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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라는 이름 - 부모의 뇌를 치유해야 아이의 뇌가 달라진다
도모다 아케미 지음, 김경인 옮김 / 마인더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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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늘어가는 아동학대에 대한 가해자인 부모들을 바라보며 같은 부모로서 그들을 무조건적으로 비난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떤 원인이 있지 않을까. 부모들을 그렇게 만든 원인이 궁굼하다'는 생각이 들곤했다. 이 책은 자식을 학대하는 부모들을 뇌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어떤 방법으로 치료해야하는지 치유방법까지 자세하게 설명되어있다. 저자는 소아정신과 박사로 자신의 치료경험과 연구를 바탕으로 충실하게 이 문제에 대한 원인과 해결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매주 1명 이상의 아이가 학대로 죽는다고 한다. 아니 그보다 더한 아이들이 실재로 고통받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보는 미디어에 노출되는 건수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성인인 부모에게는 아이를 죽게 할 정도의 힘과 지능이 있다. 그걸 알면서도 아이를 끝내 다치게 하고 마는 부모의 뇌와 마음에 어떤 문제가 있는 걸까. 이책은 총 4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마지막에 특별대담도 담고 있다. 4장을 아우르며 학대가 뇌에 어떤 변화와 상처를 만드는지 확인할 수 있고, 트라우마가 자식에서 부모로 또 조부모로까지 이어지는 멀트리트먼트를 확인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학대로 인한 트라우마의 부정적 연쇄를 끊기 위해 부모에게 어떤 지원을 할 수 있는지 해결책도 나름 제시한다.

먼저 '학대의 개념'부터 정리할 수 있다.

1.신체적 학대 : 때리는 행위, 발로 차는 행위, 치는 행위, 던지는 행위, 심하게 흔드는 행위, 화상을 입히는 행위, 물에 빠트리는 행위 등

2.성적학대 : 아이를 대상으로 하는 성적 행위, 성적 행위를 아이에게 보여주는 행위, 포르노그래피의 피사체로 삼는 행위 등

3.방임 : 집에 가두는 행위, 굶기는 행위, 더러워도 씻기지 않는 행위, 자동차 안에 방치하는 행위, 심하게 아파도 병원에 데려가지 않는 행위 등

4.심리적 학대 : 말로하는 위협, 무시, 형제간의 차별대우, 아이 눈앞에서 가족에게 폭력 행사 등

 

생각보다 학대에 대한 폭이 넓다. 아이를 키우면서 소리치거나 엉덩이, 등짝한번 때리지 않고 훈육이 가능할까. 아들 둘을 키우는 나는 그럼 학대범인가. 말안 듣는 아들들 등짝 스매싱 날린게 한두번이 아닌데 그런것도 학대에 들어간다면 정말 당황스럽다. 이런 행위는 어디까지가 용서되는 일이고 어디서부터가 용서 안 되는 학대인 걸까.

중요한 것은 아이에 대한 행위가 '학대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로 인해 아이가 '상처를 입었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책에 주요단어가 있다. 바로 멀트리트먼트. 저자는 연구할때 '아동학대'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애쓴다고 한다. 대신 '차일드 멀트리트먼트'(mal나쁘다+treatment다루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고 한다. 그냥 '부적절한 양육'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사소한 멀트리트먼트라도 '계속 반복'하게 되면 아이의 뇌는 변형하게 된다. 체벌로 인해 '전두전야'가 위축되고, 성적 멀트리트먼트나 가정폭력 목격에 의해 '시각야'가 위축되기도 한다. 이렇게 어린 시절에 겪은 멀트리트먼트는 좌우뇌가 효율적으로 작용하지 못하는 원인이 되고, 심하면 '경계성 성격장애'가 발현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아이에게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왜 학대하는 부모가 있는 걸까. 알면서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 부모자체도 멀트리트먼트가 있는 것이다. 마음의 상처가 조부모부터 부모, 자식까지 되물리되는 고통의 연쇄인 것이다. 아이를 치료하려고 와서 부모자신이 트라우마를 가진 채 부모가 됐다는 걸 깨닫는 경우가 많았다. 삶이 이렇게 힘든 이유가 부모에게 받은 멀트리트먼트 때문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충격적인 사실은 어린시절에 멀트리트먼트를 경험한 사람은 그 가해자가 되기 쉬운 상대와 교제하거나 결혼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멀트리트먼트를 당한 사람이 폭력적인 상대에게 끌리게 된다면, 그 배우에는 애착장애가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일그러진 애착관계가 '표준'이 되어 있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그런 관계를 맺기 쉬운 상대방을 고르게 되는지도 모른다.

