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니체에 관한 몇 권의 책을 읽었지만 늘 니체의 철학 자체가 아니라 니체를 해설하는 해석자의 철학을 읽었던 것 같다. 니체의 철학은 보수, 진보, 종교인, 비종교인, 극단주의자 등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끌어다 쓸 수 있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니체 텍스트에는 수많은 모순된 명제들이 섞여있고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많다. 내가 알고 있던 니체는 부드럽고 온건한 표정의 니체에 가깝다는 사실도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니체극장’은 니체의 삶과 사상을 놀라울 만큼 방대한 실증적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철학평전이다. 주인공 니체가 악마, 신, 늙은 여인, 뱀, 독수리, 차라투스투라 등으로 등장해서 일인극을 펼치는 ‘극장’이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니체 철학을 날 것 그대로 전달하고 이해시키는 능력의 탁월함이다.
기자가 이런 전문적인 책을 썼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기자이기 때문에 이렇게 잘 읽히는 책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해석자의 생각이 아닌 나의 방식으로 니체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인류 역사를 둘로 나눈다. 그의 존재 이전과 그의 존재 이후로.’(751쪽) 니체는 기독교 비판과 문명 비판을 토대로 지금까지의 모든 가치를 전복하고, 영원회귀와 권력의지를 동력으로 초인이 주인공이 되어 인간의 본성에 맞는 새로운 가치와 문명을 창조해 가자고 선언한다. 니체는 이런 자신의 핵심적인 사상을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안티크리스트’, 그리고 자서전인 ‘이 사람을 보라’를 통해 전개한다.
니체는 기독교가 현대 유럽 세계의 모든 가치인 도덕과 철학,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등의 뿌리라고 보고 기독교를 뒤엎어 ‘모든 가치를 전도’ 시키려고 한다.
니체는 나사렛 예수가 지상의 행복을 지향한 정치범으로 죽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사도 바울로가 예수의 죽음을 무릅쓴 실천을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나 부활한 예수라는 거짓말로 왜곡해서 지상의 삶을 부정하고 천상의 구원에 대한 약속으로 변조했다는 것이다.
‘부, 불경, 악, 폭력, 관능 등을 하나의 의미로 결합해 세상이라는 말을 더럽고 욕된 것으로 만들었다.’(554쪽) ‘신 앞의 평등을 내세우며 인간을 더 왜소하고 어리석은 인간으로 만들었다.’(554쪽) ‘그들은 우리의 본능과 완전히 상반된 것을 요구하고 있다.’(559쪽)는 말들처럼 기독교와 여기서 파생된 문명이 현세를 부정하고 모든 근현대인을 본성을 잃고 길들여진 허약한 무리 짐승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니체는 도덕과 선악과 미추의 기준도 문화권에 따라, 같은 문화권에서도 처한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고 보았다. 니체는 그 중에서 인간의 삶을 강화시키는 관점(해석)이 인간의 본성적인 권력의지의 실현에 적합한 진리라고 주장한다. 양심적이고 선하다고 하는 약자의 도덕과 사상은 강자의 권력의지를 부패시키는 척결해야 할 데카당스(퇴폐, 타락)일 뿐이다.(670쪽)
니체는 양심의 가책도 ‘인간 안에 있는 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인간이 본성적으로 가진 공격성이 발산되지 못하고 막히자 자기 내부로 화살을 돌린 것으로 보았다. 니체의 이런 생각은 나중에 프로이드에 의해 ‘공격 본능이 내면화되어 생긴 초자아와 자아 사이의 긴장이 죄책감’(621쪽)이라는 더 정교한 이론으로 정식화된다.
니체는 모든 가치의 전도를 위해 서양 정신사를 분석한다. 기독교의 절대 신이라는 관념이 유래된 그리스 철학을 시작으로 플라톤이 만든 ‘참된 세계(이데아)’가 기독교 교리와 여러 철학 사조를 거쳐 결국 ‘꾸며낸 이야기’로 귀착되는 과정을 서술한다.
