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르미도르 - 전3권
김혜린 지음 / 길찾기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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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대혁명은 절대 권력, 신분 사회, 봉건 체제를 해체하고 ‘자유∙평등∙박애’ 정신에 기초한 정치혁명이요 사회혁명이요 계급혁명으로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위대한 혁명이라는 데 누구나 주저 없이 동의한다. 프랑스대혁명은 자유와 혁명 정신의 위대한 영광을 상징한다. 학창 시절, 내가 프랑스대혁명의 원인과 결과, 영향, 역사적 의의를 달달 외워야 했던 것도 그 영광만을 기억하고 기리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누구도 그 영광 뒤에 피를 흘리며 스러져간 영혼들의 상처와 아픔과 외로움에 대해서는 말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테르미도르》는 프랑스대혁명의 위대성을 찬미하기보다 그 영광을 이루기 위해, 위대한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된 무수한 살육과, 시대의 변화와 이념의 맹목성에 의해 희생된 무고한 자들의 뼛골 스미는 아픔과 지독한 외로움을 상처받은 영혼 ‘유제니’를 통해 그려냈다.

‘테르미도르’는 프랑스대혁명의 정점기였던 열월(熱月)을 의미한다. ‘자유’라는 이상을 추구했던 혁명 정신조차 광신적인 ‘혁명’에 휘둘려 점점 과격해지고 무자비해졌으며 잔혹해졌다. 혁명은 피를 불렀고, 그 피는 또 다른 피를 불렀으며, 또 다른 피는 수많은 다른 피들을 불렀다. 혁명이 내세운 고결한 이상은 피비린내 아래 근사한 허울이 되고 무고한 피까지 부르는 명분이 되었다. 혁명은 혁명 자체를 유지하려다가 혁명에 배신당했다. 그렇게 테르미도르의 반동은 시시각각 다가왔다.

유제니는 그 혁명의 미친 소용돌이 한가운데 뛰어들었다. 그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귀족이 되기 위해서 자신과 어머니를 버린 생부, 그로 인한 절망을 견디지 못하고 미쳐버린 어머니, 생부를 죽여달라는 어머니의 악다구니……. 생부에 대한 증오는 곧 귀족에 대한 분노였으며, 유제니가 단 한 번의 의심 없이 혁명 투사로서 행동대원이 되어 두 손에 피를 묻히는 것도 서슴지 않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너무도 순수한 신념이었다. 그의 때 묻지 않은 혁명 정신은 그를 극단으로 치닫게 했다. 그는 혁명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그러나 정작 혁명은 그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작은 위안조차 되어주지 못했다. 유제니는 언제나 칼날 같은 혁명의 선두에 있었지만 늘 고독했다. 늘 상처받고 있었다. 늘 아픔으로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격변의 시대가 유제니를 배반했고, 삶의 의미였던 혁명이 유제니를 배반했다. 그럼에도 마지막 순간까지 내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배반의 끝에 피어 있을 희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 시대가 급격하게 변하고 허물어질 때는 새로운 시대를 향해 무수한 배반의 꽃이 피고 진다. 그 배반의 대상은 어느 누구도 가리지 않는다. 구시대의 지배계층도, 피지배계층도 모두 희생당한다. 새시대의 영광은 그 무수한 희생 위에서야 찬란하게 빛날 수 있다. 그러기에 영광의 이면은 너무나 쓸쓸하다. 희생된 자들이 영광을 이루어냈으나 그것을 누리는 주인은 그들이 아니다. 우리는 그들을 기억해 줘야 한다. 한시도 그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테르미도르, 그것은 꽃과 길로틴이 공존하는 계절. 그리고 지금은 슬픈 울림을 남긴 채 세월의 지평으로 사라진 이름. 태양의 계절, 테르미도르. 나는 피빛의 꽃잎들이 눈물처럼 후둑후둑 지는 소리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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