 말초 사이에는 끊임없이 신호를 주고받는데 말초로부터 갑자기 정보가 사라지면 뇌는 정보를 업데이트 못하고 직전에 형성된 회로에 따라 신호를 만들어낸다. 이 신호는 말초로 가지 못하고 중추를 맴돌며 반복된다. 환상통은 중추와 말초의 소통이 단절되어 중추가 현실에 맞지 않는 신호를 만들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캘리포니아 주립대 라마찬드라박사는 환상통에 대한 간단한 해결책을 생각해냈다. 환자의 몸 가운데 거울을 놓고 오른손을 비춰 비춰진 손을 왼손으로 착각하게 하는 방법이다. 오른손을 움직이며 거울을 보면 뇌는 왼손이 움직이고 있다고 느끼고 그 순간 막혔던 신호들의 통로가 열리고 통증을 일으켰던 신호도 주변으로 흩어진다. 뇌를 속여 안정된 몸과 마음을 얻는 것이다.

 

뇌는 몸을 지배하는 독재자가 아니라 몸과 환경에서 오는 다양한 신호와 정보를 종합해 새로운 대처방법을 만들어내는 그래서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만담꾼이다.

 

유전과 진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는 생존과 번식을 추구하는 생명의 속성을 복제품을 최대한 퍼뜨리려는 유전자의 이기적 행동에서 찾는다. 물론 생명체들이 이익의 관점에서 상호이타주의를 보인다는 것도 말한다. 반면에 생물학자 크로포트킨은 ‘상호부조’에서 생명의 본질은 상호 협력을 통한 상생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현실에서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도 하고 때론 무한히 희생적이기도 하다. 경쟁과 협력은 인간이 갖는 두 가지 본성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유전자는 낱말이고 유전체는 사전이고 단백질은 낱말로 이루어진 문장이라고 볼 수 있다. 단백질이 발현하는 형질은 문장들로 구성된 단편소설이고 인생은 단편소설들이 모인 대하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유전자의 변화 없이도 환경과의 상호작용에 따라 활성화되는 유전자가 달라져 다른 형질이 발현되고 이것이 후손에 까지 전달되는 것을 후성유전이라 한다. 유전자에 메틸이 추가되거나 유전자를 둘러싼 히스톤 단백질이 변화되어 형질발현이 달라지는 매커니즘도 있다. 이렇듯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많은 증거가 있다.

 

유전은 유전자의 명령을 단순히 실행하는 과정이 아니라 늘 되먹임 과정이 있고 수시로 자연의 조정과 감시를 받는 복잡계다. 세포 내외의 환경에 따라 구조와 기능을 바꾸는 역동적 시스템이다. 그렇다면 같은 유전 정보를 가진 줄기세포를 만들어 이식하기만하면 망가진 조직을 재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게이 유전자는 있을까? 동성애 성향에 영향을 주는 유전적 요인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을 게이 유전자라 부르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을 많은 연구들이 보여준다. 유전이 아니라면 다음으로는 뇌를 의심해 볼 수 있다. 유전적 요소가 뇌의 몇몇 부위를 특정한 패턴으로 바꾸고 그로 인해 동성애를 비롯한 삶의 취향을 가지게 된다고 볼 수 있다. 동성애는 심리적 사회적 생물학적 요소가 상호작용하며 만드는 성적행동의 패턴인 것이다.

 

두드러진 사건과 함께 했던 경험은 무의식에 기록되어 의식보다 더 강력하게 삶을 지배한다. 어려서 학대를 받으면 공포와 증오의 회로가 과도하게 활성화되고 반복되면서 뇌의 물리적 구조로 굳어진다. 유사한 상황이 오면 이 구조가 활성화되고 공격적인 행동을 유발한다. 반복되는 학대로 공격적으로 변한 개를 치유하는 과정을 보면 건강과 행복은 합리적 판단이 아닌 정서적 경험을 통해 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나친 단순화일 수 있지만 대체로 보수는 오래 전에 진화한 경쟁의 본능을 진보는 상대적으로 최근에 진화한 협동의 가치를 중시한다고 할 수 있다.

 

뉴욕대 심리학자 조나단 하이트는 정치적 마음을 다섯 조각으로 나누고 진보와 보수가 추구하는 가치와 관련지어 설명한다. 진보는 배려와 공정성의 가치를 중시하고 보수는 질서와 권위에의 복종, 소속 집단에 대한 충성, 순수성 등의 가치를 더 강조한다는 것이다. 진보는 소속 집단에 대한 충성이 약해 자주 분열하고, 보수는 결속력은 강하지만 그 때문에 도덕적 자정작용이 약해 부패하기 쉽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친밀한 개인과 집단의 편을 드는 것이 인지상정이고 진화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래서 도덕심리학자들은 도덕 감정이 집단 내의 결속력은 높이지만 다른 집단은 경계하는 심리 상태로부터 진화했다고 한다.  

