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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낭만 탐닉 - 예술가의 travel note를 엿보다
세노 갓파 지음, 송수진 옮김 / 씨네21북스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여행에 관한 책은 내 눈에 별로 들지 않는 편이다. 여행 자체를 크게 즐기지는 않아 여행정보서를 살 일은 거의 없다. 여행지를 감각적으로 찍은 사진들이 절반 이상 차지하는,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너무나 감상적인 요즘의 여행 에세이들도 좋아하지 않는다. 특수 임무를 띠지 않는 한 모든 여행은 사적이기 마련이지만, 어떤 식견도 통찰도 없이 화려한 사진들을 과하게 펼쳐놓은 사이 빈약한 글들이 양념처럼 더해지는 ‘넌 어디까지 가봤니? 난 여기까지 가봤다’ 식의 내용에는 조금도 끌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등에 커다란 베개를 괸 채 즐거운 기분으로 『유럽낭만 탐닉』을 펼쳐 든 것은 ‘세노 갓파’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작업실 겸 책 빌딩에 그 유명한 고양이를 그려 ‘고양이 빌딩’으로 불리게 한 장본인이 바로 그였다.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에는 다치바나의 빌딩에 고양이를 그리게 된 세노 갓파의 짧지만 재미있는 글(「다치바나 씨의 ‘고양이 빌딩’ 전말기」)과 함께, 다치바나가 책을 어떻게 분류하여 보관하고 있는지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는 그의 고양이 빌딩 내부 조감도가 실려 있다. ‘갓파(河童, 일본 민담에 등장하는 아이만 한 물의 요정으로 거북이 등딱지를 가진 개구리 모습을 하고 있다)’라는 독특한 이름이 기억에 남았었는데, 역시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도 포함되어 있는 『작업실 탐닉』이라는 책으로 완전히 반하고 말았다. 그런 그의 스케치 여행이라면 뭔가 색다른 풍경들을 담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이 높아진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별다른 의식 없이 평범하게 받아들이는 것들을 특별하게 바라보는 재주를 가진 사람이다.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것이 그의 눈을 통과하면 가장 특별한 것으로 변하는 마법이 그의 손끝에서 이루어진다.
세노 갓파는 1971년에 무대미술 공부를 위해 일 년 동안 국비 지원으로 유럽을 여행하면서 그에게 흥미롭게 다가왔던 유럽의 인상들을 짧은 메모와 스케치 들로 남겼다. 그저 “호기심 많은 사람이 유럽 곳곳을 돌아본 지극히 개인적인 기록”일 뿐이라 처음에는 출판을 거절했던 이 여행 기록들이 1976년에 드디어 책으로 엮어 나왔는데, 『유럽낭만 탐닉』은 바로 그 번역서다. 40년 전이라면 내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인데, 해외여행도 흔치 않았던(일본의 사정은 달랐을지도 모르지만!) 그 시절에 이미지(스케치) 중심의 유럽 여행서가 일본에 이미 존재했다는 사실은 놀랍다. 사실 나에게는 그다지 반가운 일이 아니지만, 지금이야 이미지가 과도하게 넘쳐나는 책들이 이리저리 발에 채일 정도로 많지만, 그에 비해 우리나라 출판의 역사에서 성인 단행본의 경우 독자의 이해를 돕고 흥미를 높이기 위해 책장마다 빽빽하게 들어찬 글자들 사이에 이미지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젠 실용 목적을 완전히 상실한 이 오랜 여행책을 찾는 일본 독자들이 아직도 꾸준하고 우리나라에까지 번역됐으니, 그것이 세노 갓파의 저력일 것이다.
