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의 바보
이사카 고타로 지음, 윤덕주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만약’이라는 가정 중에 가장 많이 상상하는 것은 ‘만약 엄청난 금액이 걸린 로또에 당첨된다면?’과 ‘지구의 종말이 닥친다면?’일 것이다. 그 가정들에 대해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스스로 물어봤다. 그런데 두 가정에 대한 답은 어느 부분까지는 놀랍도록 일치했다. 그 소식을 듣는 즉시 일을 그만둔 뒤, 사랑하는 사람과 하루 종일 함께 보내면서 집에 빈틈없이 채워둔 책들 사이에 파묻히거나 여행을 떠나거나 맛있는 음식을 요리해 먹거나 평소에 가지고 싶었지만 못 가졌던 것들을 쇼핑하거나…….

도무지 짐작조차 불가능한 내일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오늘 참았던 것을 이제는 날마다 참지 않고 즐기자는 마음이 절로 든다. 일단 로또는 최소한 물질적 풍요로움을 보장해 주니까 내 권리가 된 물질을 마음껏 향유하고 싶고(어쩌면 평생, 대개는 그 물질에 취해 탕진해 버린다지), 종말은 얼마 남지 않은 살날 동안 지금껏 아등바등 비축해 둔 물질을 모두 누리고 싶게 한다. 하지만 종말의 시간까지는 어떡하든 살아내야 한다는 깨달음이 뒤늦게 머리를 스친다. 이 지점에서 문제는 로또에 비해 좀더 복잡해진다. 내가 종말의 날까지 편안하게 살 수 있을 만큼 비축해 두었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세상의 종말을 통보받는다면 처음에는 두렵고 절망스럽겠지만 나에게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똑같이 닥친 일이니, 내게 남은 날들의 평화와 행복에 좀더 열중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내 삶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안다면 딱 그만큼만 아등바등하고 적절히 균형을 잡으면서 살 수 있을 텐데 하는.

이사카 고타로의 『종말의 바보』는 ‘소행성 충돌로 지구가 6년 후에 멸망한다’는 가정하에 3년이 지난 시점, 그러니까 살날이 이제 3년 남은 시점의 세상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여덟 편의 연작에 담았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곧바로 이사카 고타로의 소설 두 편을 더 산 것은, 그 스케치 방식에서 전해져 오는 삶을 대하는 작가의 자세가 내 마음에 꼭 들었기 때문이다.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는데도 종말의 불길한 긴장감 이면에는 따뜻하고 평화로운 일상이 계속 이어진다. 끝이 보이는 삶이라도 소중하게 다뤄지고 있다.

물론 이사카 고타로가 그리는 종말의 세상이 처음부터 아무런 동요 없이 일상적인 평화가 이어진 것은 아니다. 자신의 종말을 예언하는 지구의 멸망에 충격과 공포와 절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아무에게나 폭력을 휘두르고, 서로 죽이고, 생존에 필수적인 식료품과 생활용품을 확보하려고 악다구니를 썼다. 모든 사람이 하던 일을 멈춘 채 종말에 안전한 곳 없는 지구에서 안전한 곳을 찾아 차를 몰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막상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면서도 서로 먼저 가겠다고 뒤엉켰다. 그 끔찍한 혼돈 속에서도 자살하지 않고 죽임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문득 종말의 날까지는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이제 슈퍼마켓이든 비디오 가게든, 더 이상 내일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벌어두려는 탐욕의 일터가 아니다. 늘 영원할 줄 알았던 ‘내일’도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이제야 자기 일의 영웅이 된다. 모두가 혼비백산하여 일터를 떠난 자리에 남은 사람들은 밥벌이나 돈이 아니라 자신의 자긍심과 일 본연의 가치를 위해 계속 일한다. 딸과 아빠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랑으로 두 마음을 갈라놓았던 오랜 골을 메우고 남은 시간을 함께한다. 우유부단하기 그지없었던 남자는 종말을 앞두고 이제야 찾아온 아기를 낳아 마지막까지 기르기로 결단한다. 한 소녀는 자신만 남겨둔 채 먼저 죽음을 선택한 아빠와 엄마를 이해하기 위해 아빠의 서재를 가득 메운 책들을 모두 읽어치우는 데 4년이라는 시간을 보낸다. 킥복싱 선수는 5년 전이나, 3년 후나 지금처럼 자신이 할 수 있는 킥복싱 훈련을 한다. 별을 사랑하는 남자는 소행성이 떨어져도 별을 관측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이사카 고타로는 킥복싱 선수의 말을 빌려 “내일 죽는다고 삶의 방식이 바뀝니까?”라고 묻는다. 이야기가 쓸데없이 길어졌지만, 이사카 고타로가 그리는 종말의 나날은 ‘내일 죽는다고 해도 삶의 방식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적이 안심이 된다.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하지 않아도 우리는 언젠가 생의 마지막 종말을 맞을 것이다. 용서를 구하고 화해를 하고 아기를 낳고 애인을 찾아 나서는…… 소소한 일상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진다고 생각하면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삶의 관성이 우리의 두려움과 외로움을 달래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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