 

진보와 보수의 가치 체계에서 중요한 특징 하나는 진보가 다섯 가지 가치에 차등을 두어 배려와 공정의 가치를 특별히 강조하는 반면  보수는 선호하는 가치의 불균형이 진보만큼 심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이트는 이것이 유권자의 정서에 호소하는 선거에서 보수가 유리한 이유라고 한다. 진보는 두 가지 가치만 강조하지만 보수는 다섯 가지 가치를 두루 활용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미국 공화당은 낙태 반대나 가정의 가치 등 유권자의 도덕 감정에도 호소하는데 민주당은 감성보다 합리적 이성에 주로 호소하므로 유권자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흔히 선거는 정책대결이어야 한다고 하지만 합리적인 정책이 유권자의 정치적 마음을 움직이기 어렵다는 게 정치심리학자들의 결론이다. 굶주리는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한 모금에 사용하는 유니세프의 포스터에는 설명 대신  고통스런 아이의 눈망울만 부각된다. 이것이 진화가 우리에게 준 마음이다. 선거에서도 합리적인 정책과 더불어 유권자의 내면에 있는 도덕 감정을 끌어내는 것이 관건이다. 물론 정략이지만 과학이고 현실이다.

 

2010년 가디언의 보도에 따르면 스스로를 보수 또는 진보라고 밝힌 런던대학생 90명을 대상으로 뇌를 스캔했더니 보수는 편도체가 진보는 전측대상회 부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편도체는 주로 공포를 담당하고, 전측대상회는 외부 정보의 수용과 학습을 담당한다. 보수는 생존의 일차적 조건에 민감하고 진보는 변화하는 환경에 더 민감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진화생물학과 진화심리학에 따르면 진화의 추동력인 자연선택은 변이, 유전, 선택의 과정이다. 모든 생명체는 같은 종이라도 서로 다르다(변이). 그 다름은 후손에 전해진다(유전). 다른 형질 중에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것만 살아남아 후손에 전해진다(선택).

 

남녀의 사랑도 후손을 많이 남기기 위해 선택된 심리적 형질이다. 우리 조상에게 임신은 진화적으로 필수지만 현실적으로 위험한 과정이었다. 임신된 몸은 엄마와 아빠의 유전적 이익이 충돌하는 곳이기도 하다. 아빠의 유전자는 아이를 크게 키우려고 하고 엄마의 유전자는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지나치게 키우는 것을 막으려고 한다.

 

인간은 직립보행으로 좁아진 산도와 커진 뇌 때문에 성숙되지 않은 아이를 낳아야 했다. 이 때문에 뇌의 발달 과정에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문명을 이룰 수 있었다. 번식을 위해 진화한 사랑을 우리가 문화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생물-문화적인 존재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몸과 사회

 

수렵채집인들은 다양한 동식물을 먹어 균형 잡힌 영양상태가 가능했다. 자주 이동해서 오물이 축적되거나 전염병이 발생하지도 않았다. 자연재해나 자연의 위험은 컸으므로 주술과 종교가 발달했다. 아이를 키우는 일이 쉽지 않아 유아살해도 적지 않았다.

 

농업이 가능해지면서 신분제도가 시작되었다. 반복되는 단순 노동은 근골격계의 퇴행성 질환을 불러왔다. 가축을 기르고 정착 생활을 하면서 감염병과 전염병들이 생겼다. 곡물을 주식으로 삼으면서 칼로리 섭취는 늘기도 했지만 영양의 균형이 깨지거나 영양실조가 늘었다. 고대 이집트의 미라를 조사해보면 평균수명이 30-35세 정도였다.

 

20세기 이전의 무서운 전염병들이 근대의학의 탄생으로 정복되는 듯이 보였지만 최근 새로운 병들이 등장하고 있다. 미국에서만 한 해 1만 9천명이 사망하는 슈퍼박테리아나 에이즈, 사스, 에볼라, 조류 독감 등 신종 바이러스 질환에 변형 단백질(프리온)의 광우병까지 다양하다. 이것은 모두 잘못된 먹이를 먹이거나 새의 날개 근육을 잘라 새장에 가두는 등 자연의 질서에 균열을 초래한 인간이 자초한 일이다.

 

무너진 질서에 새로운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인간은 질병을 통해 세상을 앓으면서 세상을 알아간다. 앎에 끝이 없듯이 앓는 질병을 완전히 정복하는 날도 없을 것이다.

 

1인당 국민소득과 평균 수명의 관계그래프(241쪽)를 보면 국민소득 1만 달러까지는 소득과 수명이 강한 상관관계를 보이지만 그 이후에는 아무리 소득이 늘어도 더 오래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득 수준에 비해 평균 수명이 상대적으로 짧은 나라들이 눈에 띄는데 소득 격차가 크고 상호 신뢰 수준이 낮은 나라들임을 알 수 있다.

