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상페
장 자크 상뻬 지음, 허지은 옮김 / 미메시스 / 201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르네 고시니와 함께 작업한 꼬마 니콜라가 아니었다면 장 자크 상페가 처음부터 그리 친근하게 다가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페의 검은 펜 끝에서는 니콜라도, 니콜라의 친구도, 니콜라의 엄마와 아빠도, 니콜라의 선생님도 모두 익살맞고 다정하고 사랑스럽게 종이 밖으로 튀어나온다. 상페가 그 모습을 부여한 캐릭터들이 부담스럽지 않게, 오히려 친밀하게 느껴지는 것은 몇 번의 슥삭슥삭과 사각사각을 거치기만 하면 누구의 연필 끝일지라도 금세 나타날 것 같기 때문이다. 상페의 그림들은 심심함을 달래려고 공책이나 수첩 한 귀퉁이에 장난삼아 낙서했을 법한 그림이기에 차라리 독자에게 공감과 웃음과 위안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만약 상페가 이상적인 육체의 황금비에 따라 극사실적으로 정교하게 데생하고 섬세하게 채색하여 누구도 감히 논평할 수 없는 명화를 그린다면 우리는 단지 멀찍이 떨어져 그에게 경의를 표하기만 했을 것이다.

사실 삽화로만 상페를 만나왔을 뿐 『뉴욕의 상페』처럼 일종의 정식 작품집으로는 이번이 처음이다. 『뉴욕의 상페』에는 1978년부터 2009년까지 『뉴요커』 표지화로 실린 상페의 그림들 150여 점을 모아놓았다. 상페는 마르크 르카르팡티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에게 『뉴요커』가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상페는 “아주 오래전부터 동경한 잡지”라고 말하면서 지인을 통해 『뉴요커』의 표지에 자기 그림을 싣게 된 일을 추억한다. “『뉴요커』가 채택하는 그림이 『뉴요커』 표지화의 요건”이라고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이 대답하는 『뉴요커』에 아직 존재감이 미약한 프랑스 청년이 표지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 얼마나 대단하고 흥분되고 격앙하여 불안하기까지 한 일인지, 상페는 아직도 그때의 “미칠 것 같은 기분”을 생생하게 떠올린다. 그렇다면 『뉴요커』는 어떤 잡지일까? 1925년 로스 부부에 의해 창간된 이래로 당대 최고의 지성인과 일러스트레이터가 참여하여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통해 미국과 뉴욕의 문화에 대한 풍자적, 해학적, 독창적인 담화를 주도하고 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존 업다이크,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필립 로스, 트루먼 카포티, 앨리스 먼로, 무라카미 하루키 등이 필자로 참여했다니 두 눈이 다 휘둥그레질 정도이다.

그런데 그 자부심 강한 이름은 여기저기 많이 얻어들었지만 잡지의 실물을 제대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뉴요커』와 상페가 어떻게 어울릴지 상상하지 못했다. 다행히도 창간 이래로 그 디자인이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는 『뉴요커』 표지도 나란히 실려 독자의 무지와 빈약한 상상력을 보완해 준다. 상페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뉴요커』에 관해 더 많이 떠들어대긴 했지만 상페의 그림은 여전하다. 간결한 선, 투명한 색채, 화폭을 차지하는 풍경과 인간의 반비례, 숨 쉬는 여백, 때론 뜨끔하지만 따뜻한 미소로 마무리되는 유머, 숨은 이야기가 상페 특유의 그림들 속에서 서정적인 정취와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평범하고 소박하고 고단한 일상이 ‘상페’라는 필터를 거쳐 화폭에 투영되면 연민과 위안과 공감으로 반짝거린다. 그림의 감동을 글로 재현한다는 것은 평범한 필력을 지닌 나에게 거의 불가능한 일이므로 상페의 그림에 대한 세부적인 묘사는 포기한다. 특히 좋아하는 몇몇 그림에 대한 인상기 정도는 남겨두려 했지만, 이제 와서 책장을 팔랑팔랑 넘기니 그런 그림들이 너무 많아서 마음의 선택조차 갈팡질팡 쉽지 않았다.

대신 『뉴요커』 표지화 작업 중 에피소드 가운데 폭소를 멈출 길 없었던 일화를 하나 기록해 둘까 한다. 『뉴요커』는 ‘『뉴요커』 표지화의 요건’ 혹은 ‘미국적인 그림’ 같은 것은 밀쳐두고 상페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라고 말했지만, 그 말은 화가가 어떤 구애도 없이 자유롭게 그림의 주제나 소재를 선택하고 마음껏 자기 재능과 상상력과 창의력을 펼치도록 배려한 것이다. 아무리 ‘상페다운’ 그림도 ‘역, 창문, 가로등’ 같은 사소한 부분들은 『뉴요커』의 발행 장소에 맞도록 무수히 수정해야 했다. 상페는 그림을 고쳐달라는 『뉴요커』의 모든 요구를 아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이 몇 번이나 되풀이되든 수정에 최선을 다한다. 화가 자신의 전시회에 걸릴 그림이 아닌 이상 책이나 잡지에 들어갈 그림을 의뢰받았다면 그 그림을 직접 그린 사람이 화가일지라도 그것은 ‘공동 작업’의 결과물이다. 상페의 겸손한 태도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림의 수정을 애꿎은 ‘자존심’과 결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뉴요커』 사장이었던 윌리엄 숀과의 일화는 더 재미있다. 숀은 그림 속 남자의 팔이 거슬린다는 이유로 상페에게 열 번이나 수정하도록 요구한다. 상페는 묵묵히 고치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종이가 너무 얇아져 더 이상의 수정이 불가능해졌을 때 남자의 팔을 원래대로 되돌려놓는다. 숀의 반응은 어땠을까? 그는 그제야 만족스러워했다! 사실 이런 일은 얼마나 비일비재한지! 그럴 때마다 나는 소모적인 토끼 훈련의 부당함과 변덕스러운 안목의 뻔뻔함에 울분을 토했는데, 상페는 여전히 숀을 신뢰하며 최고의 잡지를 만들기 위한 착각을 너그럽게 이해한다. 숀이 자신보다 더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으니까. 그렇다, 책임의 크기가 원천적으로 다른 것이다! 물론 자기가 최종적으로 결정하고도 그 책임은 모두 떠넘기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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