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가 엉기는 것을 상상한다.

엉긴피는 나를 잠식하여 발끝부터 썩어갈 수 도 있다.

 

과거는 비릿한 배경이 되어

분절하는 현재에 끼어들지만

 

지금 이순간을 살아내고,

미래는 없는 것 처럼

미래에 대한 상상이 크게 지배한 것이 나의 과거였다면,

 

지금은 지금.

현재에 가장 큰 사건, 어쩌면 미래에 일어날 큰 사건을

접수한 미래의 탐정과 같이

 

오늘의 의식을 쪼개고 맛본다.

뜨거운 태양과 바람의 촉감만이 육체의 일부인 생각을 몰아내듯이

온 신경이 몸에 쏠려있을때..

육신의 건강함이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병자로서, 살아갈 처한 내 운명을

걸어갈것인가.. 놓아줄 것인가..

 

이것은 강요된 선택인가..

몇겹의 자신을 벗기려들때마다 그다지 나는 소중한 것인가?

 

무수한 영혼이 통과하는 반투명의 물질이 아닌가?

걷는 내 몸까지 의식하는 동떨어진 이탈.

 

뒤틀린 척추와 누런 자위들

세상의 진부한 말들을 소각장으로

발끝의 저림은 발톱하나를 뽑아내기를

 

실제와 실재가 혼용하는 처마 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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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챕터만 읽은 상태이지만, 조금 정리해보고자 한다.

 

----신경성 폭력

매우 얇은 책이지만, 저자가 바라본 시대의 질병이 독특했다.

저자는 지난 세기는 면역적 시대였으며 이제는 신경증적, 경색성 질병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한다.

면역이라는 것은 타자의 이질성에 대한 공격과 방어, 타자의 부정성에 대한 것이라면, 경색적 질병은 긍정성의 부정이다. 이 부분에서 좀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타자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 구별이 되지 않는 동질적인 것의 과다,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하여 신경증이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질성의 과다라는 것은 개인의 개성과 취향이 자유로이 각각이라고 생각하지만, 자본주의 시스템에 포획되어 각자의 고유함보다 같은 것 아래 놓여있을 뿐인것이다.

'폭력은 부정성에서뿐만 아니라 긍정성에서도 나올수 있다. 낯선것뿐만 아니라 같은 것도 폭력의 원천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것이 지배하는 시스템에서 저항혁은 오직 비유적 의미로 쓰인다.'

타자를 나와 다른 것이라는 이질성에으로 몰아내려는 것과 타자와 나를 구별할 수 없이 같은 방식의 삶이라는 것은 사적영역이 공적영역을 침범과 마찬가지로 폭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긍정성의 과잉에 대한 반발은 면역저항이 아니라 소화신경적 해소 내지 거부 반응으로 나온다. 과다에 따른 소진, 피로, 질식 등 "

현대의 삶에 주류를 이루고 있는 우울증, 번아웃 등 현대병이 가지고 있는 여러 신경학적 질환등은

자신의 내부를 갉아먹는데,, 이것의 원인은 타자와의 관계가 너무나 촘촘해 거기서 벗어나거나 혹은 너무 깊은 잠식으로 인하여 스스로를 지키지 못할때 나타나는 병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신경성폭력은 시스템의 이질적인 부정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시스템적인 폭력, 시스템에 내재하는 폭력이다. 소진증후군도 자아가 동질적인 것의 과다에 따른 과열로 타버리는 것이다.'  '같은 것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저항력같은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 긍정성의 폭력은 적대성을 전제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력 관용적이고 평화로운 사회에서 확산되며 그 때문에 바이러스성 폭력보다도 눈에 덜 띈다.

타자에 대한 이질성은 자아를 더욱 강고하게 만들 수 있지만, 타자와 자아의 경계가 모호함으로서 일으키는 피로감은 오히려 폭력적이지 않은가. 자의식의 과잉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지만, 같은 시스템에서 반복되는 일상안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뻔한데... 그것이 자의식 만이 아니다라는 어렴풋한 생각이 든다

 

---규율사회 피안에서

다음 챕터에서는 우리사회에 규율에서 성과중심의 사회로의 이행에 관한 분석이다. 저저는 날카롭게 규율, 즉 금기와 억압, 부정성의 사회에서 성과사회로 이행하면서 과거 복종적 주체에서 우리는 성과적 주체로 이행되었음을 지적한다. 성과적 주체란 자기자신을 하나의 기업으로서 관리하고 경영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의미한다. 모든 사회는 일의 효율과 생산성의 극대화를 추구하고 있으며,

