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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든파티 - 영국 ㅣ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캐서린 맨스필드 외 지음, 김영희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평점 :
고백하자면, 나라별 창비세계문학이 서점에 나타났을 때 사실 흥분했었다. 이런 시리즈들은 컴필레이션 음반과 같은 매력을 내뿜는다. 대체로 정규 음반을 컴필레이션 음반보다 훨씬 선호하지만, 컴필레이션 음반에는 낯선 세계에 처음 발을 들여놓는 초심자에게 ‘안내자’의 역할을 해준다는 분명한 장점이 있다. 문학은 제각기 개성적이지만 나라별, 언어권별로 보편적인 특성을 아우르고, 무엇보다 고전이라면 장편에 더 익숙한 나에게 ‘단편’이라는 유혹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기회가 아니면, 세계 대문호들의 엄선한 단편을 책 몇 권으로 골고루 읽는 즐거움을 누리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리하여 일단 설레는 마음으로 영국편 『가든파티』를 먼저 펼쳤다. 하지만 단편은 역시 읽어내기가 녹록지 않다. 나는 긴 이야기를 좋아하고 그 흐름에 익숙한 편이라 단편 한 편을 읽는 데 (조금 과장하여) 장편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린 듯하다. 이야기의 끝을 가늠할 수 없으니 아직 꽤 남았겠지, 이제나저제나 마지막 장일까 싶어서 조바심은 또 어찌나 나던지. 그럼에도 이 책을 읽고 난 후에는 꽤 뿌듯했다. 어찌 됐든 1866년부터 1963년에 걸쳐〔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통치한 시대(1837~1901년)와 비교적 중첩되는〕 영국 문학 100년을 대표하는 찰스 디킨스, 토머스 하디, 조지프 콘래드,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캐서린 맨스필드, 도리스 레싱을 한자리에서 만나는 일이니까.
찰스 디킨스는 위대한 이야기꾼다웠다. 「신호수」는 아찔한 벼랑 사이 골짜기에 외따로 위치한 철도 초소의 고독한 신호수에게 죽음의 유령이 어떻게 덮쳐오는지를 흥미롭고 세련되게 보여준다. 이미 두 번의 끔찍한 열차 사고를 유령의 경고로 미리 알았던 신호수 앞에 유령은 또다시 불길하게 나타나 해괴한 몸짓으로 모호한 메시지를 전한다. 언제 어떤 식으로 누구에게 죽음이 덮쳐올지 알 수 없어 더욱 두렵다. 유령이 나타난 그 자리에 그 모습대로 한 팔로 두 눈을 가리고 남은 팔을 휘저으며 신호수에게 소리치는 열차 기관사가 등장했을 때 어찌나 오싹하고 섬뜩하던지.
버지니아 울프는 내가 완독을 하지 못하고 도중에 책장을 덮은 몇 안 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의식의 흐름’대로 ‘자동 기술’하는 「큐 가든」을 읽으면서 『세월』의 좌절이 절로 떠올랐다. 하지만 「유품」은 버지니아 울프에게 다시 한 번 도전하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킬 만큼 재미있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단편 「다른 남자」는 「유품」의 오마주가 아닐까. 두 작품 모두 완벽하게 행복한 가정생활을 했다고 자부하는 남편이 등장한다. 그리고 아내의 죽음 이후 아내가 다른 남자를 사랑했음이 드러난다. 「유품」의 경우에는 아내의 일기장이, 「다른 남자」의 경우에는 다른 남자의 편지가 아내의 진실을 알리는 계기가 된다. 그래도 남편들은 왜 아내가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했는지 모른다. 그저 당황하고 경악할 뿐이다. 진실을 부정하는 남편들과 대조적으로 독자만이 아내들의 그 속내에 공감할 수 있다.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의 「차표 주세요」에서는 바람둥이 남자에게 농락당한 여자들이 합심하여 집단적인 복수를 한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새로운 문물인 철도와 기차에 매혹되어 캔버스에 담았듯이 이 단편도 새로운 직업으로 떠오른 남성 검표원과 여성 차장이 그 바탕을 이루며 당대 사회상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자기 자신을 억눌러야 했던 여성들이 당당한 직업을 가지고 연애를 하며 배신을 당하면 스스로 적극적으로 벌하는 모습은, 그리고 예기치 못한 여성들의 응징에 꽁무니를 빼는 남성의 꼬락서니는 통쾌하고 후련했다. 그럼에도 남자에게 자신들 중 한 사람을 선택할 것을 종용하고 자신이 선택되기를 바라는 여자들의 마음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캐서린 맨스필드의 「가든파티」는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쌉쌀하기 그지없는 인생을 떠올리게 한다. 어린 중산층 아가씨 로라의 가든파티를 위해 완벽하게 준비된 듯한 날, 지척에 사는 하류층 마부의 불운한 사고 소식을 듣게 된다. 로라는 가든파티를 취소하고 싶었지만 어른들의 반대로 강행됐다. 슬픔이 짓눌렀지만 자신을 매혹적으로 보이게 해주는 모자에도 눈길을 뗄 수 없다. 화려한 파티와 가난한 죽음이 내내 대비되는 이야기는, 그럼에도 떠들썩한 파티를 즐긴 후 선심 쓰듯 남은 음식들을 가지고 조문을 가는 로라에게 이른다. 한곳에는 음악과 웃음소리로 왁자지껄한 파티가, 바로 인접한 곳에는 울음소리와 슬픔이 무겁게 내려앉는 장례가 동시에 진행된다. 그 아름다운 모자를 쓴 채 조문을 한 로라는 계급의 무서운 격차와, 삶과 죽음의 무게에 결국 흐느껴 운다. “인생이란 게…….”라는 로라의 울음 섞인 마지막 말은 분명하게 조목조목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누구나 이해하고 때론 절감하는 말이다. 정말 인생이라는 것이 참 거시기하다.
모든 작품들이 자신만의 매력으로 이야깃거리와 생각거리를 들이밀지만, 그중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몇몇 단편들만 자세히 언급했다. 네 편 외에 따로 이야기하지 않은 단편들도 그냥 지나치기 아쉽지만 이쯤에서 갈무리한다. (개인적인 감상이 길어지면 좀 지치니까. 그중에서도 도리스 레싱에 대해서는 다른 소설에서 더 길게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영국 단편문학으로의 산책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각 단편의 끝에 실린 ‘더 읽을 거리’에 대한 소개는 유익했다. 무엇보다 국내에 출판된 좋은 번역본을 추천해줘 유용했다. 다음에 읽을 책은 이 시리즈의 스페인․라틴아메리카편이다. 이 문화권의 ‘환상적인 분위기’와 ‘마술적 사실주의’는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요소들이니 몹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