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구의 포구기행 - MBC 느낌표 선정도서, 해뜨는 마을 해지는 마을의 여행자
곽재구 글.사진 / 열림원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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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구가, 바다가, 노을이, 아침 햇살이, 어선이, 집어등이,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팥죽이 내 오감을 자극한다. 당장 나를 얽고 있는 일상을 훌훌 털어버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 한 권과 음반 하나를 골라 배낭에 짊어지고 남루한 여행자의 행색으로 길을 떠나고 싶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렇게 일상에서 멀어지고 바다와 육지를 이어주는 포구에 가까워질수록 짭조름한 갯내 어린 바닷바람과 눈 시리도록 푸르게 펼쳐진 풍광에 뒤에 두고 온 일일랑 까맣게 잊고, 곽재구 시인처럼 맑은 시정에만 취할 수 있을까.

곽재구는 발길 닿는 대로 우리나라의 포구들을 터벅터벅 돌아다니며 광대한 자연과 인간의 어울림을 시인 특유의 감성으로 풀어놓았다. 그의 유려한 시적 언어는 그의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을 너무나 아름답게 포장한다. 시인의 눈에 비치는 세상은 외로움과 고단한 삶까지도 고즈넉해지는가. 그가 내 눈앞에 생생하게 보여주는 해 뜨고 해 지는 바다 풍경은 내가 그와 함께 바다를 마주하고 있을 때 내게 위로와 감동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가 사라지고 나 홀로 바다를 등지고 뒤돌아보았을 때는 암담한 마음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내가 결코 외면하지 못하는 현실 건너편에 있었던 것이다. 그는 현실 너머에 있는 바다를 등질 때도 가슴에 그 바다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름답고 선하기만 한 그에게 선경 뒤에 현실을 힘겹게 견디고 있는 사람의 고단함이 보이지 않냐고 비난의 화살을 던질 수는 없다. 그는 외부인이자 여행자로서, 그리고 시인으로서 충실히 포구들을 감상했고, 그 감상으로 잠시나마 내게 충분한 위안이 되어주었다.

사람 한 명 지나가기조차 버거운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한 뼘 마당조차 없는 집들이 다닥다닥 엎디어 있는 달동네가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는 어느 외국인 건축가의 말에 정말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어도, 맛조개나 캐면서 시를 쓰고 싶다는 그가 현실에서 한 발짝 비껴나 시종일관 방관자의 시선을 보여주었다고 해도, 《곽재구의 포구 기행》에서만큼은 그의 아름다운 시정으로 현실의 고단함과 너무나 쿨하지 못한 인생이 달콤한 위안을 받는다. 어차피 그도 나도 모든 현실에 발 디딜 의무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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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10-31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평역에서'라는 그의 데뷔 시가 그렇게도 좋더니
기행문도 참 서정적으로 쓰는 것 같아요.^^

zipge 2005-10-31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정말 시인이 쓴 글 같았습니다. 이 책을 읽을 때,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많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현실을 어쩌지 못하는 나는 현실에서 홀가분한 듯한 그가 그렇게 질투날 수 없었지요. 그래서 마구 시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