규율과 당위로 생산성을 끌어올렸던 과거에 비해 긍정의 도식으로 자발적인 성과주체가 되어 생산성의 극대화를 도모하고 있다. 과연 창의성과 효율성의 극대화를 위하여 많은 기업이 도입하고 있는 펀경영 역시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성과주체를 만들기 위함아닌가. 그러한 사회 모든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는 사회에서 도태되고 아무것도 할수 없다고 믿는 무력한 개인은 우울증에 걸리게 된다. 어떤것도 가능하다고 전제되는 사회이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인간은 우울증에 걸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개인의 우울증 역시 시스템의 폭력아래 양산된 현대병이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개인의 의지만으로 헤쳐나갈 수 없는 이 사회에서 규율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기 착취가 되는 것이다. 성과에 매달려 자신이 자발적으로 자기자신을 착취하기에 이것을 저자는 강제된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라고 말한다.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인 현대인의 모습을 정확하게 짚어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이러한 우울증 환자들이 자신과의 전쟁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들에게 진실의 알약이라고 처방해주었으면 하지만, 프레임을 벗어나보라고 하고 싶지만, 쉽지않은 일이다. 답이 없다..

접힌 부분 펼치기 ▼

 

21세기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이행된 사회다.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가 부정성의 금지, 법령, 억압의 사회에서 긍정성, 성과위주의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을 강조하는 사회로 이행된 것이다.

"금지의 부정성, 복종적주체는 범죄자를 양산하지만, 성과적주체(자기자신을 경영하는 기어)는 우울증환자와 낙오자를 양산한다"  저자는 과거 금지와 억압의 사회에서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로 나누어 범주를 벗어난 자들은 범죄자가 되었지만, 이제는 긍정성의 과잉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긍정성들이 개인이 자기자신의 주권자가 되고 싶어하나 자기자신이 되지 못하는 자괴감으로 우울증 환자가 만들어진다는 알랭에랭베르의 말을 인용한다. 여기에 덧붙어 저자는 우울증은 자기자신의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시스템의 폭력이 있다는 것을 간과하였다는 점을 지적하며, 파편화된 개인, 인간유대의 결핍 역시 문제의 하나라고 보고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소진증후군 역시 탈진한 자아의 표현이기 보다는 다 타서 꺼져버린 탈진한 영혼의 표현해야할 것이다.'

알랭이 이야기한 주권적 인간은 실은 어떤 주권도 갖지못한 노동하는 동물에 불과하다며 자기자신을 자발적으로 착취한다고 말한다. 실로 자발적인 착취이기 때문에 그는 피해자이기 동시에 가해자가 되는 것이다.

"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아무것도 할수 없을때 발발한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이러한 자기관계적 상태는 어떤 역설적 자유, 자체내에 존재하는 강제구조로  인해 폭력으로 돌변하는 자유를 낳는다.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바로 이러한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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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심심함 -----

긍정성의 과잉은 자극, 정보, 충동의 과잉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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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죽으면 하나의 세계가 닫힌다고 한다. 그가 보는 세계를 완전히 똑같이 볼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가끔 커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눈 친구다. 거칠어 보이지만 호탕하고 잘 웃었던 친구인데... 나의 기억속에서 그를 불러본다. 니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정확하게도 모르고, 어떤 정황만을 알 뿐이다. 언젠가부터 너의 투정아닌 투정이 답답해서 들어주는 역할마저 내맘속에서 밀어냈을즈음... 너는 그렇게 외롭게 떠났구나 생각하니.. 너무 가슴이 아프다.

아직 함께할 시간들이 많은데,, 너의 곁에 많은 친구들이 있었지만, 너는 정작 얼마나 외로웠는지... 이제 추모공원에 안치한 너의 유골함은 이 추운 겨울.. 남아있고,, 너의 영혼은 벌써 이승을 떴을지도 모르겠다.. 보고싶다.. 나는 우리가 그래도 가까운 사이였다. 생각한다.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너의 그 선택에 일말의 죄책감을 느낀다... 우리모두 그렇다.

삶과 죽음이 이렇게 한끗 차이일뿐... 허무함과 두려움이 가슴속에 휘몰아쳤다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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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앞에서 다른 사람이 생각날 때 그녀는 그의 등을 찾는다. 머리 속에 있는 생각들을 스킨쉽으로 사라지기나 할 것처럼,, 그녀는 설렘과 죄책감 사이에서 밀려오는 감정을 고통스럽게 받아들인다. '너무나 행복한 우리였지만, 나를 완벽하게 채워줄 수 는 없는 것'이 지금의 사랑이라고 마고는 생각하는 것 같다. 너무나 예민한 그녀...살아가면서 그냥 울고 싶어싶어지는 그 막연한 슬픔. 마고는 자신의 그 내면의 공허를 알아봐주는 그 남자가  진짜 그녀의 남자 그녀의 사랑이 아닐까 믿게 된다. 결국 남편을 버리고,  그 사랑을 찾아 떠나고, 남편은 그런 그녀를 붙잡지 않고,, just go...  영화는 마고는 그를 찾아 함께 살게되지만,,,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다. 결국엔 나란히 앉아 TV를 보고 아무렇게나 용변을 보는 사이가 되고 만다. 사랑의 설렘의 끝에는 결국 혼자 남는다는 것...새것도 헌것이 되어버린다는 그 현실에 대하여...결국엔 혼자 흔들리고 살아내고, 그 고독을 안고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다, 그 고독의 존재를 눈치채거나, 혹은 눈치채지 못하고 익숙하게 살아가는 두 존재가 함께 걸어가는 것이 우리의 일상일 것이다.   