『유럽낭만 탐닉』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은 세노 갓파가 머물렀던 방들의 도면과 조감도 스케치다. 그는 각 나라별 호텔 방의 구조에 관심이 많았는데, “갓파 씨는 천장에 올라가지도 않고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죠?”라고 한 호텔 보이가 궁금해할 만큼(나도 감탄을 연발하며 똑같이 품었던 의문!) 그가 집요하리만치 남긴 그 흑백 스케치들은 방의 정경을 상상하게 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 스케치들을 나라별, 도시별로 모아 보면 각 방들의 특색이 선명하게 나뉜다는 사실이다. 그가 특히 주목한 것은 ‘비데’의 유무였는데, “라틴계의 나라*에 가면 방에 화장실은 없어도 비데는 꼭 있다”고 말한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같은 스위스에서도 취리히 같은 독일권에는 비데가 없지만 제네바 같은 프랑스어권에는 비데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예산이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늘 고급 호텔에 머물 수 없었던 점들을 감안하더라도 그가 머물렀던 방들을 들여다보면서 궁금증이 일었던 것은, 욕조는 차치하고 샤워기와 세면기와 변기가 구비된 화장실이 딸린 방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세면기(와 라틴 문화권의 비데)는 침대, 옷장, 탁자, 의자 같은 기본적인 가구들과 함께 방 안에 설치되어 있었다. 씻기 위한 별도의 공간이 있기는커녕 칸막이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은 곳들도 많았다. 그 물기와 습기는 어쩌나 걱정될 정도였다. 그러나 세노 갓파는 이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어떤 방이든 고유의 매력을 발견하면 그는 불편함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듯 즐기기에 바쁘다. “나는 또다시 이 냄새 나고 더러운 방이 마음에 들었다”고 거침없이 고백한다. 또 그런 이유로 다락방을 무척 좋아했는데 100개나 되는 계단도 불사하는 모습은 역시 그답다는 웃음이 절로 배어 나온다.
세노 갓파의 유쾌한 호기심은 방 말고도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다. 그는 유럽을 횡단하는 국제열차의 차장들에게도 호기심 어린 시선을 뗄 줄 모른다. 이 열차가 국경을 넘어갈 때마다 그 나라의 차장으로 바뀌는데, 이 차장들의 특색 있는 차림이 그의 손을 바삐 움직이게 한다. 모자, 제복, 견장, 단추, 가방, 소지품까지 세심하게 스케치해서 나라의 색깔을 들여다보게 한다. 무엇보다 열차의 이동에 따라 차장들이 자연스레 교대하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우리에게 국경은 철책을 따라 총을 든 군인이 삼엄하게 경계하는 분단선으로 다가온다. 한반도에서는 함부로 오갈 수 없는, 생사의 갈림길 같은 국경이 유럽으로 넘어오면 열차도 사람도 동물도 자유롭게 넘나드는 강, 능선, 건널목 차단기로 친근하게 다가온다. 우리의 전국 일주처럼 그들에게는 유럽 일주가 부담스럽지 않은 일이라는 사실은 마냥 부럽기만 하다.
이 외에도 기후에 따른 지역별 창문의 모양과 용도, 네덜란드의 점자가 있는 지폐와 달리는 우체통, 유럽 열차의 나라별 내부 구조, 아름답고 웅장한 성들에 관한 짧은 이야기와 스케치도 정감 있다. 특히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게트라이데 거리의 아름다운 간판들을 모아둔 스케치는 동화 속 세상처럼 무척 황홀했다. 『유럽낭만 탐닉』에는 유럽에 가면 아무나 볼 수 있지만 아무나 기억에 남기지는 못하는 풍경들이 갈피마다 들어 있다. 여행 에세이도 글자만 빽빽하게 들어찬 책을 편애하는 편이라 스케치가 중심이 이 책이 개인적으로 아쉽긴 하지만, 어쩌면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읽히는 세노 갓파의 저력은 ‘지극히 당연한 것조차 호기심 가득한 아이의 시선으로 놀랍게, 신기하게, 재미있게 바라보는 시선’일지도 모르겠다. 갓파 식으로 바라보면 이 책은 ‘그래도 마음에 들었다.’
덧붙임
*사실 ‘라틴’이라는 단어를 봤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남아메리카’뿐이었다. 그래서 유럽의 역사와 문화에 무지한 탓에 유럽의 문화권에 대해 찾아봤는데 여기에 간략하게 기록해 둔다. 유럽 문화권은 튜튼족 중심의 북서부 유럽 문화지역(북해 주변의 영국, 베네룩스 3국, 독일, 스칸디나비아 반도 등), 라틴족 중심의 남부 유럽 문화지역(지중해 연안의 이베리아 반도, 이탈리아, 그리스, 프랑스), 슬라브족 중심의 동부 유럽 문화지역(슬라브족 백인종이 주민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동부 유럽 여러 나라와 러시아)으로 크게 나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