이렇기 때문에 저자는 아이만 치료해서는 안되고 부모, 경우에 따라서는 조부모 세대까지 아울러 치료를 진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읽으면서 좀 색다른 점은 멀트리트먼드와 정반대의 의미를 가진 '리질리언스'라는 것도 등장한다. 트라우마를 가지고 자라나 그대로 어른이 되는게 아니라 마음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 곧게 자란 성인을 뜻한다고 할수 있겠다. 즉 정신적으로 회복력이 좋은, 탄력성있는 어른으로 자란 것이다. 이유를 알기 위해 연구를 했는데, 세가지의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1. 개인의 특성 : 지능이 높다, 자기 긍정감이 강하다, 자아가 유연하다, 자제력이 있다. 긍정적인 사고 방식.

2. 가정의 특성 : 따뜻하고 안심할수 있는 가정환경, 부모와의 건전한 애착 형성

3. 사회적 특성 : 가족 이외의 어른이나 친구와의 안정된 관계, 학습장소의 탄탄함, 지역사람들과의 관계 공적기관등의 지원. 사회적 네트워크의 충실도.

 

여기서 주목해야 할점은 사회적 특성이다. 이는 곧 학대를 당한 아이들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멀트리트먼트의 가해자가 주로 부모나 가족의 울타리 안에 있기에 그것을 벗어난 범위에서 충실하게 지원해주면 부모도 아이들도 더 나빠지지 않게 수렁에서 빼낼 수 있는 것이다.

사회적 지원을 통해 부모가 공동육아(공동육아는 실제로 아이의 뇌발달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가 가능하게 만들어주고, 체벌을 법률로 강하게 금지하는 제도를 나라에서 만들어주는등 여러가지 방안으로 탄탄한 네트워크를 구축해주면 자녀 양육에 곤란에 빠져 조건불충분으로 학대할 위험이 발생되는 것을 쉽게 예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자녀양육은 혼자할 수 없다는 말에 동의한다. 아이에게 도가 넘는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가한 부모도 책임이 크지만 그것을 보고 비난만 할게 아니라 더 늦어지기 전에 사회적인 지원을 충분히 마련해주고, 아이뿐아니라 세대를 아우르는 병행치료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야 비극적인 학대의 결말을 줄일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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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우의 집 - 개정판
권여선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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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배경은 삼악동이다. 근데 재밌게도 삼악동이라고 부르지 않고 삼벌레 고개라고 불렸다. 이 삼벌래 고개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부유한 동네다. 높이에 따라 재산에 등급이 매겨지는 것이다. 그 고개의 중간지점에 우물집이라고 불리는 김순분의 집이 있다. 김순분은 우물집에 알차게 세를 놓고 받아먹고 있었고, 그 주변 동네 여자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계모임도하고 동네 소문들에 입방아를 찧는 마실과 같은 곳이었다. 은철이는 김순분의 둘째 아들이었고, 이 우물집에 새댁네 식구들이 세를 들어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원이는 새댁의 둘째 딸이다. 원이와 은철이는 자주 어울렸고, 어디서 들은 스파이를 흉내내며 아이들의 시선으로 동네 사람들을 탐색하고 여러 사실들을 알수 있게 해준다. 원의 엄마 새댁은 야무지고 배운것도 많은 여자 같다. 헌데 새댁의 남편, 그러니까 원이의 아버지가 어울리는 사람들과 하는 행동들이 뭔가 수상쩍어 보인다. 아이들 눈에도 그랬는지 아버지와 또 어울리는 그들을 안바바와 다섯 명의 도둑으로 비유한다. 그들이 꾸미는 것들이 뭔가 절정에 다다랐을때 갑자기 아버지가 사라지고 형사들이 집앞을 지키고 있게 된다. 새댁은 점점 무너지는 것 같아 보이고 무언가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느껴질 정도로 원이네 단란하던 네식구는 너무나도 위태로운 상황에 놓인다.

유신정권의 폭력으로 한 가정의 가장이 희생되고, 아내는 미쳐버린다. 그리고 남은 두 딸은 한 순간에 부모 잃은 고아가 되어 친척집에 의지하게 된다. 가장 가슴이 아팠던 것은 둘째딸 원이가 말을 잃은 모습을 보고서였다. 가슴이 아팠고, 분노로 뜨거워졌다.