‘참된 세계가 거짓이고 남는 것은 이 현실 세계뿐이니 이 세상을 즐겁게 살다 가면 된다는 생각’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부터가 니체의 독창적인 철학의 출발이다. 인간은 참된 세계나 절대자의 존재를 통해 현실 세계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했는데 전자가 사라지면 후자의 의미와 가치도 사라져버린다는 것이다.
니체는 ‘우리는 대지를 떠나 출항했다! 우리는 건너온 다리를 태워버렸다. 게다가 우리는 뒤에 남아 있는 대지까지 불살라버렸다!’(302쪽)는 전면적 파괴 후에 인간 스스로가 ‘사납고 무한한 대양’같은 현실에서 모든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고 선언하고 전력을 다해 그 일을 수행한다.
두려움과 가능성이 교차하는 끝이 안 보이는 대양 같은 세상에서 새로운 가치와 세상을 만들어 가는 계기와 동력은 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이고 그 주체는 초인이다.
니체의 삶은 끝없는 질병의 고통과 회복의 반복이었다. 죽음과도 같은 고통 속에서 니체는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절규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지나면 다시 삶을 의욕했고, 창조의 의지로 불탔다.(505쪽) 언제나 파괴당하면서 다시 부활하고 되돌아오는 삶에서 니체는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를 보았다. 삶을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까지 껴안는 것이다. 그의 삶에서 영원회귀는 죽음을 거치며 다시 솟구치는 부활의 끝없는 반복이다. 우리 안에 살아있는 죽음과 재생의 디오니소스 신화이다.(506쪽)
이 귀환과 부활의 반복 속에서 작동하는 무한한 재생의 동력이 권력의지다. 어떤 경우에도 파괴되거나 소멸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더 많은 힘을 향한 의지, 그것이 권력의지다. 권력의지는 삶의 본질이고 영원회귀는 삶의 형식이다.(506쪽)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통해 설파하는 미래의 세상과 이를 창조하고 지배할 초인이 자신의 철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라고 생각한다. 니체는 “내 작품 중에서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독보적이다.”라며 자신이 인류에게 큰 선물을 주었고, 수천 년 동안 퍼져나갈 최고의 책이라고 자평한다.(745쪽) ‘초인이라는 말은 최고의 완성된 인간 유형을 지칭한다.--- 현대인, 선량한 사람, 기독교인, 여타의 허무주의자들과 반대되는 말이다.’(376쪽)
니체는 나폴레옹 1세가 가장 초인에 접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초인이 아직 존재한 적이 없고 더없이 위대한 사람조차도 너무나도 인간적’(385쪽) 이라는 말로 초인은 미래에 올 새로운 인간형임을 밝힌다.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이 초인을 창조할 수 있고, 초인을 당장 창조할 수 없다면 초인의 선조는 될 수 있다고 얘기한다.(379쪽)
인류적 차원의 천재의 출현, 인간 종 자체의 상승과 비약이라는 초인 사상이나 강자 중심의 사상은 ‘연민은 도태의 법칙인 진화의 법칙을 방해하고 있다.’(727쪽)는 언급에서 알 수 있듯 다윈의 진화론적 세계관의 영향이 매우 큰 것으로 보인다. 다윈은 ‘몇 세기가 지나지 않은 미래에 문명화된 인종이 전 세계에 걸쳐 미개인종을 절멸시키고 그들을 대체할 것이 거의 틀림없다.’(188쪽)고 예견했다.
현재 다윈의 이 예견을 믿을 학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니체가 이런 주장을 토대로 사상을 전개했다면 열등한 종인 약자를 잔인하게 멸종시키는 고등한 종인 초인이나 폭력적이기도 한 강자 중심 사상은 니체에게는 자연도태와 약육강식의 자연법칙이었을 것이다.
