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1916-1956 편지와 그림들 다빈치 art 18
이중섭 지음, 박재삼 옮김 / 다빈치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훠이훠이, 휘파람 불며 꽃송이로 장식한 소달구지를 덩실덩실 몰고 가는 사내, 달구지에 하얀 저고리 옥색 치마 입은 단아한, 혹은 하얀 젖가슴을 드러낸 아름다운 아내와 벌거벗은 두 아들을 태우고 남쪽으로 향하는 사내의 환한 얼굴에는 이중섭의 뜨거운 사랑과 맑은 예술혼이 깃들어 있다. 이는 이중섭이 외로이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꿈꾼 「길 떠나는 가족」의 행복한 환영이다. “아빠가 엄마, 태성이, 태현이를 소달구지에 태우고 아빠가 앞에서 황소를 끌고 따뜻한 남쪽 나라로 함께 가는 그림을 그렸다.”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 1916-1956》에 실린 이중섭의 편지들은 사랑해 마지않는 가족과 함께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그림을 마음껏 그리고 싶은 그의 절절한 바람 그 자체이다.

이중섭은 평생 넓디넓은 동해를 사이에 두고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했다. 일본인 아내. 광복 직후 이중섭이 살아가야 했던 시절에 한국 땅은 일본인 아내가 용기 있게 살아내기에 결코 쉽지 않은 곳이었을 뿐만 아니라 두 나라를 마음대로 오갈 수도 없었으니, 이중섭과 남덕 부부의 애틋함은 어떤 말로도 충분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중섭은 편지를 쓰면서 아내를 향한 수많은 사랑의 밀어들을 아낌없이 속삭인다. “나의 귀엽고 참된, 내 마음의 주인”, “나의 품 안에 포옥 안기는 자그마하고 귀여운 단 한 사람”, “나의 거짓 없는 희망의 봉오리”, “나의 가장 멋지고 귀여운 사람”, “나만의 엄청나게 좋은 사람”, “나의 살뜰한 사람, 나 혼자만의 기차게 어여쁜 당신”, “둘도 없는 귀중한 내 보배”, “나의 모든 점에 들어맞는 훌륭한 미美와 진眞을 간직한 천사”, “아고리의 생명이요, 오직 하나의 기쁨”, “내 마음을 끝없이 행복으로 채워주는 오직 하나의 천사”, “언제나 내 마음을 기쁨으로 채우고 끝없이 힘을 불어넣어 주는 내 마음의 아내”, “나의 최고 최대 최미의 기쁨, 그리고 한없이 상냥한 오직 하나인 현처” 이것들은 이중섭이 아내를 향해 보내는 열렬한 사랑과 찬사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아내에 대한 사랑을 담아내기에는 편지가 한참 역부족인 듯 이중섭은 사랑의 언어를 끝없이 쏟아낸다. 그렇게 수백 수천 번의 사랑을 늘어놓았어도 이중섭에게는 아내와 주고받는 눈길 한 번, 아내의 따뜻한 체온 한 줌이 더욱 필요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서도 텅 빈 병실에서 쓸쓸하게 죽어간 외로운 사내, 이중섭의 편지에는 사랑에 대한 그의 목마름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어서 그의 허락 없이 그의 편지를 훔쳐보는 나도 알 수 없는 갈증에 애꿎은 물만 계속 들이켜야 했다. 아내의 사랑스러운 발가락과 아내의 볼에 있는 크고 고운 사마귀에 키스를 퍼붓고 싶은 마음, 아내와 두 아들의 일상이 너무도 궁금해서 사흘에 꼭 한 번은 편지를 보내달라고 어린아이처럼 아내를 보챌 수밖에 없는 마음, “나의 호흡 하나하나는 열렬한 사랑의 언어라오”라고 거침없이 고백할 수 있는 마음 앞에서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치졸함으로 그 빛을 바래고 만다.

그의 편지들을 한 장 한 장 읽으면서, 나는 화공 이중섭도 만났지만 필부 이중섭과도 만났다. 그 감동적인 만남을 쉽게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여간 아쉬울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 가장 아쉬웠던 점은 이중섭의 편지 원본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일본인 아내에게 쓴 편지라 일본어로 씌어져 어차피 무슨 말인지 모르긴 할 테지만, 이중섭의 그림들보다 이중섭의 진심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실제 편지를 도판으로 실어주는 것이 독자를 위한 훨씬 세심한 배려였을 것이다. “편지지 상하좌우에 뽀뽀라는 글자 60번”과 같은 지나친 친절로 독자의 상상력을 시험하면서 염장을 지르지 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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