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회에서 지젝과 라캉주의 좌파적 입장에 대해 간단히 정리했는데, 10월을 맞아 러시아 ‘10월 혁명’에 대한 지젝의 생각을 잠시 간추린다. 우리 여정의 마지막에서 다룰 주제를 미리 맛보기로 넘겨다보는 의미도 있다.

저명한 러시아 사학자 리처드 파이프스에 따르면, 러시아혁명 시 고위직에 있었던 몰로토프는 다른 어떤 볼셰비키보다도 더 오랫동안 레닌과 스탈린 두 사람을 섬겼다. 노년에 두 사람 가운데 누가 더 ‘엄격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물론 레닌이지. 레닌이 스탈린에게 너무 부드럽고 진보적이라고 꾸짖던 일이 생각나네.”  

 

 

 

이러한 일화에서 파이프스는 스탈린주의가 레닌주의의 거부를 뜻한다는 신화는 거부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끌어낸다. 즉 스탈린주의가 광기였다면, 그것은 레닌주의의 충실한 계승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역사학자가 놓친 것을 지젝은 바로 잡는다. 그것은 ‘충실한’ 계승이 아니라 ‘현실 타협적인’ 계승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탈린주의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였다. 너무 부드럽기 때문에 진보적이진 못했던 체제였다고 할 수 있을까. ‘현실 사회주의’란 말은 달리 ‘현실과 타협한 사회주의’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어떤 타협이었나?

지젝이 자주 드는 사례인데, 1953년 동독의 노동자 봉기 때 브레히트는 <해결>(1956년 발표)이란 짧은 시를 통해서 “정부는 인민을 해산하고 다른 인민을 선출하는 것이 더 쉽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브레히트로서는 이런 발언을 통해 체제에 대한 그의 지지를 공언하면서 동시에 노동자 인민에 대한 그의 연대를 은근히 암시하는 ‘기회주의적’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브레히트식 양다리 걸치기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문제의 핵심을 건드렸다. 지젝이 보기에 실제로 “인민을 해산하고 새로운 인민을 선출하는 것”이야말로 혁명정당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즉 낡은 기회주의적 인민, 곧 ‘타성적 군중’을 역사적 사명을 자각한 ‘혁명적 몸체’로 변화시키는 것이야말로 혁명정당의 유일한 의무이다. 다만 이것은 브레히트의 판단과는 달리 가장 어려운 과제다. 그것은 마치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육신과 피로 변화시키는 것만큼이나 기적적인 일이다.  

 

 

그렇다면 스탈린주의의 과오는 무엇이었나? 그러한 사명으로부터의 후퇴라고 말할 수 있다. 전체 인민을 혁명적 몸체로 변화시키는 일 대신에 스탈린 체제는 일정한 비율의 ‘반동분자’를 색출하여 수용소에 감금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무능력을 감추고자 했다. 공포정치를 통한 거대한 수용소 국가 체제의 건설이란 다른 한편으론 자신의 ‘불능’을 은폐하기 위한 ‘완력’의 행사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과 예술 또한 이러한 완력의 도구로 활용되었다. 그것이 20세기 ‘정치적 예술’의 대표적 몰락의 사례로 지목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오류에 근거하여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는 급진적 민주주의자들은 ‘대타자’나 ‘대의’를 상정한 모든 형태의 혁명적 정치에 회의적이다. 지젝의 ‘레닌주의’나 ‘프롤레타리아 독재’ 옹호론에 대해서도 미심쩍어한다.

하지만 지젝(혹은 지젝2)의 입장은 다르다. 대중적 퍼포먼스, 혹은 집체 공연을 예로 들자면 거기에 어떤 ‘원형적 파시즘’이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파시즘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러한 명명 자체이며, 특수한 접합 효과일 따름이다. “자발성과 과도한 자유 속에서 탐닉하는 ‘방임적’ 태도는 그것을 제공할 수단을 가지고 있는 자들의 것이다.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들은 단지 그들의 기율만을 가지고 있다.” 자기 몸의 기율적 단련이야말로 부르주아 중산층의 조깅이나 보디빌딩과 달리 진정한 의미에서 노동자 계급의 이데올로기이다.