 

최근 소득 불평등 정도가 질병 및 고통과 깊은 상관관계에 있다는 연구결과가 주목받고 있다. 평균 수명과 비만, 유아 사망률, 심장병과 당뇨, 약물 남용과 정실 질환 등의 건강 수준은 물론 학업 성취도, 10대 출산율, 폭력과 투옥, 살인 등의 사회적 지표도 소득 불평등과 강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 연구는 사회가 평등해지면 가난한 사람뿐 아니라 부자들도 더 오래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산다고 한다.

 

불평등이 심한 사회는 일반적으로 경쟁심과 상호 불신이 깊고 범죄가 잦을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이 공포와 분노를 촉발하는 방어의 심리 기제를 부호화한 예측 회로를 갖고 이것이 경험을 통해 강화되면 몸과 마음은 만성 스트레스로 피폐해지며 질병과 범죄로 연결된다. 몸과 마음과 환경은 뇌를 매개로 하는 상호 되먹임의 구조로 얽혀 분리되지 않는 경험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건강이 생물-심리-사회적 안녕인 이유의 근거다. 몸은 시대를 담는 그릇이며 시대의 병을 앓는 공간이기도 하다. 우리의 몸은 지금 풍요와 불평등을 앓고 있다.    

 

삶을 향유한다는 것은 내 속에 세상을 새기고 그 세상의 거울로 나를 비춰보며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 과정에 수많은 네트워크가 생긴다. 삶은 그런 의미의 흐름과 그 흐름의 패턴이 만들어 가는 이야기다. 죽음은 삶을 향유함으로써 극복된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교류하며 일상적으로 일하고 즐기는 것이 행복한 삶과 죽음의 핵심이다.     

 

의미 있고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가급적 소개하다보니 글이 길어졌다. 워낙 다양한 정보와 지식을 압축적으로 쓴 책이라 불가피했다. 책에 있는 풍부한 사례와 이야기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꼭 책을 읽어보시길 바란다.

 

진보와 보수의 마음에 대한 하이트의 견해에 대해서는 인간의 본성 중 문화적 요소의 영향이 큰 부분이므로 미국인과 다른 한국인의 마음 조각을 더 연구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삶과 죽음, 행복의 의미에 대해서는 특히 더 많은 철학적 윤리적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내용 소개를 생략한 문제 많은 네트워크 치과의 원조 격인 발치왕 페인리스 파커 이야기, 저자의 이웃에 사는 팔다리가 없는 어르신의 사연, 옥시토신과 결혼제도 같은 사랑이야기 등 흥미 있는 내용들이 많다. 내용의 일부만을 반영하는 책 제목은 마음에 안 들었다.

 

책을 3차원 그래프로 본다면 과거와 현재의 지식들과 미래지향적인 해석 등 세 개의 축 모두를 잘 갖춘 책이라고 서두에 말했었다. 그런데 하나의 차원을 추가하고 싶다. 그것은 세상과 인간을 대하는 저자의 훈훈하고 따뜻한 마음이다. 눈에 보이는 축은 아니지만 마음으로는 느낄 수 있는 4차원의 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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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극장 - 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의 드라마
고명섭 지음 / 김영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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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극장
니체극장 – 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의 드라마, 고명섭, 김영사
2013년 03월 31일 (일) 전민용 gca027@hanmail.net

 

   
 
그동안 니체에 관한 몇 권의 책을 읽었지만 늘 니체의 철학 자체가 아니라 니체를 해설하는 해석자의 철학을 읽었던 것 같다. 니체의 철학은 보수, 진보, 종교인, 비종교인, 극단주의자 등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끌어다 쓸 수 있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니체 텍스트에는 수많은 모순된 명제들이 섞여있고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많다. 내가 알고 있던 니체는 부드럽고 온건한 표정의 니체에 가깝다는 사실도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니체극장’은 니체의 삶과 사상을 놀라울 만큼 방대한 실증적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철학평전이다. 주인공 니체가 악마, 신, 늙은 여인, 뱀, 독수리, 차라투스투라 등으로 등장해서 일인극을 펼치는 ‘극장’이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니체 철학을 날 것 그대로 전달하고 이해시키는 능력의 탁월함이다.

 

기자가 이런 전문적인 책을 썼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기자이기 때문에 이렇게 잘 읽히는 책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해석자의 생각이 아닌 나의 방식으로 니체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인류 역사를 둘로 나눈다. 그의 존재 이전과 그의 존재 이후로.’(751쪽) 니체는 기독교 비판과 문명 비판을 토대로 지금까지의 모든 가치를 전복하고, 영원회귀와 권력의지를 동력으로 초인이 주인공이 되어 인간의 본성에 맞는 새로운 가치와 문명을 창조해 가자고 선언한다. 니체는 이런 자신의 핵심적인 사상을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안티크리스트’, 그리고 자서전인 ‘이 사람을 보라’를 통해 전개한다.