그녀는 이 일상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와 함께 걸어갈까.. 아니면 사랑이 식었다고  그 집에서 나오게 될까... 이제 남편은 그녀를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혼자 놀이기구를 타면서 상념에 빠진다.. 이제 혼자 걷는 법을 배우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녀의 천진하고 피곤한 매력때문에 새 사랑은 또 예기치 않게 다가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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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남히단?

 

2011년에 무슨일이 일어났던가? 내가 아는 것은 월스트릿 시위와 이집트 시위가 반자본주의에 대항하여 일어났다는 것... 그것 역시 지젝을 통해서다.

멈추고 사유하라! 지젝의 언명이다.

이제 멈추어야 하고,,, 그리고 생각해야 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 자기관찰의 사회적 확대로서 관찰이다. 고요히 보는 것이다. 과연 무슨일이 일어나는가를...

 

와 남 니히단. 무덤위에 꽃을

 

시체를 덮어버리기 위해 썼던 경구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시대의  지배이데올리기의 방식이다. 사건의 진정한 중요성을  무효화를 만든다. 하지만 2011년 일련의 사건들을 총체적 상황에 위치시켜야 한다.

- 결정적 역사적 순간은 예술과 이론이 하나로 규합되며, 체계는 현실에 들어맞는 형식적인 틀을 구축한다. 현실에 얽매인 주체들의 주관적 생각들. 진단이 그 자체의 증상이 된다.

 

주관에 의해 왜곡된 현실의 불가피함의 원인 그 자체를 무시하는 태도가 더 이데올로기적인다.

현실은 객관적일수 없다는 것을 무시하는 태도가 이데올로기적이라는 것이다.

 

- 현대 자본주의 특징과 자본주의의 지배 이데올로기

 

칸트는 이성의 공적사용, 즉 이성의 행사는 초국가적 보편성에 대해 얘기한다.

생각하고 복종하라!

자유롭게 생각한다 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는 것은 아니다. 불의에 대해서 할 수 있는 것은 통치자에게 개혁을 요구하는 것이다.

자유사상이 오히려 자유를 방지한다.

칸트는 이성의 공적사용은 중립적, 비개입적(중립적, 비개입적)

막스는 혁명적 계급의식 차이(편파적, 완전한 개인) 이성의 공적사용이 이성의 사적사용으로 후퇴하지 않고 그자체로 실용적, 효울적이 되는 입장.

사회체의 몫없는부분, 과잉이 보편성을 구현

이성의 공적사용의 보편성과 참여적이고 주관적인 입장을 접목시킨 접근만이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한 인식적 지도를 제공할수 있다.

 

2. 지배에서 착취와 저항으로

사회구성체로서의 자본주의는 구조적 불균형, 생산력-생산관계의 적대

- 현대 자본주의의 3가지 특징.

1) 이윤추구가 지대(rent)로 공유지식, 천연자원 등

2) 노동자--> 실업자

* 더오래 착취되는 것을 특권으로 생각

3) 봉급부르주아의 등장

- 다중 : 무실한 수뇌부를 제거 진정한 사회주의 도달한다고 보았으나 일반지성을 중앙계획국에 도치된 것에 불과함.

비물질노동이 지배적인 위상 차지할 때 비로소 혁명적 전복이 객관적으로 가능할 것이다.

지적노동(아이디어, 코드, 텍스트, 프로그램)

정동노동(의사, 보모, 승무원 등)

공유된 지식, 각종형태의 협력과 커뮤니케이션 등은 더이상 사유재산으로 담을 수 없다.

삶정치적biopolitical

물질적 생산--> 상징적 생산

중앙집권 위계 --> 자기조직적, 다중심적 협력,

공산주의 붕괴 : 정보혁명에 따른 새로운 사회적 논리를 수용하지 못한 정권의 무능함

벤처투자 --> 새로운 부르주아 계급은 은행, 분산된 투자자, ceo 등 잉여급여 큰 봉급부주아계급의 대두. 이들은 자신들의 높은수입을 정당화하는 유사 과헉적인 평가가 중요해졌으나,

이들의 높은 봉급은 이데올로기의 신화에 불과하다. 미국이 패권주의 이데올로기로 전세계의 자본을 빨아들이듯이 이들 역시 이데올로기로 치장 했으나, 그 근거 등은 뚜렷하지 않다.

