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빨간 거짓말 - 카네기 메달 수상작 미래인 청소년 걸작선 10
제럴딘 머코크런 지음, 정회성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내가 처음 책에 매혹당한 것은 어린 시절에 내가 가지지 못한 책을 먼저 가진 친구를 질투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책만 펼치면 언제고 이야기가 툭 튀어나온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내게도 어김없이 그 마력을 발휘해서 이야기의 세계에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좀처럼 되돌아 나오기가 힘들다. 이야기가 책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나온다면, 그 사람은 치명적인 마력을 발휘하여 좌중을 이야기 속에 가둬버린다. 이야기꾼이 위험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크리스티안 뫼르크는 『달링 짐』에서 아일랜드 샤너시(이야기꾼)를 등장시켜 그 위험을 경고했다. 하지만 제럴딘 머코크런은 『새빨간 거짓말』에서 이야기의 순기능을 따뜻하게 부각한다.

MCC 버크셔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한 『새빨간 거짓말』의 이야기꾼은 권선징악으로 귀결되는 이야기들을 들려주면서 청소년 소설답게 계몽을 유도하고 교훈을 남기지만 다행스럽게도 노골적인 훈계나 설교를 통하지는 않는다. 그는 그저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다. 바로 지금 눈앞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인 것처럼 생생하게, 아니 그보다 더 사실적으로. 그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강하게 부정하면서도 어느새 “사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MCC 버크셔는 도서관에서 에일사 앞에 불쑥 나타난 후 에일사네 ‘포비 골동품점’에 무보수 판매원으로 얼렁뚱땅 눌러앉는다. 그는 남편 없이 혼자 골동품점을 꾸려가는 에일사네 엄마 포비 부인을 도와 쓸모없는 고물이라고 해도 무방할 골동품들을 팔기 시작한다. 양심 바른 포비 부인이 헐값에라도 차마 팔아치우지 못하는 고물도 추억과 사연과 유서가 깃든 골동품으로 둔갑시키는 그의 장사 수완은 오로지 ‘이야기’뿐이다. 어쩌다 손님이 찾아들면 하릴없이 책에 코를 박고 있던 그는 고개를 들고서 그 손님이 관심을 보이는 골동품의 신비한 내력을 풀어내기 시작한다. 그 마법의 시작은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다. 이 말에 솔깃하여 문을 박차지 않고 의자에 앉는 순간 손님도, 에일사도, 포비 부인도 그가 잣는 이야기의 그물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그런데 신기한 점은 MCC 버크셔가 손님 각각을 위한 맞춤형 이야기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마치 어떤 손님이 찾아올지 미리 알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이 내밀한 마음의 문을 두드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고물인 골동품을 그에게만은 보물로 간직하게 한다. 이것이 그의 정체를 암시하는 유일한 실마리다. 버크셔의 정체는 줄곧 의문투성이다. 그가 이야기로 손님을 하나씩 매혹할 때마다, 그의 거짓말을 들킬까 봐 조마조마해하는 에일사와 포비 부인에게 거짓말이 아니라고 맞설 때마다, 거짓말 같은 그의 이야기가 사실이었음을 증명해 주는 증거가 속속 드러날 때마다 MCC 버크셔의 정체에 대한 호기심을 커져만 간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마치 픽션의 작가처럼. 픽션은 엄밀히 허구로 채워져 있지만, 픽션의 세계 안에서는 허구조차도 진실성으로 빛난다.

“그들은 나한테서 도망쳐 버렸어. 내 소설의 인물들 말이야. 나는 그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어. 너도 그들이 말하는 걸 들었지? 그래, 그들은 이제 모든 것을 알아버렸어! 나에게는 그 세계가 현실로 느껴져!” MCC 버크셔는 자신이 실존하는 세계와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넘나들면서 어느 세계가 현실인지 혼란스러워한다.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낸 인물들이 자기 의도와 다르게 살아 움직인다는 것에 분통을 터뜨린다. 이 대목은 아주 의미심장하다. 어디에서 들은 이야기인지는 분명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작가는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들을 통제하려 하지 말고 그 캐릭터들이 스스로 생동감 있게 행동하여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도록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버크셔는 그 사실에 아주 당황했지만, 그것은 그가 최고의 캐릭터들을 만들어냈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마지막 반전으로 제시된 MCC 버크셔의 정체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가 휴지통 속에 안경 하나로 남겨진 결말은 다소 반전을 위한 반전처럼 억지스럽다. 그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자신이 창조한 세계에 갇혀버린 것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할까? 제럴딘 머코크런은 자신이 작가이면서도 MCC 버크셔라는 또 다른 작가를 내세워, 그가 창조한 캐릭터들에게 직접 개입시킴으로써 이야기의 층위를 다채롭게 구성했다. 작가가 어떻게 자신의 캐릭터들과 관련을 맺고 이야기를 만들어가는지 보여주려고 애썼지만, 그 굉장한 의도에 비해 결말은 다소 엉성하고 작위적으로 다가와 아쉽기 그지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