 

 니체는 기독교가 현대 유럽 세계의 모든 가치인 도덕과 철학,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등의  뿌리라고 보고 기독교를 뒤엎어 ‘모든 가치를 전도’ 시키려고 한다. 

니체는 나사렛 예수가 지상의 행복을 지향한 정치범으로 죽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사도 바울로가 예수의 죽음을 무릅쓴 실천을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나 부활한 예수라는 거짓말로 왜곡해서 지상의 삶을 부정하고 천상의 구원에 대한 약속으로 변조했다는 것이다.

 

‘부, 불경, 악, 폭력, 관능 등을 하나의 의미로 결합해 세상이라는 말을 더럽고 욕된 것으로 만들었다.’(554쪽) ‘신 앞의 평등을 내세우며 인간을 더 왜소하고 어리석은 인간으로 만들었다.’(554쪽) ‘그들은 우리의 본능과 완전히 상반된 것을 요구하고 있다.’(559쪽)는 말들처럼 기독교와 여기서 파생된 문명이 현세를 부정하고 모든 근현대인을 본성을 잃고 길들여진 허약한 무리 짐승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니체는 도덕과 선악과 미추의 기준도 문화권에 따라, 같은 문화권에서도 처한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고 보았다. 니체는 그 중에서 인간의 삶을 강화시키는 관점(해석)이 인간의 본성적인 권력의지의 실현에 적합한 진리라고 주장한다. 양심적이고 선하다고 하는 약자의 도덕과 사상은 강자의 권력의지를 부패시키는 척결해야 할 데카당스(퇴폐, 타락)일 뿐이다.(670쪽)

 

니체는 양심의 가책도 ‘인간 안에 있는 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인간이 본성적으로 가진 공격성이 발산되지 못하고 막히자 자기 내부로 화살을 돌린 것으로 보았다. 니체의 이런 생각은 나중에 프로이드에 의해 ‘공격 본능이 내면화되어 생긴 초자아와 자아 사이의 긴장이 죄책감’(621쪽)이라는 더 정교한 이론으로 정식화된다.

 

니체는 모든 가치의 전도를 위해 서양 정신사를 분석한다. 기독교의 절대 신이라는 관념이 유래된 그리스 철학을 시작으로 플라톤이 만든 ‘참된 세계(이데아)’가 기독교 교리와 여러 철학 사조를 거쳐 결국 ‘꾸며낸 이야기’로 귀착되는 과정을 서술한다.

 

‘참된 세계가 거짓이고 남는 것은 이 현실 세계뿐이니 이 세상을 즐겁게 살다 가면 된다는 생각’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부터가 니체의 독창적인 철학의 출발이다. 인간은 참된 세계나 절대자의 존재를 통해 현실 세계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했는데 전자가 사라지면 후자의 의미와 가치도 사라져버린다는 것이다. 

 

니체는 ‘우리는 대지를 떠나 출항했다! 우리는 건너온 다리를 태워버렸다. 게다가 우리는 뒤에 남아 있는 대지까지 불살라버렸다!’(302쪽)는 전면적 파괴 후에 인간 스스로가 ‘사납고 무한한 대양’같은 현실에서 모든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고 선언하고 전력을 다해 그 일을 수행한다.

 

두려움과 가능성이 교차하는 끝이 안 보이는 대양 같은 세상에서 새로운 가치와 세상을 만들어 가는 계기와 동력은 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이고 그 주체는 초인이다.

 

니체의 삶은 끝없는 질병의 고통과 회복의 반복이었다. 죽음과도 같은 고통 속에서 니체는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절규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지나면 다시 삶을 의욕했고, 창조의 의지로 불탔다.(505쪽) 언제나 파괴당하면서 다시 부활하고 되돌아오는 삶에서 니체는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를 보았다. 삶을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까지 껴안는 것이다. 그의 삶에서 영원회귀는 죽음을 거치며 다시 솟구치는 부활의 끝없는 반복이다. 우리 안에 살아있는 죽음과 재생의 디오니소스 신화이다.(506쪽)

 

이 귀환과 부활의 반복 속에서 작동하는 무한한 재생의 동력이 권력의지다. 어떤 경우에도 파괴되거나 소멸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더 많은 힘을 향한 의지, 그것이 권력의지다. 권력의지는 삶의 본질이고 영원회귀는 삶의 형식이다.(506쪽)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통해 설파하는 미래의 세상과 이를 창조하고 지배할 초인이 자신의 철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라고 생각한다. 니체는 “내 작품 중에서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독보적이다.”라며 자신이 인류에게 큰 선물을 주었고, 수천 년 동안 퍼져나갈 최고의 책이라고 자평한다.(745쪽) ‘초인이라는 말은 최고의 완성된 인간 유형을 지칭한다.--- 현대인, 선량한 사람, 기독교인, 여타의 허무주의자들과 반대되는 말이다.’(376쪽)

 