 

잉여의 두가는 잉여급여, 또는 잉여시간으로 나눌 수 있으며, 실제 능력과 상관없이 권력과 이데올로기로 점철된 자의적 메카니즘에 불과하다.

이들은 사회적 안정을 위해 중간계급의 유지.

중국, 부르주아 계급없는 자본주의에서 부르주아 없는 관리자체계로 돌입하였으나 반 자본주의 시위로 봉급부르주아들은 잉영급여이기 떄문에 이들의 허리띠를 조를 수 있는 계급이기에 정치적 저항을 할 뿐이다. 이들의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할 위험에 저항하는 시위에 불과하지 않을까.

영국대학생폭동, 이집트소요, 그리스 봉급부르주아 하위계급이 프롤레타리아롤 전락하는 동안 최고 경영자, 은행가들은 과도한 보수를 받게 되었다. 그들의 과도한 보수는 하위직의 말도 안되는 열악한 임금 덕분이다.

 

그리스 구제금융은 은행가와 기타 전문가에게 민주주의를 억압할 기회를 부여했다. 탈정치와 테크노크라시의 모델이 될 것이다.

선거는 진정한 선택지가 아니다. 중도좌파와 중도 우파사이의 선택지 이기 떄문이며, 우리나라는 극보수와 중도보수의 대결이다.

신자유주의에 맞서 복지국가는 회귀된다.

이윤을 추구하는 재생산이라는 자본주의 기본틀을 유지하되, 글로벌 복지와 사회정의의 확정. 자본주의의 조정과 규체가 필요한 것이다.

 

정말로 자본주의라는 짐승과 함께 가는 것만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최선의 방법일까.

 

미국은 1960~70년대를 지나면서 무역흑자가 적자로 돌아섰다. 1971년 미국은 적자늘리기로 결심하고, 미국의 적자는 미국을 제외한 전세계가 메꾸게 되는데 이렇게 끌어모은 자본은 월스트리트로 들어가 대출, 주식, 금융상품으로 변화된다. 미국에 투자가 몰리는 것은 경제적요인보다 이데올로기적 군사적요인에 기인한다.

글로벌자본중의가 문화적 다양성의 찬양이라는 허울아래 과두제로 향하는 새로운 추세이다.

이제 세계는 미국을 필요로하지 않는다. 미국이 나머지 세계를 필요로 한다.

 

세계의 기싸움에서 미국에게 패한 것이 진실이 아닐까. 그들이 만들어낸 전시상황. 위기 등은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여 글로벌적인 사기행각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폭력은 행해지지 않아도 기싸움에서 밀리면 끝이다. 범죄와의 전쟁에서 하정우의 그 포스. 조직의 보스는 그가 물리적으로 강하다기보다 '기'가 문제가 아니던가.

 

3. 정치적대표의 꿈작업.

정치적대표가 결코 사회구조를 직접 반영하지 않는다.

모든 계급의 유일한 공통분모는 모든 계급에서 배설된 과잉, 쓰레기 잔여물의 보편적 대표의 매걔가 필요. 특별한 한 계급, 적극적 대표를 요구할 만큼 통일되지 못한 계급의 대표역할을 수행하는대표.

부자증세에 반대한 그들의 논리는 투자감소 때문이라고 한다. 은행에 과도한 혈세를 투입시키고나서는 경제위기를 외국인에게 투사시킨다. 계급이 두계급이라면 안정될 것이나 제3의 적대계급을 만들어 계급투쟁을 존속시킨다.

 

거대자본의 이해관계라는 실재

시재 현실을 왜곡하는 원리자체

경제적인 것이 최종심급에서 사회체계를 결정하는 역할

경제적인 것은 결코 실질적인 작인으로 직접 나카나지 않는다.

 

경제라는 중층결정적인 심급은 결코 직접적이지 않는 먼 원인으로 직접적인 사회적인과의 빈틈에 개입한다.

정채적 중핵이 없는 경제적인 것은 마르크스중의 진화역사주의적 발전 개념에서 처럼 발전의 확실한 모체가 될것이다.

반면, 경제적인 것이 제거된 순수한 정치는 이데올로기의 다름 아니다.

공적개입이 사라지고,

대다수의 삶을 규제하게 될 익명의 무제한적권력을 급진주의가 나서서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하는 지금의 지배계급의 도덕적 분노 분출을 위해 전쟁을 용인한다.

문화전쟁이 곧 전치된 양식의 계급전쟁인 것이다.

두번째로 차이를 적대로 만드는 것이 계급투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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