소설에서는 '인혁당 사건'이라고 꼭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명백히 다가왔고, 그때 희생된 여덟명의 사람들과 가족들은 32년후에 무죄판결을 받았을지언정 그 혼과 넋에 대한 위로는 아무리 해도 못 채워질 한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이 더럽고 무자비한 사법 살인은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오히려 그 모든 고통들이 남은 가족에게로 넘겨져왔음을 알 수 있다.

유신정권에 희생된 원이네 가족과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더 있을까. 그 고통과 실의의 무게를 나는 감히 상상할 수 조차 없겠다. 대충 소설의 배경을 알고 봤음에도 원과 은철이, 새댁의 시점에서 본 그 사건과 고통의 무게에 자꾸 고개가 숙여졌고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그래도 봐야지, 끝까지 봐야지. 그리고 마음속에 새겨야지.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소설들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 내 짧은 삼십여년의 짧은 생에에도 많은 사건들과 마주할 수 있었다. 정권과 자본의 폭력에 무너지고 희생된 많은 사건들을 바라보며 거기에 내가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도 했었다.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주기적으로 이것에 대해 환기를 시킬 필요가 있다. 책으로든 영화로든 어떤 형태의 도구든 사용하여 사람들이 잊지 않게 해야한다. 잊어야할 것들도 있지만 이렇게 잊지 말아야할 것들도 있다. 그것을 구별해내는 분별력과 자각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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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의 철학 여행 - 소설로 읽는 철학
잭 보언 지음, 하정임 옮김, 박이문 감수 / 다른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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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음표로 가득한 책.

책을 읽으며 깜짝 놀란 사실, 마치 다들 알고 있는데 나만 혼자 몰랐던 사실들을 곳곳에서 발견하는 책이었다. 철학과 과학이 이렇게 밀접한 관계였을 줄이야... 이제 모든 학문의 경계가 희미해졌다고는 하지만 기본 개념까지 이렇게 내밀하게 뒤에서 공조하고 있었다니. 그 동안 문학병에 빠진 헛똑똑이로서 내 프레임 중 한 모퉁이가 깨지고 사고의 범위와 시각이 더욱 확장될 수 있게 많은 물음표를 던져준 책이 되었다.


처음 이 책을 신청했을 때, 500쪽이 넘는 꽤 두꺼운 책이고, 게다가 철학책이고, 이 주안에 완독이 가능할까 망설였다. 하지만 소설로 읽는 철학이라는 부재에 조심스럽게 용기내어 도전했고, 놀랍게도 일주일만에 완독 가능했다. 본문은 이언이라는 소년이 꿈에서 나타난 할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철학여행을 하는 소설같은 철학서다. 이언은 곧 나로 대입되는데, 놀라운 사실들과 물음표로 가득한 이 여행에서 이언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어머니등 여러사람과의 대담을 통해 자연스럽게 토론을 하게 된다. 이 대담들은 독자인 나의 사고도 유연하고 넓어지게 만들었고, 물음표가 가지는 핵심에 대해서도 이해를 도왔다.




보이지 않는 실체.

살면서 단 한번이라도 내 눈 앞에 보이는 것이 실체가 아니라고 의심해 본적이 있는가. 나는 단 한번도 그런 종류의 의심을 해 본적이 없다. 눈앞에 보이는 대로 느껴지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했을 뿐이다. 결국 내가 지금까지 쌓아온 지식과 경험, 감각에 의존하여 모든 것을 판단했고 또 그것이 진실이라고 확신했다. 근데 이 책을 읽고 어떤것을 확신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지 깨닫게 되었다.


내 사고와 기준에 위기가 찾아왔다. 내가 알고 있던 지식이라는 것에는 어떤 확실한 실체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눈 앞에 지금 보여지는 사물의 실체조차도 확신할 수가 없게 됐다. 모든 시각적 감각은 나를 속이고 있었고 감각이 미쳐 메우지 못한 구멍은 뇌가 열심히 상상하고 구상하며 재구성하여 메우고 있었다. 이것을 알자 마음속으로 좀 소름 비슷한 것이 돋았다. 그동안 나는 무엇을 믿고 이 많은 것에 확신하며 살았을까. 확신이야말로 무서운 생각이었고 모든 것에 의심을 함으로써 실체에 좀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철학서라 어려울거라 예상했던 것이 무색하게 놀랍게도 술술 읽혔다.



