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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는 날마다 축제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주순애 옮김 / 이숲 / 2012년 1월
평점 :
『파리는 날마다 축제』는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미국 문학의 대가라는 위대한 명예를 얻기 한참 이전, 프랑스 파리에 체류하면서 이제 막 소설가로 자리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젊은 날의 이야기이다. 이 회고록을 써 내려간 시기는 헤밍웨이가 1961년에 엽총 오발 혹은 자살로 추정되는 불시의 사고로 죽기 4년 전쯤인 1957년 가을부터 1년 전쯤인 1960년 봄까지이다. 이 집필 시기에 자꾸만 눈길이 머무는 것은 만년에 헤밍웨이가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인과 바다』라는 걸작으로 1953년에는 퓰리처상을, 1954년에는 노벨문학상을 거머쥐며 작가의 명성에서도, 경제적인 부(富)에서도 남부러울 것 없이 누렸던 헤밍웨이가 생애의 마지막 시절 우울증을 앓으면서도 가장 행복했다고 절절하게 떠올린 시간이 하필이면 가장 가난했던 시절이라니.
헤밍웨이의 『파리는 날마다 축제』를 읽기 이전에 나는 인생의 굴곡과 거리가 먼 삶을 대체로 편안하게, 비교적 풍족하게 누려왔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별 고비 없이 살아가리라고 순진하게 믿었지만, 자기 보호막 정도는 스스로 쳐야 하는 단계의 인생에 이르면 삶은 언제나 예측 불허. 『파리는 날마다 축제』를 읽은 이후에 나는 처음으로 굴곡이나 고비, 혹은 역경 같은 단어들로 표현되는 쓴맛에 무방비로 노출됐다. 그 시기가 공교롭게도 이 책의 첫 장을 펼치고 끝 장을 덮은 때와 맞물렸다.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작가의 풋내기 시절 사생활을 들여다보는 재미(스콧 피츠제럴드, 에즈라 파운드, 제임스 조이스, 실비아 비치와의 교류 등)에만 한가롭게 빠져 있었는데, 헤밍웨이가 죽음을 맞으면서 자기 인생의 가장 행복한 시간으로 가장 가난했던 시절을 회상했다는 사실에 이제 나는 내 희망을 걸고 있다. 어쩌면 나에게도 조금 가난해진 오늘을 행복하게 추억할 날이 언젠가는 오리라는 것을 말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헤밍웨이는 『와인즈버그, 오하이오』를 쓴 작가 셔우드 앤더슨의 권유로 프랑스 파리에서 문학 수업을 받기로 한다. 그는 갓 결혼한 아내 해들리 리처드슨을 데리고 《토론토 데일리 스타》의 해외 통신원으로 1921년 말부터 1926년까지 5년여 동안 파리에 머문다. 토론토 신문사의 원고료에 기대어 생활할 때도 작업실을 덥힐 장작 한 단을 선뜻 사기가 부담스러웠으며, 독서광이었지만 책 한 권조차 마음 내키는 대로 구입할 여력이 없어서 실비아 비치의 ‘셰익스피어 & 컴퍼니’에서 빌려 읽었다(심지어 도서 대여를 위한 등록보증금마저 수중에 없었다!). 자기 글에 집중하기 위해 기사 원고료를 내팽개쳤을 때는 약간의 식비를 아끼려고 점심에 초대받아 멋진 식사를 했다고 아내에게 거짓 너스레를 떨었다. 헤밍웨이가 청춘을 추억하는 문장들에는 그 시절의 궁기가 고스란히 스며 있다. 하지만 그 궁기는 과거의 무수한 사실들 중 하나를 무심히 드러낼 뿐 그로 인해 비참하거나 남루하거나 좌절하거나 주눅 들지 않는다.
가난해도 사랑하는 첫 아내 해들리와의 신혼 생활은 조금도 구차하지 않다. 실제로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헤밍웨이의 기억 속에서 그들은 가난 때문에 징징거리지도, 질척거리지도 않고 서로에게 유쾌하고 산뜻하며 자족한다. 센 강변을 따라 함께 산책하면서 셰익스피어 & 컴퍼니에 들러 책을 빌리고, 없는 돈으로 경마에 운을 시험했다가 몽땅 날려도 다음에 둘 중 누군가 속내를 비치면 또다시 선뜻 따라나서고, 어쩌다가 경마에서 행운을 잡으면 고급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식사를 즐기고, 엉뚱하게도 부부가 똑같은 머리 모양을 만들기 위해 남편은 기르고 아내는 자른 뒤 파리에서 유행하는 머리 모양이라고 눙친다. 사실 그리 대단하고 인상적인 추억 거리랄 것은 없는데도 그토록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읽다 보면 그 사소한 행복의 빛이 이상하리만치 찬란하게 아른거린다.
무엇보다 가난해도 훌륭한 글과 문장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흔들리지 않고 작품을 성실하게 구축해 나가는 열정도 수그러들지 않는다. 헤밍웨이의 집필 작업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규칙적으로 행해진다. 오전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 “한 대목을 완성하기 전에는 중간에 일을 멈추지 않았고, 또 다음번에 쓸 내용을 미리 생각해 둔 다음에야 그날 일을 끝냈으며”, 오후에는 뤽상부르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헤밍웨이는 글쓰기에 진척이 없으면 ‘수사적인 표현, 과장된 문장, 미사여구’를 모두 지우고 “가장 진실한 문장”을 집요하게 찾아들었다. 글로 장황하게 “설명”하기보다 오히려 “생략”을 통해 남겨진 내용을 강화하고 독자에게 단순한 이해 이상의 깊은 울림을 주려고 애썼다. 또한 헤밍웨이는 장편소설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는 “소설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조금씩 긴 글을 쓰는 훈련을 꾸준히 했다. 모든 작품들이 호평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명실상부하게 미국, 아니 세계 문학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새긴 대작가인 헤밍웨이가 자기 재능을 과신하지 않고 부단히 연습했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후대 문학가들이 선망하고 연구하는, 헤밍웨이의 간결하고 건조하며 강인한 ‘하드보일드’의 정제된 문체가 천재성으로 거저 얻어진 게 아니었던 것이다.
지독한 가난은 헤밍웨이에게서 아무것도 퇴색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모든 것이 이루어진 말년에 헤밍웨이는 가난 속에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파리 시절로 끊임없이 돌아가고 싶어 한다. 가난했으되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들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청춘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나의 청춘’은 언제나 ‘지금의 나’보다 과거에 존재한다. 훗날 나는 아마도 ‘지금의 나’를 떠올리면서 ‘나의 청춘’이라 기억할 것이다. 가난은 헤밍웨이에게서 그러했던 것처럼 내게서도 아무것도 퇴색시키지 못할 것이다. 나는 지금 가장 행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