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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온 더 로드 - 사랑을 찾아 길 위에 서다
대니 쉐인먼 지음, 이미선 옮김 / 밀리언하우스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사랑하는 연인과 이별한 두 남자, 버스 사고로 엘레니 게오르기오스를 잃은 1992년의 레오 디킨과 전쟁으로 롯데 스타인베르크와 헤어진 1917년의 모리츠 다니에키의 이야기가 평행선을 달린다. 그리고 엘레니를 잃은 후 삶의 방향감각을 상실한 레오가 찾아 헤맨, 사랑에 관한 짧은 메모들이 간지처럼 드문드문 삽입되어 있다. 그러니까 대니 쉐인먼은 『러브 온 더 로드』에서 삶을 지탱해 주는 ‘사랑’의 위대한 힘을, 사랑을 잃고 난 직후부터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게 얼마나 사무치도록 아픈 일인지는 분명 그도 잘 알 텐데 얼마나 고약한 작가인가. 무엇이든 상실해 봐야 그 소중함을 절감한다지만 하필 사랑이 삶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는지를, 그 사랑을 상실한 이후에야 비로소 드러내는지.
이 소설은 남아메리카 에콰도르 오지에서 사랑하는 연인 엘레니와 여행을 하다가 버스 사고를 당한 레오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이 사고로 엘레니는 죽는다. 그것도 아무도 죽지 않은 사고에서 유일한 사망자가 되어. 사랑을 잃은 레오의 지극한 절망과 죄책감, 그리고 버스 사고를 둘러싼 일시적 기억상실증은 이 사실에서 비롯한다. “앞에 앉자.”, 버스 한가운데로 죽음의 운명을 피해 걸어가던 엘레니를 불러 세워 죽음의 운명 속으로 되짚어 돌아오도록 만든 레오의 그 한마디. 이후 레오의 이야기는 내내 엘레니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채 그녀의 자취를 찾아 헤매거나, 그러다가 지치면 엘레니에게 쏟았던 사랑을 대신 받아줄 현실의 여자를 착각과 환멸 속에 기웃거린다. 사랑과 영영 이별하고서 삶의 의미까지 잃은 채 휘청거리는 레오에게, 엘레니를 보내고 또 다른 온전한 사랑 속에서 삶을 꿈꿀 수 있는 용기를 준 것은 바로 모리츠 다니에키의 이야기다.
모리츠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면서 사랑하는 연인 롯데와 헤어진다. 전장에서 모리츠의 유일한 목표는 어떻게든 살아남아 롯데에게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쟁 중의 모든 행동은 전우애나 애국심, 공명심, 훈장, 살신성인, 승리 같은 것들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자신만은 기필코 살아남는 일에 맞춰진다. 만약 내가 생존하지 못한다면 그 빛나는 전쟁의 영광도 부질없으리라. 사실 서로를 죽여야 하는 전쟁에서 위업을 세운들 그것은 반쪽짜리 영광이거나, 생명을 앗는 일에 무감각해지는, 아니면 생명의 무게를 ‘편’으로 나누는 악몽이기 쉽다. 그러나 모두가 함께하는 싸움을 버리고 혼자만의 싸움을 선택한 순간, 모리츠는 치사해질 수밖에 없다. 러시아군에게 포로로 사로잡혔을 때도 모리츠는 오히려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목숨을 부지하기에는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보다 전쟁 포로의 대우에 관한 제네바협약 아래 러시아 포로수용소의 사정이 훨씬 나아 보였으니까.
모리츠의 그 치사한 사랑이 너무나 절실해서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이때부터다. 전쟁은 끝날 기미도 없이 더욱 격렬해지고, 국제협약은 그저 협약에 불과할 뿐 포로수용소의 열악한 환경이 생존을 향한 희망의 마지막 불꽃까지 꺼뜨릴 즈음, 모리츠는 탈출을 감행해 혹한이 채 가시지 않은 시베리아의 추위 속으로 나선다. 그러나 유럽과 모스크바에서 지구 반 바퀴쯤 멀어진 지금, 롯데에게 돌아가는 길은 아득하기만 하다. 그 까마득한 길을 모리츠는 오로지 두 발과 롯데에 의지해 한 걸음씩 되돌아가는 여정을 멈추지 않는다. 게다가 육신의 무게만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날마다 한 장씩 늘어나 커다란 가방 가득히 미어터지는 러브레터까지 지고서. 그 러브레터는 모리츠가 롯데와 헤어지고 난 후부터 롯데와 재회할 날을 기약하며 날마다 써온 연서이자 일기이자 삶 자체다.
사랑하는 연인과 이별했다는 점 말고는 별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두 이야기가 맞물리기 시작하는 것은 레오의 아버지 프랭크 디킨이, 사랑을 잃은 절망 속에 황폐해져가는 아들을 지켜보다 못해 낡았지만 묵직한 가방을 건네주는 시점부터다. 모리츠가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지켜서 롯데에게, 그리고 아들 프랭크에게 남겨준 유일한 유산, 그 러브레터들이 들어 있는 커다란 가방. 그 가방은 사랑과 생명과 삶이 승리한 증거인 것이다.
사실 『러브 온 더 로드』에 처음 관심을 가졌던 것은 『잉글리시 페이션트』를 내세웠기 때문이다. 『잉글리시 페이션트』가 온전히 ‘사랑’에 집중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깊고 고요하고 농밀한 행간의 여운을 이 소설에서도 찾을 수 있길 바랐다. 하지만 지나친 기대는 여지없이 기대한 만큼의 실망감을 불러오는 법인 모양이다. 대니 쉐인먼은 독자가 스스로 사랑이 삶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조용히 생각해 보기도 전에, 사랑은 이토록 위대한 힘을 발휘한다고 자명하게 설교한다. 실제로 대니 쉐인먼의 할아버지가 모델이라는 모리츠의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감동적으로 다가오겠지만, 그리하여 어쩌면 레오가 할아버지의 이야기에서 삶의 의지를 되찾는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귀결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모리츠와 레오의 사랑을 비교하는 것은 어딘가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또 레오가 엘레니의 자취를 찾으면서 빠져들게 된 로베르토의 물리학 세계는 조금도 아름답지 않고 어딘지 모르게 사이비나 궤변처럼 느껴진다. 이에 비하면 오가와 요코의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 얼마나 돋보이는지. 또 ‘Random Acts of Heroic Love’라는 원제를 두고 번역본 제목을 달리 할 것이라면 왜 또 다른 영문 제목을 지어냈는지 의아하다.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한 데 대한 사소한 불평에 불과하다. 미덕이 더 많은 소설로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