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의 구두 - 하이데거, 사르트르, 푸코, 데리다의 그림으로 철학읽기
박정자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0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대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 습득의 방법이라면 단연코 '눈으로 보는 것'일 것이다. 영상과 이미지가 지배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시각적인 것'에 묻혀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회화는 철학자들에게 자주 인용되어 왔는데, 회화는 철학의 개념에 대한 이해를 도와줄 뿐 아니라 현실과 닮았으면서도 현실과 자유로운 자율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철학과 그림의 만남을 통해 후기구조주의 철학자인 푸코와 데리다, 실존주의 철학자인 하이데거와 사르트르를 살펴보게 된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통해 '재현의 재현'이라는 개념을, 쉬베의 <디뷰타의 혹은 그림의 기원>에서는 그림의 제목 그대로 '그림의 기원-드로잉의 기원'을 보여주는데, 두 그림에서 전자는 화가 자신을 재현하지 못했다는 점과 후자의 모델과 그림 사이에서의 눈멂은 서로 닮아 있다.

사르트르의 미의식은 무(無)였다. 마티스의 빨간 양탄자처럼 현실에서의 사물에는 감동이 없는 반면 화폭에 옮겨져 마티스의 그림이 되었을 때 우리는 감동을 느낀다. 현실에서는 감동이 없는 사물이 비현실이 되면서 감동을 주게 된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예술작품을 보고 감동하는 것은 그것이 무(無)를 표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의 세계를 무(無)로 만들때  미(美)가 발생한다.

하이데거는 예술의 아름다움을 '드러남'으로 보았다. 예술작품에는 진실이 들어 있기 때문인데 이 진실은 사전적인 뜻이라기보다는 '존재의 드러남'이다. 이 '존재의 드러남'을 위해 빈센트 반 고흐의 구두 그림을 예로 들어 설명하는데 구두를 신은 사람이 구두를 바라보지 않고 의식하지 않을 수록 구두 본래의 모습을 가진다. 우리가 일반적인 구두를 상상하거나 사용되지 않은 구두를 본다면 제품의 존재는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을 통해 책 초반의 그림의 기원과 눈멂에 대해 영화를 보여준다. 신화적인 모티브의 분석과 영화라는 방식 자체의 파페르곤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철학적인 기초 지식이 턱없이 부족한 나에게는 쉽지 않은 책이었다. 그림이 이해를 돕긴 했겠지만 역시 그림에 못지 않게 텍스트의 어려움이 크다. 벨라스케스의 그림처럼 직접적인 이해를 돕는 그림은 텍스트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개인적으로는 책에 언급되는 그림들이 많은데 작게라도 그림을 보여줬으면 어땠을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