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의 불행학 특강 - 세 번의 죽음과 서른 여섯 권의 책
마리샤 페슬 지음, 이미선 옮김 / 비채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목침 두께의 소설을 단숨에 읽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때 해야 할 일들만 아니었으면 정말 그러고 싶었다. 딸 블루와 아빠 가레스는 내가 지금까지 책에서든 현실에서든 어디에서든 봐온 부녀들 중에 가장 근사한 관계였으니까. 이 소설을 읽어 나가면서 지인에게 블루와 가레스 부녀에 대한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을 때, 지인은 내 이야기만 듣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가 떠오른다고 말했다. 롤리타와 험버트를 부녀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전혀 연관시키지 못했는데, 그제야 어느 점에서는 닮았구나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중년 남자와 소녀의 여행이라는 『롤리타』의 콘셉트를 교묘히 비틀어 쓴 데뷔작(※출판사 보도자료)”이라는 문구도 보인다. 그러나 나보코프의 『롤리타』와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지금은 특별한 ‘부녀(父女)’에 대한 수다를 떨고 싶다.

가레스는 사실 평범한 아버지가 아니다. 우리 아빠를 보통 가정의 보통 아버지 기준이라고 가정해 비교하면 꽤 색다르고 신선하다. 우리 아빠는 선량하고 다정다감하며 헌신적인 남자이다. 자식 우선의 가정 이외에는 눈길 줄 데도 가져보지 못한 아빠는 대신 자식에게 당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걸었다. 그래서 자식이 먹으면 당신도 먹은 셈치고, 자식이 입으면 당신도 입은 셈치고, 자식이 아빠와는 상관없이 자기 의미와 행복을 찾아 뭔가를 누리면 당신도 누린 셈친다. 가령 우리 아빠는 당신이 읽지 않을 책이라도 그 책을 좋아하는 자식에게 사 주는 것으로 자식과 함께 당신도 읽은 셈친다. 고된 노동과 빠듯한 살림으로, 더구나 자식만 바라봤던 아빠의 삶에 자신을 위해 책을 사고 읽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는 것을 잘 알지만, 나는 아무래도 이게 가장 아쉬웠나 보다. 아빠와 책 이야기를 정신없이 나눌 수 없다는 것. 가레스에게 흥분했던 것은 그가 딸이 지겨워질 정도로 책 이야기를 나누려는 아빠였기 때문이다.

가레스의 아내이자 블루의 엄마가 진귀한 나비 표본 몇 점만 남긴 채 납득하기 어려운 교통사고로 갑자기 죽었다. 정치학 교수인 아빠 가레스는 아내의 돌연한 죽음 이후 딸 블루를 데리고 아내랑 살던 집과 하버드대를 떠나 미국 전역을 떠돈다. 다행히 가레스가 저명한 정치학자로 설정되어 있는지라 그가 가는 곳마다 일류부터 삼류까지 그를 환영하는 대학들은 널려 있다. 즉 한곳의 안정적인 월급만을 바라고 얽매이지 않아도 먹고살 걱정은 없다. 아무튼 그는 길게 잡아도 일 년을 넘기지 않고 짧으면 일 년에 두세 번까지 옮겨 다닌다. 이때 그의 원칙은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무조건 자동차로 이동한다는 것이다. 그 차 안에서 길디긴 이동 시간 동안 가레스는 블루와 함께 온갖 책들을 탐독하고 진지하게 책 이야기를 나눈다. 아빠를 따라 전학이 일상이 되어버린 블루의 진짜 교육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문학(물론 서구 중심의 목록, 이 소설의 배경이 미국이니까) 고전부터 아빠 전공인 정치학은 물론 인문학을 포함한 다양한 학문 분야의 어려운 책들, 이런 책까지 실제로 있을까 싶도록 신기하고 우스꽝스러운 제목의 책들(아마도 이런 책들은 작가가 지어낸 목록일 터)까지 섭렵한 데다가 “항상 네가 한 말에 출처를 밝히렴”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아빠에게 길들여졌으니, 블루의 시점으로 서술되는 이 소설에 다채로운 각주가 무수히 달리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단지 그 각주들이 이야기 속에 유기적으로 녹아들지 못해 이야기의 흐름에는 대체로 불필요해 보인다는 것이 아쉽다. 그래도 그것으로 아빠의 지대한 영향력 아래에 있는 블루의 강박을 드러낼 의도였다면 성공적인 장치인 듯하다. 사실 블루는 ‘파파걸’이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아버지는……”으로 시작한다. 꽤 곁가지로 흐르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특별한 책상을 선물할 줄 아는 아빠라면 나도 별수 없었을 거라고 인과관계 따질 새도 없이 고개부터 끄덕여진다.