니체는 나폴레옹 1세가 가장 초인에 접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초인이 아직 존재한 적이 없고 더없이 위대한 사람조차도 너무나도 인간적’(385쪽) 이라는 말로 초인은 미래에 올 새로운 인간형임을 밝힌다.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이 초인을 창조할 수 있고, 초인을 당장 창조할 수 없다면 초인의 선조는 될 수 있다고 얘기한다.(379쪽)

 

인류적 차원의 천재의 출현, 인간 종 자체의 상승과 비약이라는 초인 사상이나 강자 중심의 사상은 ‘연민은 도태의 법칙인 진화의 법칙을 방해하고 있다.’(727쪽)는 언급에서 알 수 있듯 다윈의 진화론적 세계관의 영향이 매우 큰 것으로 보인다. 다윈은 ‘몇 세기가 지나지 않은 미래에 문명화된 인종이 전 세계에 걸쳐 미개인종을 절멸시키고 그들을 대체할 것이 거의 틀림없다.’(188쪽)고 예견했다.

 

현재 다윈의 이 예견을 믿을 학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니체가 이런 주장을 토대로 사상을 전개했다면 열등한 종인 약자를 잔인하게 멸종시키는 고등한 종인 초인이나 폭력적이기도 한 강자 중심 사상은 니체에게는 자연도태와 약육강식의 자연법칙이었을 것이다.

 

니체의 사상을 쉽게 이해하려면 영화 매트릭스를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문명 세계와 인류는 영화 속 가상세계인 매트릭스처럼 가짜 세상을 진짜로 착각하고 살아간다. 영화에서 진짜 인간들이 영양액 속에 잠겨 살듯이 진짜 인간의 본성은 마음 속 깊은 곳에 결박당하고 길들여진 채 가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무서운 비밀과 진리를 발견하는 사람이 네오이고 니체이다.

 

영화 매트릭스처럼 인간과 세계의 비밀과 진실을 안다는 것은 문제 해결의 출발일 뿐이다.  비밀이 밝혀지지만

인간 중에는 위험한 현실보다 안온한 가상세계를 선택하고 인간을 지배하는 것들의 편에 서는 심하게 길들여진 인간들도 많다. 네오와 저항군처럼 비밀과 진리를 깨닫고 목숨을 걸고 용감하게 싸우는 사람들이 강한자이고 초인이라면 이에 반하는 인간들은 멸종해야 할 비겁하고 약한 무리 짐승인 것이다. 니체의 관점에서 이 전쟁은 영화에서처럼 인류의 모든 미래와 생사를 건 ‘전대미문의 전쟁’(749쪽)이다.

 

‘큰 고통은 고귀함과 비범함을 낳는다.’(579쪽) 니체는 평생을 정신병과 지독한 고통 속에 살았다. 하지만 그는 그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맞서 싸웠고, 오히려 고통이 창조의 원천이라고 찬미했다. 광기조차도 그에게는 창조의 원천이 되었다. 이 불굴의 정신이 니체라는 걸출한 사상가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니체는 탁월한 심리학자이기도 했다. “도덕에서 인간은 자신을 ‘분할할 수 없는 것’, 즉 개체(individual)로서가 아니라 ‘분할할 수 있는 것’(dividual)으로서 다룬다.”(223쪽)는 니체의 생각은 인간이 두 가지 이상의 욕망을 가진 분할된 인격이고 서로 명령하고 복종하는 힘 관계라는 통찰을 보여준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과 융의 분석심리학은 많은 부분에서 니체의 영향을 받았다.

 

니체의 초기 저작들에서 알 수 있듯 니체는 젊은 시절 내내 쇼펜하우어와 바그너를 숭배했다. 나중에 니체는 그들의 한계를 보았고 그들의 생각을 오류로 판명했다. 하지만 니체는 이 오류가 필연적 경험이라면 그 필연을 아름답게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운명을 사랑하는 운명애라고 생각했다. 니체의 운명애는 필연적인 것을 아름다움과 결합하는 것이다.

 
니체는 ‘열정의 약화나 근절이 아닌 열정에 대한 지배! 우리의 의지의 지배력이 클수록, 그만큼 열정에 더 큰 자유를!’(20쪽)이라며 열정을 최대치로 허용하고 다시 그 열정을 지배하는 것이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의지가 약한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에 지배당하거나 아예 차단하거나 할 뿐이다. 강한 정신은 열정을 최대한 끌어올린 후 무서운 의지로 절도를 부여한다.  

