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자부
윤인완.양경일.윤승기 지음 / 대원씨아이(단행본)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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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데자부》에는 윤인완의 스토리로 양경일이 그린 〈봄〉, 윤승기가 그린 〈여름〉, 김태형이 그린 〈가을〉, 박성우가 그린 〈겨울〉의 연작 네 편과 단편 변병준이 그린 〈유틸리티〉, 이빈이 그린 〈해(海)〉가 실려 있다.

그중에서도 〈봄∙여름∙가을∙겨울〉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데자부deja-vu’가 일어나게 하는 ‘환생’ 모티프이다. 데자부는 프랑스어로 ‘이미 보았다’는 뜻이다. 우리말로는 ‘기시감(旣視感)’이라고도 한다. 단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일 들이 언젠가 와본 적이 있는 것만 같은 곳,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는 것만 같은 사람, 또다시 같은 일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으로 다가올 때 우리는 ‘데자부 현상’이라고 말한다. 많은 심리학자들이 ‘데자부 현상’의 과학적인 원인이나 근거를 설명하고 있지만, 믿거나 말거나 〈봄∙여름∙가을∙겨울〉에서는 너무나 낭만적인 ‘환생’의 인연에 기인한 데자부가 네 번의 삶과 사계를 지배한다. 어느 봄밤 달빛 아래에서 한 번 맺은 지독한 사랑은 ‘인연’이라는 실바람을 타고 생(生)과 계절을 거듭하여 어느 겨울 인류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진다.

봄.

‘모든 일의 시작’ 혹은 ‘인생의 황금기’를 상징하는 봄. 673년 휘영청 달 밝은 봄밤, 파문당한 화랑 원술이 덫에 걸린 구미호 소휼을 구해 주면서, 그들의 인연이 금기된 사랑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종족을 초월한 그들의 사랑은 소휼이 사냥되면서, 여름까지 그 연이 닿지 못한 채 봄의 아른거리는 벼랑에서 다음 생을 기약한다. 화랑 원술은 신라의 명장인 김유신 장군의 아들이었으나, 화랑도의 세속오계 중 ‘임전무퇴’의 규율을 어기고 전장에서 홀로 돌아온 벌로 가문에서 영원히 파문당했다. 그 후 원술은 수많은 전공을 세웠지만, 끝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쓸쓸한 생을 마쳤다.

여름.

성장의 계절, 열정의 계절, 여름. 원술과 소휼은 1944년 여름 후쿠오카에서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윤동주와 일본 여군의관 나츠메로 녹록지 않은 인연을 다시 이어간다. 그러나 비정한 역사는 그들의 사랑을 결코 용납해 주지 않는다. 필연적인 운명에 따라 사랑을 다시 한 번 확인하지만, 1945년 광복을 앞두고 그 결실을 맺지 못한 채 여름의 끝자락에서 윤동주는 마루타로 희생된다. 일제강점기 저항시인인 윤동주는 광복을 코앞에 두고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일설에 의하면 마지막 순간까지 마루타로 생체실험을 당했다고 한다.

가을.

수확의 계절, 결실의 계절, 가을.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납시다” 마지막 순간 윤동주의 염원은 또 생을 뛰어넘어, 1995년 가을 미국의 어느 번화가에서 가수와 눈먼 여인으로 마주친다. 오로지 한국에서 발매할 첫 앨범의 운만을 알고 싶어하는 가수 앞으로, 운명은 눈이 멀었으되 전생에서 마주 본 사람만큼은 환히 볼 수 있는 여인 수잔을 보낸 것이다. 이제 한 번쯤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방심하는 사이에 그들의 세 번째 인연도 여지없이 우그러진다. 김성재의 모습이 담겨 있는 솔로 데뷔 앨범만 남겨놓고. 1995년 11월, 비운의 가수 김성재는 솔로 앨범 1집으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다가 여전히 미궁으로 남은 불의의 사고로 죽음을 맞이했다.

겨울.

생명이 얼어붙는 계절, 깊은 동면에 빠져들어 편안한 잠을 청하는 계절, 겨울. 김성재와 수잔에서도 결실을 맺지 못한 질긴 사랑은 수천 년이 지난 후에도 못다 한 전생의 연을 계속한다. 지구의 모든 문명이 사라지고 인간이 멸종한, 어느 겨울의 폐허 위에 유일한 남성 ‘환웅’과 열성 인간 ‘호’로 서로에게 어쩔 수 없는 이끌림을 느낀다. 우성 인간 ‘웅’을 통해 새로운 인류의 역사를 시작할 의무와 책임은 윤회를 거듭한 그들의 지독한 사랑 앞에 하잘것없어 보인다. 이제 그만 그들을 사랑하게 해줘,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환웅은 호된 대가를 치르고 호를 선택한다. 그들의 사랑의 윤회도 이제 안식을 얻는다.

그리고 그들을 따라 네 번의 생과 계절을 함께 사랑한 나의 힘겨운 윤회도 ‘완전한 사랑’ 앞에 편안해졌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은 각기 다른 네 편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한 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네 편의 이야기이든, 한 편의 이야기이든 작품으로서의 완결성은 뛰어나다. ‘데자부’라는 피크로 베이스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줄 네 개를 연주하는 스토리 작가 윤인완과 만화가 양경일, 윤승기, 김태형, 박성우의 섬세한 손놀림이 사랑의 깊은 울림을 만들어낸다. 그 중후한 울림에 가슴이 그만 먹먹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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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08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는 건 자유지만요, 줄거리를 다 적는 건 좀 그렇군요..

zipge 2006-02-10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줄거리도 요즘은 '스포일러'라고 하나요? 저 이야기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전부는 아닐 텐데요. 제 리뷰로 <데자뷰>를 감상하는 데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휴지 님께 해가 되었다면, 그에 대해서는 사과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