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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지코믹스 - 버트런드 러셀의 삶을 통해 보는 수학의 원리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 & 크리스토스 H. 파파디미트리우 지음, 전대호 옮김, 알레코스 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버트런드 러셀’과 ‘수학’은 나랑 별로 친한 단어가 아니다. ‘로지코믹스’의 ‘로직(logic)’과도 별다르지 않다. 러셀에 관해서라면 그의 이름자와 함께 전쟁과 핵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인 영국인 사상가 정도라는 것밖에 모르며, 나의 수학은 오가와 요코의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고등학교 시절에 읽었더라면 숫자의 세계도 언어의 세계만큼 아름다운 시라는 것을 알았을 테고 덜 지긋지긋했을 텐데 하는 뒤늦은 후회로 가득 차 있다. 게다가 언어로 이루어져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수많은 주관식 문제들에서 정답은 언제나 좀더 커다란 권력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의 말 한마디라는 것을 알게 될 만큼 나이가 든 후에는 빼도 박도 못하는 숫자, 계산, 객관 같은 것들이 애틋해졌다. 논리에 관해서도, 나는 언제나 객관적인 가치 판단에(‘가치’와 ‘객관’의 조합이 어불성설이긴 하지만) 의거하여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행동하려고 노력하지만, 언제든지 감정적으로 돌변하여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나는 코믹스(comix)와는 아주 친하다. 『로지코믹스』를 읽게 된 것은 나랑 친한 코믹스를 통해 러셀과는 안면을 트고 그동안 격조했던 수학이나 논리와는 더 친해지고 싶어서다.
『로지코믹스』는 20세기 최고의 지성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수학, 논리학, 철학, 사회학, 문학 등 다방면에서 폭넓게 활동한 버트런드 러셀을 가리키는 그 빛나는 명함들 가운데 논리적으로 완전무결한 수학의 토대를 찾아 나선 수학자이자 논리학자로서의 생애를 부각하고 있다.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의 의도대로 ‘학습 만화’가 아니라 ‘이야기 만화’인 이 책은 크게 세 가지 이야기가 교차되어 진행되면서 서로를 보완해 준다. 먼저 이 만화책의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이 『로지코믹스』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들의 『로지코믹스』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것을 반대하는 미국 고립주의자들에게 ‘인간사에서 논리의 역할’을 전하는 러셀의 강연을 액자 형식으로 품는다. 그 강연에서 러셀은 수학을 완벽하게 지탱하는 확고한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던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당대에 그와 함께 치열하게 고민하고 열정적으로 논쟁을 벌인 수학자들과 논리학자들의 이야기까지 더불어 들려준다.
러셀이 수학에 매혹됐던 것은 그가 성장한 펨브로크로지 저택의 미스터리, 완고한 할머니의 이해할 수 없는 규칙들, 비극적인 가족사, 부모의 비밀, 집안의 정신병 같은 비합리적인 온갖 의문투성이들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은신처였기 때문이다. 광기(그를 평생 지배한 트라우마)가 스며들 여지조차 없을 것 같은 이성과 합리성의 굳건한 성채 안에서 러셀은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세상사를 모두 수학으로 모순 없이 명확하고 진실되게 증명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그는 절대적인 앎의 세계를 꿈꾸지만, 그곳에서 ‘공리’에 부딪치고 만다. 증명할 수 없는 진리, 그리하여 증명되지 않은 진리를 토대로 삼은 증명은 얼마나 무의미한가.
