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총서 시리즈 중에서 한국철학 총서 시리즈는 그리 많지 않다. 가장 널리 알려진 시리즈는 아마도 예문출판사의 한국철학자 총서일 거다. 대체로 동양 철학자 이름을 건 총서시리즈들은(동양철학 총서에 포함되곤 함)대학출판부에서 찍어 내기 때문에 일반에 널리 읽혀지지 않는다. 주로 논문 모음지이기에 수업용 교재로 쓰여 독자가 매우 협소하다.
시리즈를 펴 내면서 출간사를 책 앞에 수록한 시리즈도 거의 없다. 대학 교재인데, 그런 걸 넣어서 뭣하겠는가. 총서를 기획한 사람의 정성이나 기획의도를 가늠해 볼 수 없는 시리즈가 넘쳐나고, 대체로 비슷비슷하다. 대학 출판부에서 출간된 한국철학자 시리즈를 보면 대체로 고려 유학자로부터 시작해서 구한말 최제우나 김옥균에서 끝난다. 멋대가리도 없고 거의가 그게 그거다.
하지만 작년에 눈에 번쩍 띄는 한국철학자 총서를 구경할 수 있었다. 그것도 한국현대철학자 시리즈다. 그리 많은 부수를 찍지 않았고 현재까지 5권만 나와 있는데, 여태까지 한국철학자 총서 시리즈 목록에서 볼 수 없었던 사람들이 눈에 띈다. 이대출판부에서 나온 이 총서 시리즈는 매우 밀도가 높고 만듬새가 좋다. 가격도 적절하게 책정한듯하다.
특히 내가 주목한 건 (언제나지만) 시리즈 출간사다. 시리즈를 펴내며 편집위원인 씨알학회의 출간사가 아주 멋들어지게 수록되어 있었던 거다. 보통 출간사는 한 페이지에 간략히 넣는 것이 보통인데, 이 시리즈 출간사는 무려 2페이지 분량이나 된다. 읽어보면 이 시리즈를 읽어보고 싶은 욕구가 마구 솟구친다. 무엇보다 근 백년 간의 한국의 철학자들을 묶어 시리즈를 낼 생각을 한 건 아마도 씨알학회가 처음인듯하다. 이 시기는 일제 식민지와 맞물려 우리 나름의 '근대'를 찾지 못했던 시기이기에.(물론 내가 무지해서 일 거다. 다른 목록을 모두 검토해 본 것도 아니니..)
발간사를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현대철학이라는 게 과연 있을까? 있으면 그들은 누구지?'라는 의문들. (우리 역사에서 근대가 없었는데, 현대가 가능해? 라는 의문)
그리고 과연 이들의 사상이 한국현대철학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우리 사사상사에 큰 족적을 남겼는지도 의문이다. 내가 도서관에서 빌려 봤던 건 <박홍규의 철학>인데, 얼마전 타계한 고 박홍규 교수가 우리 사상사에서 어떤 업적을 남겼길래 이 시리즈에 포함됐는지 의아했던 건 사실.
박홍규 전집 중 두어 권을 봤었는데, 제자들은 많이 길러냈는지 몰라도 그가 우리 철학에 한 획을 긋는 어떤 철학 이론을 제창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뭐, 이런 문제의식은 <박홍규의 철학>을 읽은 사람들의 몫이겠지. 어쨌든 매우 이례적인 철학 총서 시리즈인 까닭에, 그리고 전대미문(내용이!)의 발간사가 수록되어 있기에, 여기 옮겨본다. 관심있는 분들은 한 권 택해 일독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실 김교신과 서남동 그리고 박홍규는 정말 이 시리즈에서만 볼 수 있을 듯!)
| 시리즈를 펴내며 |
이제까지 한국에서의 철학 연구는 동양과 서양으로 나누어 주로 강대국(중국,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의 사상들 가운데 주류로 알려진 것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한국에서 동양과 서양을 분명하게 분리하는 태도는 20세기 초 일본의 동양통합론에 의해 더욱 확산되고 습관화되었다. 이 때문에 전 인류의 지혜를 참조하여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보편적이면서도 주체적인 연구 태도는 희석되고, 전공별로 나누어진 좁은 테두리 안에 갇히게 되었다.
서양철학의 연구는 본국에서 제기된 문제와 해답을 개괄적으로 소개하거나 모방하여 한국의 현실에 적용하는 수동적 태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러한 실정 때문에 서양철학 문헌들에 대한 사상적 연구는, 번역과 개괄적인 소개 논문의 수는 증가하였으나, 그 창의성에서는 해방 전후의 수준보다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철학 교육의 차원에서도 연구 대상에 대한 주체적이고도 비평적인 설명과 평가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일시적 유행 사조로서 혹은 임의적으로 선택된 전공이라는 이름으로 , 대학 교육의 현장에서 교육되어 왔다.
동양철학으로 분류되어 왔던 동아시아 사상도 철학과마다 한두 명의 연구자를 두고는 있지만 근대 이전의 전통 사상에 대한 연구와 소개에 머물러 있다. 아시아 철학의 연구 또한 전통의 권위에 기대는 수동적 연구 태도를 벗어나지 못하거나, 일본과 중국의 선행 연구 방법에 거의 의존하는 에속적 여건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현대의 상황이 던지는 문제에 대응하거나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새로운 방식으로 사유하고 피력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게 했다. 이 빈 공간은 현대 성양철학이 자신의 전제에 대한 깊은 음미 없이 자신을 선전할 수 있는 무대가 되었다.
한국 사상계의 이러한 타성적 관행은 최근의 관제화되고 수량화된 시장주의적 강제에 의해 인식조차 되지 못했다. 대학이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아니라 건물을 양성하고, 학술보다는 기업 이윤에 한눈을 팔 때, 한국 청년들의 영혼은 머리 둘 곳이 없다. 또한 창조적 문제 제기와 문제 자체에 대한 분석 및 자발적 해결의 의지에 기초하지 못하는 연구 풍토가 연구자 간의 자유로운 의사소통의 부재로 더욱 촉진되었다. 연구 공간의 시장화와 이에 따른 인간관계의 외면화가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연구자들 자신이 속한 역사적이고도 현실적인 조건에 대한 학술적이고도 사상적인 반성과 대응을 가로막았다. 특히 이 시대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근 백년 간의 한국의 현대사상사적 흐름에 대한 주체적 관심의 결여로 철학은 자신들이 어떤 문제를 역사적으로 부여받고 있는지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무자각적 철학은 단지 자신들의 철학을 전공 상태에서도 통ㅇ요될 수 있는 것처럼 무반성적으로 외우며 가르치는 철학 청부업일 따름인 것이다.
그동안 비주류이자 비체계적인 가치관으로 치부되어 왔던 근 백년간의 한국 사상사을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연구하여 발간하는 것은 한국 사상계의 난국을 타개하는 데에 하나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출발은 근현대 한국철학에 대한 자료를 발굴하고 연구하여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것은 발전시키고, 타당성이 의문시되는 관념들은 유보하거나 비판함으로써 재사유와 반성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먼저 일차적으로 간단한 자료집을 해설을 첨부하여 발간하고자 한다. 그리고 차후로 현대철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 논문과 연구서를 발간할 게획이다.
2011년 7월
씨알학회, 근현대 한국사상사 연구모임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