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계 사막>의 2장은 ‘재도용: 물라 오마르의 강의’란 제목이 붙어 있다. 9·11 공격 이후에 벌어진 미국의 대테러 전쟁에 관한 분석이 주된 내용인데, 물라 오마르는 탈레반 지도자이다. ‘강의’는 ‘lesson’의 번역으로, ‘교훈’이란 뜻으로 읽는 게 더 낫지 않나 싶다. 알다시피 미국의 대테러 군사작전의 암호명은 ‘무한한 정의(Infinite Justice)’였다. 오직 신만이 무한한 정의를 행사할 수 있다는 이슬람 성직자들의 비난으로 나중에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고 하지만 지젝은 이 작전명이 더없이 아이러니컬하다고 말한다. 어떤 의미에서인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무한한 정의’란 말은 중의적이다. 즉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한편으로 그것은 미국인들이 모든 테러분자들뿐 아니라 그들에게 물질적·정신적·사상적 등등의 지원을 해줬던 모든 사람들까지도 무자비하게 죽일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111쪽) 그런데 이것은 헤겔적 의미의 ‘악무한(bad infinity)’이다. 완수될 수 없고 종결될 수 없는 작전이기에 그렇다. 실제로 2002년 4월에 당시 부통령이었던 딕 체니는 테러와의 전쟁이 결코 끝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최소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는 말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정의의 행사는 또 다른 의미에서 무한한 과정이다. 지젝이 인용하는 것은 2001년 9월 데리다가 아도르노상을 수상하면서 한 연설이다. 데리다는 이렇게 말했다.  

 

“9월 11일의 희생자들한테 드렸던 저의 무조건적인 동정으로는 이렇게 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범죄에 관하여 저는 어는 누구도 정치적으로 무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을 이 사건에 연루시키고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상황(그림) 속에 포함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유일하면서 진정한 ‘무한한 정의’이기에 그렇다. 같은 시기에 탈레반 지도자 물라 오마르는 미국민을 향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네들은 당신네 정부의 말을 진실이든 허위든 받아들입니다. (……) 당신네들 스스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까? (……) 당신네들 자신의 의미와 이해를 이용하는 것이 더 나은 것 같습니다.”

 
   

 

마지막 충고는 “It would be better for you to use one's own sense and understanding”을 옮긴 것인데, ‘sense and understanding’은 ‘의미와 이해’보다는 ‘분별력과 지성’ 정도로 이해하는 게 낫겠다. 지젝이 보기에 오마르의 말은 아프가니스탄인들 자신에게도 되돌려줘야 할 ‘냉소적 속임수’에 불과하지만, 그러한 문맥에서 떼어낸다면 매우 적절하지 않느냐는 쪽이다. 그런 오마르의 충고가 곧 오마르의 교훈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사고하라는 정신분석적 교훈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2003년 말 당시 미국의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는 영국의 한 시민단체인 PEC(바른 영어쓰기 캠페인)로부터 ‘올해의 횡설수설상(Foot in Mouth)’을 받았다. 수상의 빌미가 되었던 2003년 3월의 한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There are known knowns. These are things we know that we know. We also know there are known unknowns. That is to say, there are things that we know that we don't know. But there are also unknown unknowns. There are things we don't know we don't know.”

 
   

 

‘횡설수설상’을 받을 만한 명연설(?)인데, 이 대목은 지젝도 자주 인용하곤 한다. 지젝의 분석에 따르면, 럼스펠드는 여기서 일종의 지식의 유형학을 제시하고 있다. 즉 우리에겐 (ⅰ) known knowns(이미 알고 있는 걸 아는 것), (ⅱ) known unknowns(아직 모르고 있는 걸 아는 것), (ⅲ) unknown unknowns(아직 모르고 있는 걸 모르는 것)이라는 3가지 종류의 지식이다. 그런데 이 분류에서 논리적으로 가능하지만, 최강국의 국방장관이 (무)의식적으로 억압․배제하고 있는 마지막 한 종류의 앎이 있다. 바로 (ⅳ) unknown knowns(이미 알고 있는 걸 모르는 것)이다.

