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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화를 그리는 화가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김수진 옮김 / 시공사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움베르토 에코류의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읽어 보았을 작가 중 한명이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일 것이다. 스페인의 움베르토 에코라 불리는 작가답게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 『뒤마 클럽』, 『검의 대가』 같은 작품을 본다면 이 작가가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 사실에 근거에 있음직한 큰 줄기의 이야기에 살을 붙여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 기존의 방식이었다면 『전쟁화를 그리는 화가『는 기존의 것들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을 가진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사건도 없을 뿐 아니라 둘의 대화만으로 이끌어 가는 구성 역시 기존 작품들과 다른 독특한 느낌을 준다. 종군 기자, 내전이나 국제 분쟁 관련 프로그램에서 일했던 경험을 살려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중해 해안가의 낡고 외딴 망루에 살고 있는 안드레스 파울케스는 과거 유명한 종군기자이며 사진작가였다. 평생을 함께 해온 사진을 버리고 외딴 망루에 살며 벽에 전쟁화를 그리는 파울케스에게 한 남자가 찾아온다. 그 이름은 마르코비츠, 그는 파울케스에게 ‘당신을 죽이러 왔다’고 담담히 이야기한다. 파울스케는 마르코비츠가 왜 자신을 찾아와서 죽이려 하는 지 알 수 없었지만 마르코비츠는 지난 10여 년간 그를 추적한 사실과, 그가 찍은 사진으로 자신의 삶이 어떻게 망가지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한다.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의 전쟁 당시 종군기자였던 파울스케는 크로아티아 민병대의 모습을 한 장의 사진에 담았다. 그 사진은 유명해져 파울스케에게는 수상의 영예를 안겨주었지만 그 사진에 찍힌 주인공은 붙잡혀 무참히 고문을 당했고 2년 만에 간신히 집에 돌아왔지만 그의 가족은 세르비아 군에게 무참히 살해되었다. 그 사진 속 주인공이 마르코비츠였다. 이렇게 자신을 죽이러 온 마르코비츠와 파울스케는 이야기를 나눈다. 파울스케가 자신의 연인을 잃고 카메라를 놓은 이야기, 전쟁의 참혹함과 그곳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이야기, 또 이야기 속에 파울스케가 벽화를 그리는 이유를 알게 된다.
렌즈로 담아내는 사진은 진실의 모습이어야 한다. 수많은 기다림 속에서 포착하는 찰나의 순간은 피사체를 객관적으로 담아내지만 작가가 개입할 여지가 없는 하나의 장면, 하나의 컷일 뿐이다. 작가의 의지가 개입하는 순간 거짓이 되어 버리고 방관자의 입장에 설 수 밖에 없는 사진을 버리고 붓을 들게 된 것은 전쟁의 참혹함 속에 인간의 본성을 경험한 파울스케의 운명이었을 것이다. 사진을 찍는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안 파울스케에게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자신이 본 것을 투영하는 것이 최후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대화는 끝이 났고 상처를 입은 서로의 삶과 그림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