견고하다고 믿었던 수학의 토대에 의심을 품기 시작한 러셀은 논리적으로 완전무결한 수학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논리학을 선택한다.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의 추론계산법, 고틀로프 프레게의 개념표기법, 게오르크 칸토어의 무한과 집합론 등을 거쳐 러셀은 ‘러셀의 역설’에 이른다. 하지만 이 역설은 수학의 토대를 마련하기는커녕 논리학과 집합론을 동시에 붕괴시킨다. 이 붕괴를 막기 위해 앨프리드 화이트헤드와 끊임없이 전제를 의심하면서 공동 집필한 것이 미완성 『수학 원리』다. 하지만 러셀은 “역설 없는 논리학을 구성해서 수학을 지탱하려고 애썼는데, 결국 그들이 성취한 것은 아래로 한없이 이어지는 거북들(우주를 떠받치는 신화 속 거북)의 탑이었다”고 고백한다.
사실 이 책에도 적혀 있듯이 논리는 “아는 것들을 결합해서 모르는 것에 도달하는 기술”에 불과하다. 아는 것들을 결합해 모르는 것에 도달하는 순간, 그 모르는 것은 아는 것들에 포함된다. 이런 반복은 무한히 이어질 것이고, 어쨌든 진리는 그만큼 인간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어 저만치 멀어져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논리학은 언어의 공허한 형식일 뿐 실재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과학이 밝혀낸 사실들을 전부 다 알아도 세계의 의미를 이해하기에는 부족하다. 세계를 의미를 이해하려면 세계 밖으로 한 걸음 나가야 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논리적으로 말할 수 없다)”고 말했고, 쿠르트 괴델은 “답이 없는 질문이 항상 존재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러셀의 강연 결론처럼 “논리학과 수학에서도 이성적 확실성에 도달할 수 없다면 복잡하고 어지러운 인간사에서는 더 말할 것이 있을까.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을 막론하고 인간사에서 완벽한 이성적 확실성에 이르기는 정녕 불가능하다”.
여기까지가 낯선 이름, 낯선 생각, 낯선 개념 들 사이를 흥미롭게 헤매며 겨우겨우 잡아낸 이야기의 얼개다. 여기에 빠진 것이 있다면 바로 그들을 ‘광기’에 가둔 ‘열정’이다.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는 ‘사람’과 ‘열정’이 이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고 거듭 강조한다. 낯설고 어려운 주제들을 다루고 있는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완전무결한 진리의 세계를 찾기 위해 열정적으로 맹진하는 사람이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흥미진진하게 읽히는 모험소설과 다르지 않다.
아이스킬로스의 고대 비극 「오레스테이아」가 모순 덩어리인 삶을 독자와 논리학자 들 앞에 던져놓는다. 아들 오레스테스는 아버지 아가멤논을 살해한 어머니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죽여 아버지의 복수를 해야 할까, 하지 말아야 할까?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오레스테스의 누이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친 아가멤논에게 딸을 대신해 죽음의 복수를 했는데? 아가멤논 살해에 가담한 아이기스토스는 자신의 형제들을 죽인 아트레우스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의 아들인 아가멤논을 대신 죽였는데? 아트레우스는 자신의 아내와 간통한 티에스테스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 자식들을 대신 죽였는데? 여신 아테나는 오레스테스 집안에 깊이 뿌리박힌 비합리적인 복수와 살인의 비극적인 딜레마를 종식시키기 위해, 결국 어머니를 죽여 아버지의 복수를 한 오레스테스의 유죄와 무죄를 아테네 배심원들의 민주적 투표에 맡긴다. 전혀 신답지 않은 행동이지만 아테나는 비합리적인 비극에 대해 합리적인 이성으로 맞선 것이다.
러셀의 말처럼 모든 인간사에서 이성적 확실성과 절대적인 합리성에 완벽하게 이르기는 불가능하겠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일마저 무의미한 것은 결코 아니다. 모순투성이 삶에서 정답은 없다. 선택은 언제나 자신의 삶을 무한한 색깔로 살아가는 각 개인의 몫일 뿐이다. 그 선택에서 합리적인 이성, 혹은 비합리적인 감성 어느 쪽에 무게를 둬야 할지는 “책임, 정의, 선악을 느끼는 감각”에 기대어 현명하게 판단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