지젝은 이 네 번째 앎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지식(knowledge which doesn't know itself)”으로서 프로이트적인 무의식이라고 말한다. 즉 그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부인된 믿음과 가정들이다.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부시 행정부와 미국민들에게 간과된 이 ‘타자적 앎’으로서의 ‘무의식’은 최강국의 이성, 혹은 초자아가 놓치고 있는 어떤 앎이자, 실재의 중핵이다. 그리고 <실재계 사막>은 이러한 중핵을 건드리고자 하는 책이다. 미리 앞당겨 얘기하자면,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허위적인 종언 이후의 ‘그저 그런 삶(mere life)’을 ‘진정한 삶(real life)’과 대비시킨다. ‘그저 그런 삶’은 자신의 삶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소망하는 삶이며, 자신의 기득권이 아무 탈 없이 그대로 자자손손 보존되기를 매주 기도하는 삶이다. 그것의 정치적 버전이 자유민주주의다. 지젝이 보기에 자유민주주의의 최대 관심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며,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곧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마하는 일이다. 그래서 아예 “자유민주주의는 무-사건의 당이다(Liberal democracy is the party of non-Event)”.

미국의 대테러 전쟁도 마찬가지다. 이미 20년간의 전쟁을 통해서 폐허가 된 아프간의 황무지를 다시금 최강국의 전투기들이 동원되어 폭격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던가? 애초에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고 파괴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 아프간을 국가적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공격 목표로 설정하는 데 고려됐음직하다. 지젝은 자신의 잃어버린 열쇠를 가로등 밑에서 찾고 있는 한 광인의 일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알다시피 그 사내는 어두운 골목에서 열쇠를 잃어버렸지만, 환한 불빛 아래서 찾는 것이 더 쉽다는 생각에 가로등 아래를 두리번거렸다. “미국의 폭력 이전에도 카불 시내 전체가 이미 9월 11일 이후의 맨해튼 중심가와 비슷하게 보였다는 것은 결정적인 아이러니가 아닐까?”라고 지젝은 덧붙인다. 결국 테러와의 전쟁의 요점은 무엇인가?  

 

   
 

따라서 ‘테러와의 전쟁’은 그 진정한 목표가 우리를 속여서 실제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잘못된 확신을 갖게 하려는 하나의 행위로 기능하고 있다.

 
   

 

즉 9·11이라는 외상적 사건 혹은 충격 이후에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주입하기 위한 ‘행동화’가 테러와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행동화에서 간과되는 것은 9·11이 갖는 진정한 충격이다. 이 충격은 오늘날 디지털화된 제1세계와 제3세계라는 ‘실재계의 사막’을 갈라놓는 경계를 배경으로 삼을 때만 설명될 수 있다. 그것이 지젝의 전제다. 우리가 뭔가 인위적으로 단절된 세계에 살고 있다는 인식은 어떤 불길한 행위자가 우리를 항상 위협하고 있다는 관념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편집증적 전망에서 테러와 테러리스트들은 ‘추상화’된다. 즉 구체적인 사회적-이데올로기적 네트워크에서 분리된다. 그리고 사회 환경을 환기시키는 모든 설명은 은밀하게 테러를 정당화하려는 것으로 기각된다. 그러는 가운데 등장하는 것이 자유주의적 관용의 태도다.  

 

   
 

9월 11일 이후 며칠 동안 매체들은 코란의 영어번역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이슬람 문화와 아랍문화에 관한 책들이 즉각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보도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이슬람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싶어했으며, 이슬람을 이해하고 싶어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반아랍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 이슬람에게 기회를 주려고 열망했던 사람들이라고 추측해도 무방한 일이다.(<실재계 사막>, 76쪽)

 
   

 

얼핏 긍정적인 변화로도 간주될 수 있는 이러한 태도․추세의 함정은 무엇인가. 문제는 그러한 태도가 여전히 이데올로기적 신비화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9·11 공격을 낳은 정치적 정세와 역학을 포착하는 데 실패한다. 지젝의 이어지는 설명은 이러한 실패를 교정하려는 시도로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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