랑시에르의 <감성의 분할>(도서출판b, 2008)에 부친 발문에서 지젝이 들고 있는 사례를 보자. 때는 1920년 11월 7일, 혁명 3주년이 되는 날이었다(러시아혁명은 구력 10월 25일에 일어났으며 신력으로 환산한 날짜가 11월 7일이다). 이날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3년 전의 사건을 그대로 재연하는 ‘겨울궁전 습격’이 공연되었다. 수만 명의 노동자와 군인, 학생, 그리고 예술가들이 허름한 죽과 차, 얼린 사과들을 먹으면서 밤낮으로 준비한 공연이었다. 공연의 연출은 말레비치나 메이에르홀드 같은 당대 최고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군 장교들을 통해서도 이루어졌다. 대다수 군인들은 실제로 1917년 사건에 참여한 경력이 있었으며 페트로그라드 부근에서 극심한 식량난 속에 벌어지던 내전에 참전 중이기도 했다. 한 동시대인은 이 공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미래의 역사가는 어떻게 가장 잔혹하고 난폭한 혁명 내내 러시아 전체가 어떻게 연기했는가를 기록할 것이다.” 형식주의 이론가였던 슈클로프스키는 “삶이라는 살아 있는 조직체가 연극적인 것으로 변모되는 어떤 기초적인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라고 적었다. 이것이야말로 낭만적 예술지상주의와 무관하면서도 삶이 예술을 모방한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대중적 집단성과 기율은 단지 흘러간 과거의 일일까? 지젝이 보기엔 그렇지 않다. 피어싱부터 복장 도착, 공개적 스펙터클에 이르기까지 포스트모던적 ‘저항의 정치’야말로 정치적인 것과 심미적인 것이 결합된 사례이기 때문이다. 가장 간단하게는 피어싱이나 옷 바꿔 입기부터 플래시몹 같은 공개적 스펙터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일례로 2006년 5월 벨로루시의 루카셴코 대통령이 3선에 성공한 직후, 한 네티즌이 이에 항의하는 표시로 수도 민스크의 광장에 나와 그냥 아이스크림이나 먹자는 플래시몹 제안을 인터넷에 올렸다. 벨로루시 경찰은 이에 과민 반응하여 아이스크림을 먹는 시민 몇 사람을 잡아갔다. 하지만 단지 아이스크림을 먹었다는 이유로 잡혀가는 시민들의 사진을 네티즌들이 인터넷에 올리면서 일은 더욱 커졌다. 더욱더 많은 시민이 참여하여 다양한 형태의 플래시몹을 선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저항이 어떻게 지속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지젝이 인용하는 호피족의 옛 속담이 여기서 교훈을 준다. “우리가 기다리던 사람들은 바로 우리다.” 이것은 우리 자신을 역사적 필연에 의해 예정된 행위자로 발견한다거나 고양시켜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우리가 의존해야 할 대타자는 없다는 것을 뜻한다. “역사가 우리 편에 있다”라고 믿는 것은 기만이다. 그런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요청하는 지젝의 입장은 대타자를 부정하는 급진적 민주주의와 화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대타자의 결핍을 가시화하고 제도화하려는 급진적 민주주의와 달리 지젝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이 ‘구멍’을 ‘우리’가 채워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결정을 그는 ‘순수한 주의주의(pure voluntarism)’라고 말한다.  

 

   
 

“우리의 역사적 발전의 내적 추동력은 그대로 놓아두면 우리를 파국으로, 세계의 종말로 이끈다. 그러한 재앙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순수한 주의주의(主意主義), 다시 말해 역사적 필연을 거슬러 행동하려는 우리의 자유로운 결정이다.”(<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303쪽)

 
   

 

그러한 결정과 행동을 위해서라면, 저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의 도무지 알 수 없는 신비한 이유와 함께 단단히 단련된 체력과 강인한 정신의 근육도 필요하겠다. 이상이 호피족의 교훈을 되새겨본 짧은 간주곡이고, 우리는 다시금 물라 오마르의 교훈으로 넘어가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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