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월은 붉은 구렁을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초판본에는 별로 연연하지 않지만(쇄를 거듭할수록 내용의 오류가 조금이라도 더 바로잡히지 않겠는가) 절판본에 대한 집착에는 헤어나지 못하겠다. 더 이상 서점에서 새 책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시간에 읽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헌책방이 있다지만 책값을 온전히 지불할 의사가 있어도 그 책이 없기 쉽다. 이젠 읽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 조바심이 절로 나서 더 읽어보고 싶어진다. 마치 그 책을 읽기 위해 지금껏 살아왔는데 눈앞에서 부주의하게 기회를 잃어버린 것 같아 분하다. 그 책은 아마도 당장 읽을 수 없는 책에 대한 탐욕스러운 환상을 둘러쓰고 실제보다 더 굉장한 이야기로 애서가들 사이에 무성한 입소문을 뭉게뭉게 피워 올릴 것이다. 사사키 아타루는 어떤 책도 진실로 읽을 수는 없다고, 그렇지만 만의 하나 읽으면 미친다고 말했지만, 어쨌거나 시쳇말로 그 책을 ‘득템’하여 내 책장에 들이기 전까지는 입소문에 불안하게 휘둘리며 입에 침이 바짝바짝 마른다.

온다 리쿠의 『삼월은 붉은 구렁을』에는 그런 전설의 절판본이 등장한다. 성별도, 나이도, 유명인․무명인인지도 알려지지 않은 어느 작가가 딱 200부만 자비로 지인들에게 나눠줬다가 곧바로 절반가량 도로 거둬들였다는 소설책. 게다가 붉은 표지에 작가 이름도 없이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라는 묘한 제목만 검게 박힌 이 소설에는 이상한 조건이 붙어 있다. 작가를 밝히지 않을 것! 사본을 만들지 않을 것! 이 소설을 빌려주고 싶으면 (책 주인의) 단 한 사람의 친구에게만 단 하룻밤만 빌려줄 것! 첫 번째와 두 번째 조건이 지인들의 우정과 신뢰로 완벽하게 지켜진다고 가정하면, 세 번째 조건, 즉 일종의 대여 규칙에 따라 이 세상에서 《삼월은 붉은 구렁을》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많아야 200여 명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읽지 못하지만 나만은 읽었다는 자부심, 나는 읽었지만 두 번은 읽을 수 없다는 아쉬움, 누군가는 읽었는데 나는 읽을 수 없다는 부러움은 그 책의 실체와 상관없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덧입힌다. 어쩌면 그 소설은 이제 더는 아무도 읽을 수 없다는 신비주의 전략에 따라, 독자들의 끝없이 부풀려지는 환상과 조금도 채워지지 않는 탐욕 속에 고여 있을 때만 그 존재 가치가 눈부실지 모른다.

『삼월은 붉은 구렁을』은 똑같은 제목의 전설적인 소설책이 등장하는 이야기 4편이 옴니버스 구성을 이룬다. 미리 말한 《삼월은 붉은 구렁을》의 가장 기본적인 정체는 공유하지만, 각각의 독립적인 에피소드에 맞춰 조금씩 다르게 변주된다. 「기다리는 사람들」은 《삼월은 붉은 구렁을》의 네 가지 이야기라고 짐작되는 내용을, 「이즈모 야상곡」은 그 소설을 썼다고 짐작되는 작가를, 「무지개와 구름과 새와」는 그 소설을 쓰게 된 계기라고 짐작되는 비화를, 「회전목마」는 그 소설을 지금 쓰고 있는, 온다 리쿠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작가의 머릿속을, 흥미롭고 재미있는 에피소드 속에 잘 버무려놓았다.


아무튼 개인적인 취향으로 4편의 연작 중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는 「기다리는 사람들」과 「이즈모 야상곡」이다. 「기다리는 사람들」에는 활자중독증 건축가가 읽어치운 대로 던져놓은 책 더미가 방방마다 가득한 대저택이 있다. 그 저택에서는 오로지 “책을 읽는 인간과 읽지 않는 인간”으로 사람을 분류하는 회장의 초대로 해마다 3월이면 책의 무덤 같은 엄청난 책 더미들 사이에서 《삼월은 붉은 구렁을》을 찾는 게임이 벌어진다. 그곳에 초대되는 사람들은 우연한 기회에 《삼월은 붉은 구렁을》을 전부, 혹은 일부 읽었다는 회장의 지인 세 사람, 그리고 이력서의 취미란에 ‘독서’라고 적은 직원들 중 무작위로 한 사람. 이 에피소드의 대부분은 회장과 그의 세 지인이 각자 《삼월은 붉은 구렁을》과의 신기하고도 기이한 인연을 들려주면서 그 줄거리를 ‘취미가 독서’인 직원에게 소개하는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역시 4부작인 《삼월은 붉은 구렁을》의 1부는 ‘바람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흑과 다의 환상>, 2부는 ‘밤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겨울 호수>, 3부는 ‘피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 4부는 ‘시간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새피리>이다. 온다 리쿠의 4부작과, 그녀의 소설 속 익명의 작가가 쓴 이 4부작은 교묘하게 교차되고, 나중에 <흑과 다의 환상>은 또 다른 장편소설 『흑과 다의 환상』으로, 「회전목마」의 ‘미즈노 리세’ 이야기는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와 『황혼녘 백합의 뼈』로 확장된다.


「이즈모 야상곡」에는 책을 만드는 사람, 편집자가 등장한다. 아빠한테 하룻밤 빌려 읽은 《삼월은 붉은 구렁을》을 잊지 못한 편집자 도가키 다카코는 그 작가가 분명하다고 짐작되는 사람을 찾아 이즈모까지 기차 여행을 한다. 이 여행길에 성격도, 외모도, 출판사의 출간 경향도 다르지만 독서 취향은 비슷한 또 다른 편집자 에토 아카네가 동행한다. 야간 기차 침대칸에서 밤 깊도록 두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들 중 대부분은 《삼월은 붉은 구렁을》과 그 작가가 차지하지만, 이 에피소드에서 등장인물의 직업이 편집자인 만큼 책과 편집자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섞여들어 있다. 편집(자)에 대한 책은 얼마든지 있다. 그 책들을 가득 채운 편집자로서의 의식과 철학과 확신이 부럽고도 신기하다. 그 근사한 말들이 다 어디에서 흘러나오는 것일까? 온전히 독자일 때만 얼마든지 수다를 늘어놓을 수 있는 나는 오늘도 그 괴리감을 어쩌지 못하겠다.


그런데 『삼월은 붉은 구렁을』을 다 읽는다고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 감춘 비밀이 속 시원하게 드러날까? 절대 아니다. 모든 것이 짐작일 뿐이다. 게다가 앞의 에피소드에서 확신했던 것이 뒤의 에피소드에서는 변형되기도 한다. 어쩌면 진실은 온다 리쿠의 손아귀마저 벗어나 안드로메다 저편으로 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여전히 제목의 의미조차 종잡지 못하겠다. 온다 리쿠는 애매하고 모호한 장치들을 모아서 신비로운 환상으로 거듭나게 하는 영리한 마술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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