니체의 사상을 쉽게 이해하려면 영화 매트릭스를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문명 세계와 인류는 영화 속 가상세계인 매트릭스처럼 가짜 세상을 진짜로 착각하고 살아간다. 영화에서 진짜 인간들이 영양액 속에 잠겨 살듯이 진짜 인간의 본성은 마음 속 깊은 곳에 결박당하고 길들여진 채 가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무서운 비밀과 진리를 발견하는 사람이 네오이고 니체이다.
영화 매트릭스처럼 인간과 세계의 비밀과 진실을 안다는 것은 문제 해결의 출발일 뿐이다. 비밀이 밝혀지지만
인간 중에는 위험한 현실보다 안온한 가상세계를 선택하고 인간을 지배하는 것들의 편에 서는 심하게 길들여진 인간들도 많다. 네오와 저항군처럼 비밀과 진리를 깨닫고 목숨을 걸고 용감하게 싸우는 사람들이 강한자이고 초인이라면 이에 반하는 인간들은 멸종해야 할 비겁하고 약한 무리 짐승인 것이다. 니체의 관점에서 이 전쟁은 영화에서처럼 인류의 모든 미래와 생사를 건 ‘전대미문의 전쟁’(749쪽)이다.
‘큰 고통은 고귀함과 비범함을 낳는다.’(579쪽) 니체는 평생을 정신병과 지독한 고통 속에 살았다. 하지만 그는 그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맞서 싸웠고, 오히려 고통이 창조의 원천이라고 찬미했다. 광기조차도 그에게는 창조의 원천이 되었다. 이 불굴의 정신이 니체라는 걸출한 사상가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니체는 탁월한 심리학자이기도 했다. “도덕에서 인간은 자신을 ‘분할할 수 없는 것’, 즉 개체(individual)로서가 아니라 ‘분할할 수 있는 것’(dividual)으로서 다룬다.”(223쪽)는 니체의 생각은 인간이 두 가지 이상의 욕망을 가진 분할된 인격이고 서로 명령하고 복종하는 힘 관계라는 통찰을 보여준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과 융의 분석심리학은 많은 부분에서 니체의 영향을 받았다.
니체의 초기 저작들에서 알 수 있듯 니체는 젊은 시절 내내 쇼펜하우어와 바그너를 숭배했다. 나중에 니체는 그들의 한계를 보았고 그들의 생각을 오류로 판명했다. 하지만 니체는 이 오류가 필연적 경험이라면 그 필연을 아름답게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운명을 사랑하는 운명애라고 생각했다. 니체의 운명애는 필연적인 것을 아름다움과 결합하는 것이다.
니체는 ‘열정의 약화나 근절이 아닌 열정에 대한 지배! 우리의 의지의 지배력이 클수록, 그만큼 열정에 더 큰 자유를!’(20쪽)이라며 열정을 최대치로 허용하고 다시 그 열정을 지배하는 것이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의지가 약한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에 지배당하거나 아예 차단하거나 할 뿐이다. 강한 정신은 열정을 최대한 끌어올린 후 무서운 의지로 절도를 부여한다.
‘나는 홀로 가겠다! 너희도 각각 홀로 길을 떠나라! 나를 떠나라. 그리고 차라투스투라에게 맞서라’(745쪽) 니체는 결코 자신이 숭배자나 지도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모든 개인이 각자 자신만의 개성을 가진 초인이 되어야 하고 그것이 니체가 생각했던 초인과 새로운 세상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800쪽에 달하는 짧지 않은 분량이지만 일독이 아니라 이독, 삼독을 할 가치가 충분한 책이다. 누구 말대로 니체에 대한 열등감을 많이 극복할 수 있었다. 활기차고 부드럽고 긍정적인 니체뿐 아니라 폭력적이고 반민주적이고 반시대적인 니체의 맨얼굴도 볼 수 있었다. 니체의 글은 약이자 독이라는 저자의 반복되는 설명에 공감한다. 강한 독을 강한 약으로 만들어 삶의 전환을 이루는 생동하는 모험의 길을 떠나 보시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