과학도 철학도 모두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일 뿐 완벽한 참은 아니다.

인공지능이 얘기 되는 세상에서 자아와 이성, 정신의 구분은 점점 희미해져 가는 것 같다. 인간은 언어와 수학을 할 수 있는 존재기에 정신이 있다고 하지만 현재 수학은 컴퓨터가 더 잘하고 기계들은 점점 언어를 다루고 있다. 이 말은 정신은 곧 뇌와 같다는 말인데. 이 뇌를 대체하거나 완벽히 복사 할 수 있게 되면 뭔가 그때부터 인간의 존재와 존엄성은 사라들것 같은 위화감을 느낀다. 정말 그 때가 되면 인간은 더 이상 특별한 존재가 아닌 것일까.


하지만 컴퓨터가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언어를 다 안다고 할 수 있을까. 기본적인 수학을 빠르고 정확하게 할 뿐이지 수학적인 증명까지는 아직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럼 어디에 차이가 있는 걸까. 오로지 물질적인 육체에 정신과 이성, 영혼은 도대체 어디에 붙어있는 걸까. 10세의 나와 37세의 나는 동일한 인물인 걸까. 그동안 세포는 죽고 살아나길 수천번은 했을 텐데. 물질로 육체를 바라본다면 10대의 나와 30대의 나는 다른 사람이다. 그러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이 본질은 비물질적인, 즉 형이상학적인 어떤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바로 '일관성'이다. 형태나 물질이 바뀌어도 처음 그대로 인식되는 일관성 말이다.


처음부터 이성, 정신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데는 흥미롭더라도 무리였을지 모른다.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도구로서 한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저 완벽하지는 않지만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일 뿐이지 그 본질과 실체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것 같다.


내가 평소에 관심있었던 복제인간에 대한 얘기도 나온다. 놀라운 사실은 똑같은 DNA를 가진 복제인간이라도 서로다른 기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A,B,C의 복제인간이 똑같지 않은 취향과 개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좀 무서워진다. 이것은 더이상 복제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 봐야하지 않을까. 또 혼란스러웠다.

점차 읽으며 경계가 모호해진다. 기준을 어디까지 잡아야 하는지 혼란스러운 것이다. 게다가 그 기준을 잡을 권리가 인간에게만 있다고도 하지 못하겠다. 언제든지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가 등장한다면 그 왕좌를 내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전에 알쓸신잡에서 들을 기억이 난다. 모든 과학은 100%를 향해 가고 있는 거라고. 현재 증명된 모든 과학적 사실들도 작은 오류하나로 단박에 0%으로 뒤집힐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새로운 개정판이 나오면 그전에 증명된 것들은 모두 뒤로 사라지는 과거의 지식들이 되는 것이다. 때문에 절대 과학자들은 '이것이 100% 참이다.'라고 확신하지 않는다고 한다. 옳은 말이다.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수학, 과학,철학등의 지식들은 무조건 신뢰하는 태도보다는 한번씩 의심하고 고민해보는 태도가 더 중요한 것 같다. 그래서 내가 학생때 공부한 것과 현재 공부하고있는 지식은 완전 반대의 입장으로 변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완벽하게 입증된 것들이라도 무조건적으로 신뢰한다면 후에 큰 혼란을 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머리 속 오래된 사고와 지식들도 새로운 환기가 필요하다.

이 책을 읽으며 많은 분야에 혼란을 겪었다. 처음엔 내 안에 자리잡고 있었던 오래되고 당연한 것들에 대한 흔들림, 그리고 혼란과 충격이었고, 그 다음은 오류에 대한 이해가 더해졌다. 갑자기 머리속이 물갈이 되듯이 전체적으로 한번 리셋된 느낌이 들었고, '이것이 진정한 사고의 환기가 아닌가.'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생각의 폭이 확 넓어진 것이다.


