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랜드
신정순 지음 / 비채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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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랜드의 꿈과 허상.

 신정순 작가의 <드림랜드>를 읽고 나니 문득 중학교 때 반 친구 중 한명의 얼굴이 살풋 떠오른다.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제법 잘 했던 그 친구는 가족 모두가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고 했는데 그 후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요즘은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지만 90년대만 해도 '아메리칸 드림'이 사회면에 계속해서 실릴 정도로 많은 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불러 일으켰던 단어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떠나기도 했지만 드라마 곳곳에서 사회적인 이미지를 차용해 주인공 혹은 주인공 친구가 미국을 떠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 장면이 많았다.

<드림랜드>는 다섯 편의 장편이 주옥같이 수록된 작품집이다. 한 작가의 단편을 읽다보면 좋은 단편과 좋지 않는 작품들이 끼어 있는데 반해 이 다섯 편의 단편은 무엇 하나 뺄 것 없이 밀도가 높다. 우리나라에서는 고학력으로 긴 가방끈을 자랑하며 '꿈'과 '희망'을 꿈꾸며 미국행 비행기를 탔지만 이내 그곳에서의 생활은 쾌적하고 안락한 생활이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는 하지 않았을 일을 그들은 자신이 배운 것을 써먹지 못하고 내려 놓고, 그들이 하지 않을 일을 골라 그들의 삶에 침투한다. 청소, 세탁, 도우미등 육체적인 노동으로 돈을 벌 수 밖에 없는 생활에 뛰어들고 그들은 이를 악물고 그일을 기꺼이 해낸다.

'드림랜드'를 시작으로 '폭우' '선택' '살아나는 박제' '나바호의 노래' 모두 꿈을 꾸고 희망을 갖고 왔지만 불운으로 발이 묶여 새장 속에서 날아갈 수 없는 새처럼 퍼덕이는 느낌으로 아메리칸 드림의 그늘을 그리고 있다. 우리나라의 많은 이민자 중에서는 꿈꾸는 그대로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상대적으로 생각과 다르게 음울한 일상과 목숨을 내놓고 일해야 하는 3D 직업에 종사하는 이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배운 것들은 저만치 버려 버리고 새로운 일을 하기 위해 기꺼이 땀을 흘리고, 남들보다 빨리 일어나고, 늦게 가게 문을 닫으면서 생활해 왔다는 이야기를 브라운관을 통해서 혹은 신문의 한 기사를 통해 자주 전해 들었다. 그들의 수고로움과 벗어나지 못하는 가난과 낯선 땅과 낯선 사람들의 이방인 혹은 방랑자 사이에서 그들은 처음부터 끈까지 약자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다.

많은 단편들 중에서 특히 '선택'이 가장 인상깊었다. 많은 이민자의 삶 중에서도 특히 여성의 삶을 치밀하게 그려냈다. 오빠와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엄마의 애정 대상은 오롯하게 자신이 아닌 오빠에게만 해당되었다. 공부면 공부, 그림이면 그림 모두 자신이 뛰어났지만 엄마는 혜진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오빠와 한배로 태어나 오빠의 영양분을 다 빨아먹은 나쁜 X으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남자의 사진을 들이대며 선을 보라고 종용했고, 혜진은 자신에게 일어난 상황들로 하여금 권태로움에 자포자기하듯 선을 봤다. 그 후 그 남자와 결혼하여 미국에 갔지만 그녀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평화롭게 삶을 살아가기 어려웠고, 그녀는 추억과 낭만이 아닌 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을 하나 둘 배우기 시작한다. 남편을 돕기 위해 바느질도 배우고, 영어를 익히면서 삶의 터전을 하나 둘 넓혀가던 중 엄마의 부고 소식이 들려온다. 좋았던 마음 보다 싫었던 마음이 가득했던 그녀는 슈퍼 이모의 전언을 통해 그간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엄마가 남겨놓은 재산 때문에 오빠와 새언니가 연락을 하지 않으려는 이야기도 알게 된다.

뒤늦게 딸에 대한 미안함과 보고 싶은 마음이 그녀에게 전달되고, 그녀는 자신이 벌어 놓은 돈까지 꿀꺽한 오빠에게 말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남편의 말 한마디로 '선택'을 하며 일을 일단락 맺는다. 피로 함께 맺어진 혈연관계지만 돈 앞에서는 앞도 뒤도 없는 삶의 모습을 재현하고 싶지 않았다던 남편의 이야기는 혜진에게 아쉽지만 깔끔하게 마음을 툴툴 털어버리는 '선택'으로 혈연의 끈 만큼은 훼손되지 않고 그저 거기에 머물렀음을 제대로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짙은 여운 때문인지 다섯 편의 단편 중 '선택' 만큼은 두 번 읽었을 정도로 좋았던 작품이다.

꿈꾸던 세계의 이상향은 더없이 높았고, 살아내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든 할 수 밖에 없었던 삶의 모습이 피폐하게도 느껴졌고, 때로는 간절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주류로 갈 수 없는 이방인의 삶. 다시 돌아오기에는 이미 많은 것들을 옮겨왔기에 갈 수도 없다.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얼마나 많은 힘듬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작가가 그려낸 이민자의 그늘 속에서의 여러 주인공들의 모습을 통해 그들의 다채로운 모습을 다층적으로 알아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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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와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이 사람이 특별히 나빠서가 아니라 불행에 발목을 잡혔을 뿐이다, 뭐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왜, 발목을 잡는 덫이란 게 있잖아요. 아무리 피하려 해도 피해지지 않는 그런 운명 같은 거요. 여기 온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운명의 덫에 걸려 여기 온 것 같아요. 안 그래요?" - p.39~40


"이미 가졌을 때 느끼는 기쁨보다 가지게 될 거라고 희망하고 있을 때 기쁘이 더 크잖아요. 제게 있어서 미국은 그러니까······희망, 그래요. 아직 가지지는 못했지만 앞으로는 가지게 될 거라는 희망을 주는 곳이에요." - p.110~111


"얼마 전 사냥을 갔었어. 올해 마지막 사냥이라 생각하고 갔지. 늙은 곰이 있기에 쏘았어. 제대로 총에 맞았는데도 절뚝거리며 한참을 도망가는 거야. 몇 방을 더 쏘아았지. 드디어 쓰러지더군. 고통을 없애주려고 아예 한 방을 더 쏘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다가갔지. 그러다 그놈의 눈동자를 보게 되었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았어.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어. 내가 착각을 하고 있었구나. 곰은 영웅이 아니어도 좋았던 거야. 그냥 늙으면 늙은 대로 영웅이 아니면 아닌 대로 그냥 살아 있길 원했던 거야. 그동안 나는 영웅이 아니면 살아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었어. 자기 표준치에 도달하지 못하는 삶은 가치 없는 삶이라고 생각했던 거지. 왜 나는 그렇게 생각했던 걸까?"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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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8-24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트럼프가 국정을 맡은 나라를 그를 뽑은
이들도 과연 드림랜드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