 

‘나는 홀로 가겠다! 너희도 각각 홀로 길을 떠나라! 나를 떠나라. 그리고 차라투스투라에게 맞서라’(745쪽) 니체는 결코 자신이 숭배자나 지도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모든 개인이 각자 자신만의 개성을 가진 초인이 되어야 하고 그것이 니체가 생각했던 초인과 새로운 세상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800쪽에 달하는 짧지 않은 분량이지만 일독이 아니라 이독, 삼독을 할 가치가 충분한 책이다. 누구 말대로 니체에 대한 열등감을 많이 극복할 수 있었다. 활기차고 부드럽고 긍정적인 니체뿐 아니라 폭력적이고 반민주적이고 반시대적인 니체의 맨얼굴도 볼 수 있었다. 니체의 글은 약이자 독이라는 저자의 반복되는 설명에 공감한다. 강한 독을 강한 약으로 만들어 삶의 전환을 이루는 생동하는 모험의 길을 떠나 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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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의 배신 - 불편해도 알아야 할 채식주의의 두 얼굴
리어 키스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저자는 20년 간 철저한 채식주의자로 그것도 계란과 유제품도 먹지 않는 비건으로 살았다. 그녀는 우울증과 퇴행성 질환 등 심신에 큰 병을 얻고 채식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갖는다. 영양학적, 윤리적, 정치적 이유의 모든 채식이 오히려 인간과 지구를 파괴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존 학계의 생각과는 다른 견해들도 많지만 변방의 생각, 새로운 생각 그것도 자신의 체험과 공부에서 나온 생각이라면 일단 존중하며 귀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충동과 무지가 채식주의 신화의 본질이다.”

 

   
 
저자는 공장형 축산이 잔인하고 낭비가 심하며 파괴적이라는 채식주의자들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곡물 위주의 산업적 식량 생산과 농업이 더 본질적인 문제라고 주장한다. 공장형 축산의 기초가 사료를 제공하는 산업적 농업이기 때문이다. 농업이야말로 1만 년 전부터 지금까지 지구 생태계를 가장 전면적으로 파괴하는 행위였다는 것이다.

 

일년생 곡물을 기르기 위해서는 먼저 그 땅의 모든 생명을 파괴한다. 흙도 뒤집어서 파괴한다. 강우량이 적당하지 않으면 관개시설도 필요한데 이것은 땅의 염분화를 초래한다. 끊임없는 육체노동도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인구가 과다해지고 문화가 황폐해지고 노예제도와 계급이 생겨났으며 군국주의와 제국주의가 탄생했고 이마저 한계에 이르면 멸망했다. 문명의 역사는 이 참혹한 결과를 반복해서 보여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농업사회로의 전환을 문명을 향한 발전으로 찬양해 왔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인간의 건강은 많이 약화되었다. 농업의 확산 후에 영양실조, 골수염, 기생충, 인도 마마, 매독, 한센병, 폐결핵, 빈혈, 구루병, 골연화증, 성장 부진 등이 발견된다. 인류학자들은 뼈만 봐도 한눈에 수렵채집인의 건강한 뼈인지 농경사회인의 부서지기 직전의 뼈인지 알 수 있다고 한다. 

 

나무 위에서 살았던 우리 직접 조상들은 과일, 이파리, 곤충 등을 먹었다. 400만 년 전 직립을 시작하면서 몸집이 큰 반추동물을 먹어 왔다. 양질의 단백질과 지방 특히 영양분이 농축된 내장기관을 섭취하면서 인간의 소화기관은 크기가 줄었고 뇌의 크기는 늘었다. 들소, 영양, 매머드 같은 선사시대의 대형 동물은 말 그대로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었다. 그들이 인류 최초의, 그리고 지속적인 예술의 대상이 된 것은 다 이런 이유에서다.

 

반추 초식동물은 풀을 먹고 자라도록 진화했다. 반추위를 지나간 풀은 여러 개의 위를 거치면서 발효한다. 소나 영양의 배 속에 사는 박테리아가 그 풀을 먹고 그 박테리아를 동물이 먹는 것이다. 먹는 것만큼이나 먹히는 것도 중요하다. 초식동물은 섬유소가 필요하지만 풀도 동물이 필요하다. 풀을 뜯어 먹는 행위, 분뇨, 사체에서 나오는 영양분 등이 모두 풀에게 필수적인 영양소이다. 결국 땅, 풀, 다년생 식물, 초식 동물, 육식 동물 등 모든 생물들이 서로 먹고 먹히면서 건강한 생태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인간은 왜 농업을 시작했을까? 많은 동물들이 향정신성 성분의 식물을 탐닉한다. 인류를 중독 시킨 일년생 초본 역시 엑소핀(exophin)이라 불리는 아편과 비슷한 영향을 미치는 물질을 가지고 있다. 동기 부여, 불안 감소, 행복감, 심지어 중독성까지 다른 향정신성 약물과 비슷한 효과를 보인다. 식물은 1억 년이 넘게 화학 실험을 해왔다. 인간은 일년생 초본의 씨가 적절한 정도로 조정하는 중독 물질에 조종되어 자신의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씨의 대량 번식을 위해 기꺼이 중노동을 감수한 것이다.