이제 작은 사물과 현상뿐 아니라 어떤 신념과 이상을 바라보더라도 순진하게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못할 것 같다. 한번이라도 의구심을 갖고, 남이 보지 않은 시점에서 바라볼 볼 줄 아는 또 다른 사고의 눈을 뜬 것 같다. 결국 분야와 주제는 다르지만 모두 한 가지 맥락에서 여러 가지가 나오는 것 같았다. 바로 '사고하는 힘'.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으로 스스로 생각하는 근육을 키워두면 시대에 맞춰 변화하는 지식, 과학, 사상과 철학들을 나름의 기준 있는 분별력을 가지고 비판하고 또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 나오는 모든 것들을 알 필요도, 의심할 필요도 굳이 없지만, 그래도 흘러가는데로 사는 것보다 사유라도 능동적으로 폭넓은 스펙드럼을 가지고 자유롭게 하고 싶어졌다.


머리 속 오래된 사고와 지식들도 새로운 환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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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의 시간 기록자들
정재혁 지음 / 꼼지락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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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이란 무엇일까. 뭔가 대대로 이어오는 가업이 먼저 떠오른다. 오래 됐지만 고풍스럽고 먼지가 자욱하지만 시간이 쌓여 만들어 낸 풍경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지어진다.

헌데 이 책을 읽으면 현 시대의 장인은 좀 의미가 다르다고 생각된다. 어제와 오늘의 차이가 심하게 변하는 사회와 사람들의 시각을 충실히 반영하면서 동시에 장인이라 부를 만큼의 전문성을 갖춰야 한다. 뭔가 치열하고 과도한 경쟁이 떠오르지만 이 책을 보면 창업을 계획하고 상상하고 그것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젊은 장인들의 신선하고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깊이 있는 연구와 노력에 놀라게 된다.

더 이상 장인은 오래되어 대물려 온 어떤 것을 변화하는 외부로부터 지켜내고 유지해 오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그 안에 나만의 개성과 기술을 바탕으로 새로운 장인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제 3의 콜라를 꿈꾸는 [이요시 콜라] , 안테나 책방 [북숍 트래블러], 츠바메 노트의 공장장, 컬러 풀 유럽채소 [고야마 농원], 최초의 여자 스시 장인 [나데시코 스시], 도시의 아트 큐레이터 [구와바라 상점]등 여기 저자가 취재한 도쿄의 밀레니얼 장인 14명을 바라보며 조용한 내 마음 속에 끝 없는 감탄과 그들에 대한 격려와 응원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며 내가 생각하는 일에 대한 정의도 다시 내려볼 수 있었다. 일이란 무엇일까. 돈버는 수단, 사회와 조직에 대한 소속감과 누군가에게 인정 받는 성취감, 안정감을 주는 도구. 이정도가 다일까. 혹시 이런 평면적이고 납작한 생각 때문에 사람들이 일에 있어서 더 자신을 가혹하게 소진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일에 대해 좀더 입체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일보다는 그 일을 하고 있는 내가 주체가 되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렇게 되야 이 책의 장인들처럼 스스로 안에서 샘 솟는 아이디어와 연구가 자연스럽게 나오고 더 오래 일을 사랑하며 열정을 가지고 평생을 자기만의 것으로 가져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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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비늘
조선희 지음 / 네오픽션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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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구전이나 신화 속에서 계속해서 내려온 인어이야기. 이전부터 내가 많이 보아왔던 인어이야기들은 유혹적이면서도, 신비롭고, 어쩐지 가슴 아픈 결말들이 먼저 떠오른다. 근데 이 책은 인어와 인어가 가진 신비로움보다는 그곁에 있는 인간의 욕망과 그로인해 보여지는 타락의 밑바닥이 더 강렬하게 느껴졌다. 왜 하나같이 그렇게 더 가지지 못하고 탐내하는지. 왜 그 한가지 약속하나 못지켜서 그 꼴이 나는지. 그 욕망의 참담함에 동류인 나까지도 비참해지고 힘들어졌다.


소설은 인어와 그 인어가 가진 소금 비늘에 대한 이야기다. 이야기의 중심 배경은 백어도. 백어도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백어의 전설 때문이다. 사람만큼 흰 물고기. 백어는 인어를 가리켰다. 이 백어는 처음 본 사람을 따라 육지로 나오는데 그때 사람으로 탈바꿈하면서 떨어진 자신의 소금 비늘을 가지고 온다. 하나는 자기 옆의 남자에게, 나머지는 절대 손대면 안 된다고 경고한다.


