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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바다 - 제12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꿈과 현실은 다르다, 는 것을 언제부터 알았을까? 대학을 졸업할 즈음 그때껏 꿈꾸면서 열심히 준비해 온 직업의 세계에 들어섰다가 얼마 버티지도 못한 채 뛰쳐나왔을 때였을 것이다. 내 나름대로는 비장한 각오를 했는데도 그동안 내가 머릿속으로 수만 번 상상하고 동경해 왔던 일과는 너무나 달라 깜짝 놀랐다. 풋내기였으니 많이 인내했으면 그 바닥에서 내 꿈에 조금이나마 가까이 가닿을 수 있었을까? 결코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발버둥 칠수록 꿈은 멀찍이 물러났을 것이다. 어쩌면 꿈이라고 믿었던 그 자리에 도달했더라도 꿈은 그 순간 비루한 현실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화려했던 꿈을 두고 현실로 내려와 차선의 직업으로 밥벌이를 했다.
정한아의 『달의 바다』는 꿈과 현실의 간극을 어떻게 메워 비루한 현실에 따뜻하게 안착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꿈을 이루지 못해도 루저의 실패한 삶이 아님을,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긍정하며 용기 있게 살아가는 삶보다 감동적인 것은 없음을 알게 해준다. 이 소설은 달나라를 오가는 우주비행사 순이 고모의 편지와 언론고시에 번번이 낙방하는 은미(‘나’)의 이야기가 교차되는 단순한 구성으로 꿈과 현실의 간격을 밀도 있게 좁혀간다.
순이 고모가 할머니에게 보낸 편지 일곱 통은 ‘꿈’이다. NASA 소속 우주비행사로 달에 기지를 구축하는 일급비밀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는 고모의 낯설고도 환상적인 우주 이야기는 꿈같이 펼쳐진다. 엄마에게도 꿈을 심어주는 이 정성스러운 딸의 편지들은 차갑고 메마른 현실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소설 전체에 온기를 퍼뜨린다. 이에 비해 또다시 언론고시에 낙방하고 감기약 200알로 자살을 결심한 백수인 은미의 나날은 철저하게 ‘현실’적이다. 은미의 절망은 그리 낯설지 않다. 오히려 너무나 익숙해서 소설을 읽으면서까지 들여다보고 싶지는 않을 정도다.
감기약 200알을 가지고 잠시 자신의 현실에서 떠나는 은미의 미국행은 순이 고모의 편지가 마련해 준 기회다. 15년 전에 미국으로 떠난 뒤로 간간이 편지만 보내올 뿐인 딸의 안부가 너무나 궁금해서 할머니는 자기 대신 손녀딸 은미를 미국으로 보낸다. 딸의 부탁대로 방문을 잠근 채 ‘실은 네 고모가 우주비행사란다’라고 남몰래 간직한 비밀을 간신히 털어놓은 할머니는 딸의 이야기를 믿지만, 우주비행사의 일상이 우주비행사가 아니라면 묘사하기 어려울 만큼 편지글에 생생하게 담겨 있긴 하지만 딸이 정말 우주비행사가 맞는지, 도대체 정말 건강하게 잘살고 있는지 염려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딸이 전하는 이야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딸의 안부를 직접 확인하고 싶은 것이 엄마의 마음이다.
미국에서 순이 고모를 만나고 돌아온 은미는 가족을 모두 불러모아놓고서 할머니가 고모에 관한 비밀을 처음 털어놓을 때처럼 방문을 잠근 채 자신이 만난 고모 이야기를 은밀하게 들려준다. 고모에게 얻은 관광상품인 NASA 우주비행사 배지와 휘장, 고모네 뒷마당에 주워 온 달나라 돌 두 개 같은 것들을 늘어놓으면서 모든 것이 진짜였다고, 고모는 우주비행 일정을 소화하느라 몹시 바쁘더라고, 그런 고모가 아주 멋지더라고 말이다. “환상과 꿈, 아름다움, 비극, 무지개에 대한 믿음”을 가진 할머니는 “적금과 등산, 단골손님, 소갈비, 독감 예방주사에 대한 믿음”을 가진 할아버지와 살면서 유일한 꿈으로 품었다가 가슴에 뼈아픈 상처로 안은 딸이 끝내는 자신이 꿈꾸던 자리에서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받고 꿈을 계속 꾼다. 그것은 서재 한가득 우주에 관한 책들을 간직한 순이 고모가 지켜주고 싶어 했던 꿈이고, 이제 은미도 자신은 꾸지 못해도 할머니가 꾸기를 바라는 꿈이다.
은미는 순이 고모를 만나 이렇게 물었다. “왜 할머니한테 가짜 편지를 쓴 거야?” 그러자 고모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즐거움을 위해서. 만약에 우리가 원치 않는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거라면 그런 작은 위안도 누리지 못할 이유는 없잖니.” 고모가 진짜 우주비행사이든 아니든 그 황홀한 꿈은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현실을 긍정하고 앞으로도 용기 있게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자의 달콤한 위안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삶에 열중하는 자에게는 이루지 못한 꿈도 좌절일 수 없다. 고모의 꿈은 할머니의 꿈을 이어주고, 고모의 현실은 은미가 꿈의 자리에서 가볍게 날아올라 현실에 사뿐하게 내려앉을 수 있는 통로가 되어준다. 꿈을 별처럼 달아두고도 절망을 몰아내고 용감하게 살아내는 모든 사람들의 현실은 더 이상 비루하지 않다. 꿈보다 견고하고 아름다우며 감동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