 

 

최근 공장식 축산으로 동물에게 억지로 곡물을 먹이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동물에게 곡물을 먹이면 육우의 성장 속도가 빨라지고, 젖소의 우유 생산량 또한 극적으로 증가한다. 그러나 소의 체내에 들어간 곡물은 반추위 내부의 미묘한 박테리아의 균형을 깨뜨려 위 내부를 산성화하고 다양한 사육장병을 유발한다. 소든 닭이든 애초부터 곡물을 먹을 필요가 없는 동물이다. 닭도 곡물만 먹으면 지방간을 앓게 된다. 양과 염소 등 반추 동물은 곡물 식사를 아예 하지 않아야 한다. 공장형 축산은 윤리, 생태, 영양학적으로 악몽인 것은 분명하다.

 

공장형 축산은 화석연료를 사용해 값싼 곡물이 대량 생산되는 산업형 농업의 산물이다. 인간이 모두 채식만 하면 모든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다는 주장도 화석연료에서 나온 비료를 사용해 곡물을 과잉 생산하는 것을 전제로 가능한 말이다. 비료, 살충제, 파종, 수확, 가공, 운반 등에 모두 화석 연료가 들어간다. 옥수수밭 1에이커는 석유 50갤런  정도를 들이 마신다고 한다.

 

현재 적정수를 크게 초과한 인류를 먹여 살리는 데 우리가 아는 방법은 농업밖에 없다. 하지만 땅을 개간하는 것 자체가 표토를 파괴하고, 화석 연료에 기초한 인공 질소 비료 역시 영구적이지 않은데다 흙의 생물학적 활동을 파괴하므로 지속가능한 대안이 될 수 없다. 전 세계적으로 해마다 2500만 에이커의 경작지가 토양의 염류화로 농경불가능 지역으로 바뀌고 있다.

 

인간이 육식 대신 곡물을 먹어야 하는 근거로 “10에이커의 땅에 대두는 60명을, 밀은 24명을, 옥수수는 10명을 먹여 살리는 데 소는 2명만 살릴 수 있다.”는 베지팸보고가 있다. 이것 역시 곡물을 먹여 소를 키운다는 것을 전제로 한 계산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10에이커의 땅에서 다년생 혼작을 하면 ‘달걀 3천 개, 구이용 영계 1천 마리, 찜닭용 암탉 80마리, 쇠고기 2천 파운드, 돼지고기 2500 파운드, 칠면조 100마리, 토끼 50 마리’의 수확이 가능하다. 버지니아주 폴리페이스 농장의 실제 결과이다. 1년 동안 10명 정도가 건강한 식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양이다. 이 과정에 새로운 표토가 형성된다는 사실은 덤이다.

 

물론 지속가능한 농업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하지만 적당한 기후와 장소가 중요하고, 일년생 단일 경작을 다년생 혼작과 동물이 사는 목초지로 전환하는 윤작을 해야 한다. 이 과정에도 가축은 꼭 필요하다.

 

육식을 반대하는 동물 권리 운동가들이 옹호하는 동물들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다. 새끼를 돌보는가? 얼굴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기관이 있는가? 고통을 받으면 소리를 내는가? 이다. 이런 특징은 그 동물이 인간과 얼마나 비슷한지를 나타내는 인간중심주의의 변형일 뿐이다. 자연의 법칙은 누군가가 살려면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 동물도 식물도 살생을 하고, 생명은 한 생물이 다른 생물을 먹는 과정이다. 자연은 초도덕적이고 서로 의존하고 순환 한다.    

 

인간의 소화기관은 양과는 전혀 다르고 개와는 유사하다. 다만 장의 길이가 양보다는 훨씬 짧지만 개보다는 길다. 인간이 잡식 동물이라는 것과 단백질과 지방 섭취를 위해 고기를 먹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농경 사회에 수많은 질환이 만연했다는 고고학적인 증거도 있지만 아직까지 남은 84개의 수렵채집 부족의 건강도 그 증거이다.

 

곡물, 콩, 감자 등 씨는 동물이 먹지 못하게 방어하는 독이 들어 있다. 이것을 갈고, 물에 불리고, 싹을 틔우고, 열을 가하는 방법으로 일부를 무력화했다. 씨에는 소화 효소를 억제하는 성분이 있고, 랙틴 같은 단백질은 인간의 면역체계를 교란하기도 한다. 자가면역질환인 류머티스성 관절염은 밀과 옥수수의 확산 경로와 일치한다. 소아지방변증의 원인도 곡물이다. 글루텐 섭취를 줄이면 정신분열증이 개선된다는 많은 연구도 있다.

 

포화지방산이 콜레스테롤 수치를 높이고 심장질환을 일으킨다는 ‘지방가설’은 허점투성이다. 많은 양의 포화지방을 섭취하면서도 심장질환 발병률이 낮은 프랑스, 그리스, 동아프리카, 스위스, 태평양 군도 역설 등이 있다. 예컨대 케냐 마사이족은 거의 고기, 우유, 피로만 된 식사를 하지만 건강하다. 인간의 몸과 뇌는 적절한 단백질과 동물성 지방을 필요로 한다. 지용성 비타민의 섭취와 흡수에도 지방은 필수적이다.