이 약속만 지킨다면, 백어가 가지고 온 행운이 본인에게 있을테지만, 만약 훔쳐간다면 목이 잘리는 불행이 있을 것이기에 백어는 경고한다. 하지만 이 약속을 지키기에 백어가 숨겨놓은 소금 비늘은 희귀하여 세상에서 그 값어치가 높고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유혹되어 환영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게다가 인간에게는 본능적으로 강한 욕망과 탐욕이 그늘져 있어 이런 류의 약속은 언제나 깨어지기 마련이다.


결국 예상대로 백어석을 본 사람들의 욕심은 끝이 없어져 모두가 틀림없이 소금비늘에 손을 대게 되고 하나, 둘 훔치면서 환영에 시달리며 탐욕에 눈이 멀어 뒤따라오는 불행과 함께 타락하고 바다로 불려가 얼굴이 뜯기고 손이 깊게 베여지는 끔찍한 죽음을 맞는다. 소금 비늘은 아름답고 거품처럼 물에 잘 녹지만 칼처럼 날까롭게 묘사된다. 그리고 이것이 자신의 소금비늘을 훔치는 사람에게 목을 찌르고 그어 잔인하게 살해하는 흉기가 되는 것이다.


소설에 인물은 초반에 두명으로 크게 나뉘어 보여준다. 하나는 백어도와 가까운 마을에 살았던 순하와 또 하나는 떨어진 도시에 사는 용보다. 순하는 어머니가 백어지만 소금비늘을 훔친 아버지가 자신이 죽임당할까 두려워 먼저 어머니를 살해한 경우고, 용보는 백어인 한마리와 결혼하여 살고 있는, 그러니까 앞으로 백어석을 훔칠 남자가 된다.


이야기는 중반부로 갈수록 용보에 초점이 맞춰진다. 용보는 평범한 인간이다. 자세히 말하면 성실하게 자신의 능력을 키우는 쪽이 아닌 어느날 자신에게 선물처럼 찾아올 운만을 기다리는 게으른 인간형이다. 때문에 아무것도 없는 자신에게 백어인 한마리는 행운이었다. 경제적으로도, 섬이라는 예쁜 딸을 둘 수 있었던 것도. 하지만 곁에 있던 행운을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보지 못했던 용보의 눈에 마리가 숨겨 놓았던 소금 비늘이 눈에 띄게 되고, 마리의 경고에도 여지없이 용보는 탐내고 결국 소금통을 바닥까지 긁어 주제에도 없는 주식이며 사업이며 돈으로 바꿔 다 날리기 시작한다.


이 사실을 안 마리는 백어의 본능으로 당연히 바로 용보의 목을 그어야 했지만, 이미 한번 비슷한 일로 살해를 했기에 감정적으로 힘들어하며 용보를 어찌하지 못하고 곁을 떠나는 것으로 답을 내린다. 하지만 용보는 마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바다 끝까지라도 찾아가 만나고 싶어한다. 마리처럼 살인이 싫어 본능을 억누르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해도 이렇게 집착하며 쫓아오니 결국 죽일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용보가 과연 죽을까. 살아날 수 있을까. 약속을 저버린 탐욕 덩어리 루저인생의 용보를 욕하며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소금비늘을 둘러싸는 다양한 군상의 욕망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용보는 그저 샘플일뿐 사실 모든 사람은 빛나는 어떤 것을 갖고 싶어하고 이 소유욕과 탐욕은 언제나 지켜져야 할 약속과 말의 무게를 가볍게 무너뜨리는 것을 소설을 통해 여실히 볼 수 있다.


소설의 흡입력이 좋아 아이들을 재우고 새벽까지 읽어내려갔다. 사실 환상 소설은 배경과 그 환상의 주체가 되는 인어의 묘사와 표현이 잘 드러나야 읽는 독자가 거부감이 없을텐데, 좀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작가의 필력이 너무 좋아 깊게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백어도와 백어의 묘사는 실제로 눈으로 보는 것 같았고, 특히 후반에 용보와 준희, 순하가 마리를 만나러 바다 한가운데 있을때 그 밤바다의 음산함과 스산한 바람이 내 얼굴에 부는 듯한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


완독 후 책 표지사진을 가만히 보니 햇빛에 반사되서 뭐가 반짝 거렸다. 백어의 소금비늘이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백어의 오묘한 빛의 머리결과 반짝이는 소금비늘의 표현이 표지와 딱 들어맞아 감탄했다. 그 반짝거리는 소금비늘을 만지면서 실제로 나도 그런상황이 오면 유혹을 뿌리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흠칫들며 읽으면서 손가락질했던 용보의 마음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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