나는 좋은 책상이 탐난다. 상판이 널찍하고 아주 두툼해서 이 책 저 책 펼쳐서 마음껏 늘어놓아도 충분하고, 웬만큼 책탑을 쌓아놓아도 휠까 봐 걱정할 필요 없는 책상. 폐업한 식당의 식기며 탁자며 의자며 사들여 말끔하게 손질해 되파는 동네 중고 물품점에서 내가 딱 책상으로 쓰고 싶은 탁자를 발견한 적 있지만 우리 집에는 그 커다랗고 묵직한 탁자를 들여놓을 공간이 없다. 특별한 디자인이랄 것도, 색다른 장식이랄 것도 없이 소박하게 상판과 네 다리가 아주 튼튼하기만 한 것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투박하지만 자꾸 쓸수록 내 움직임에 편안하게 길들여 오래된 친구에게처럼 정붙일 수 있을 텐데. 그때 두 눈 딱 감고 일단 집 안에 들였으면 어떻게든 공간이 만들어졌을까? 부족한 공간을 염두에 두고, 그 탁자 대신 다른 빈약한 원목 책상을 훨씬 비싸게 들였는데 지금도 별 마음이 가지 않는다. 아빠 가레스가 (“온갖 훌륭한 생각의 나래”를 펼치길 바라면서) 딸 블루에게 평생 쓸 책상을 선물하는 장면에 가슴이 두근거린 것은 그때 내가 놓친 책상을 내내 아쉬워하는 와중이어서일까?

“놀랍게도 내 낡은 시민 케인풍 책상에 창문 옆 구석에 놓여 있었다. 그것은 8년 전 () 내가 썼던 엄청나게 큰 르네상스풍 호두나무 책상이었다. 아버지는 숨 막힐 듯이 더운 어느 일요일 오후에 골동품상에게 이끌려서 힐리어 저택에서 열린 세일에 갔다가 이 책상을 보게 됐다. 무슨 까닭에서인지 그 책상을 봤을 때(그리고 다섯 장정이 낑낑대며 그것을 겨우 경매대 위에 올려놓았을 때) 아버지는 책상에 앉아 있는 내 모습만 떠올렸다고 한다(나는 그때 팔을 펼쳐도 책상 너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여덟 살짜리에 불과했다). 그는 액수를 끝내 밝히지 않았지만 거액을 지불했고 매우 자랑스러워하며 이것은 “내 딸 블루가 온갖 훌륭한 생각의 나래를 펼칠 책상”이라고 선언했다. () 책상을 두고 떠나야 했을 때, 나는 정교한 맹금 발톱 다리와 각각의 열쇠가 필요한 서랍이 일곱 개 달린 거대한 책상을 두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마구간에 검은 조랑말을 두고 떠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엉엉 울며 아버지를 파충류라고 불렀다. () “그런데 그것을 다시 사서 배송하는 데 얼마나 들었어요?” () “600달러 들었다.” () 아버지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알았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 또한 책상 밑을 살피다 보니 한쪽 다리에 작은 빨간색 가격표(1만7000달러)가 아직도 붙어 있었다.”

아빠 가레스에게 후한 점수를 준 것은 그가 딸을 위해 준비한 책상이 고가의 근사한 앤틱 가구이기 때문은 아니다. 책상이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할 수 있는지, 얼마나 특별할 수 있는지, 그 책상에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시작될 수 있는지 알았다. 그리고 딸은 이제 스스로를 책임지며 주도적으로 살아가야 할 시기에 돌입했다. 뭔가를 읽고 쓸 때뿐만 아니라 생각하고 궁리하고 고민할 때마다 무수히 마주 앉게 될 책상이니만큼 특별한 책상을 선물해 주고 싶은 아빠의 그 마음이 소중하다.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이 책상이 아빠의 마지막 선물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으면 더욱 애틋해진다.

블루는 이 책상 앞에서 미심쩍은 죽음(엄마의 교통사고) 한 번과 사고사 혹은 자살로 위장되는 살인 두 번과 아빠의 증발 사이에 빈 이야기를 메워나간다. 연결 고리가 헐거워 보이는 이 사건들의 열쇠는 가레스의 정체이다. 가레스가 딸 블루에게 한사코 숨긴 비밀과 닿아 있는. 그리고… 절대적인 신뢰로 아빠에게 밀착되어 있었던 블루가 드디어 아빠의 사고 범위를 벗어나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기 시작한다. 이지적인 혹은 문학적인 분위기〔‘불행학 특강(Special Topics In Calamity Physics)’이라는 제목 아래 고전과 소설을 포함한 책 36권의 제목을 빌린 36강과 기말고사라는 커리큘럼 형식부터 무수한 각주까지(각 강의 제목으로 제시된 책이 이야기에 직접 언급되지는 않는다. 그 책이 각 강을 읽기에 앞서 필독서라고 말하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야기의 분위기는 짐작해 볼 수 있겠다)〕와 추리소설 같은 분위기가 이 소설에 독특한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흥미를 높여주긴 하지만, 이 소설은 결국 아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딸이 자기 눈으로 세상과 마주하는 성장소설이다. 바로 그 점이 긴 이야기와 여러 결점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충분히 매혹적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책장을 계속 넘기게 만든다. 처음 마주하는 세상이 배신투성이일지라도 오롯이 자기 눈으로 세상의 기만까지 직시한다는 것은 멋지고 용감한 일이다. 언제까지고 동화 속에서 살 수는 없다. 각색되지 않은 동화는 없다고 단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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