 

지방 중에도 중요한 오메가 3 지방산을 과거에는 달걀, 생선, 고기, 유제품을 통해 섭취했지만 지금은 거의 불가능하다. 곡물을 먹고 크는 공장형 축산으로 가축들의 체지방 구성이 달라졌고 이런 고기는 오히려 건강에 해로울 수 있다. 곡물은 오메가 3는 거의 없고 오메가 6 함량이 높다. 동물에게 곡물이 아니라 풀을 먹여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미국 오하이오 클리블랜드의 치과의사 웨스턴 프라이스는 1893년 이후 30년 동안 어린이들의 구강 건강이 차츰 나빠지고, 천식, 알러지, 행동 장애 등 전반적인 건강도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그는 이것이 달라진 식사와 영양부족 때문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전 세계를 다니며 여러 집단의 식사와 건강 상태를 평가했다. 완벽에 가까운 건강을 가진 집단은 풍부한 동물성 단백질과 지방을 섭취했고, 당시 미국인이 섭취하는 양의 10배에 달하는 비타민 A와 D, 그리고 4배에 달하는 무기질과 수용성 비타민을 섭취하고 있었다.

 

완전식품으로 선전되고 있는 콩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콩은 공기 중의 질소를 고정할 수 있어 다른 일년생 작물과 윤작하는 식물로 인류와 인연을 시작했다. 그런데 콩에는 엄청난 반영양소가 들어있다. 소화효소인 트립신 억제인자는 된장 등으로 발효를 시켜야 무력화된다. 콩에 있는 식물성 에스트로겐은 테스토스테론 수준을 낮추고 내분비 교란 물질로 작용한다. 피트산은 무기질 대사를 방해하고, 고이트로겐은 갑상선종 유발 물질로 알려져 있다. 콩은 두뇌 노화를 악화시키고 알츠하이머병의 가능성을 두 배 높인다. 콩 조제분유가 유아에 주는 해약은 매우 크다. 두유나 콩 단백 등 콩으로 만든 식품들 역시 여러 가지 이유로 대단히 위험하다.

 

채식주의 식단 특히 비건 식단을 유지하면 나타나는 현상들을 보자. 인슐린 수용체에 이상이 생기며 저혈당증이 생긴다. 트립토판 결핍으로 우울증과 불안증이 온다. 무기질과 비타민 D 부족으로 뼈와 관절이 파괴된다. 오메가 3 지방산의 부족으로 관절, 혈관, 내장, 간, 신경, 뇌 등에 염증이 생긴다. 생리 불순과 불임, 임신을 하더라도 기형아 가능성이 5배 증가한다. 위도 망가지고 머리카락이나 피부도 나빠진다. 자가 면역 질환에도 걸린다. 항상 춥고 피곤하다. 이곳에 다 쓰기 어려울 지경이다.        

 

대안이 쉽지 않다. 현재 문제는 땅에 비해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사는 주변의 땅을 경작해 파괴하느냐 아니면 수입을 해서 다른 곳의 땅을 파괴하느냐다. 장기적으로 인구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각자 사는 지역의 조건에 맞게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구한 식량으로 살 수 있는 경제만이 정의로운 경제이며 지속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가능하면 아이를 낳지 말고, 차를 몰지 말고, 자기가 먹을 음식을 직접 기르자.”는 개인적인 지침을 제시하지만 이것이 문제 해결의 길이 아니라고 한다. 원인은 문명이고, 문명의 소비 형태이고 대규모 농업이기 때문이다. 태양 전지나 하이브리드 자동차 같은 생태 친화적 테크노 낙원은 이미 위기에 처한 산업에 기반한 불가능한 꿈이라고 한다. 유일한 해결책은 지난 1만년의 잔혹사에 종지부를 찍는 길 뿐이다.

 

저자는 급진주의자답게 권력과 대결하고 문화를 바꾸고 제도와 체제를 해체하는 전략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보편적 인권을 지켜나갈 지역 단위의 시민조직을 만들고,  지역 경제와 식량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권력과 직접 대결할 정치적 저항세력을 만들자”고 주장한다.     

 

인류 문명 전체와 맞서는 논쟁거리를 담은 급진적인 책이다. 건강이나 환경을 위해 채식을 하거나 노력하는 분들을 불편하게 하는 책이다. 주류 영양학이나 의학적 지식과도 논쟁해야 할 점이 많다. 학자가 아니라 운동가의 책이라 인용 등에서도 부실하다. 인구를 줄이는 문제는 매우 위험한 생각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을 많이 읽고 치열한 논쟁을 확대하면 좋겠다. 환경 문제가 문명과 체제 전체를 좌우할 핵심적 문제이고 환경운동에 새로운 열정이 절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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