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미초 이야기
아사다 지로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가스미초’는 도쿄 어느 곳의 옛 지명이라고 한다.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는. ‘안개 마을’이라는 뜻이라지. 밤이 이슥할수록 안개가 솟구쳐 오르는 마을. 아마 일본의 고도 성장기에 도쿄도 도시 이곳저곳에서 끊임없이 개발 공사가 진행되고 팽창되고 구시가지가 쇠퇴하고 신시가지가 형성되는 사이 옛 모습과 옛 이름들은 햇살에 안개가 걷히듯 자취를 감췄을 것이다. 하지만 옛 지명이 사라진 그곳에는 여전히 밤이 내리면 안개가 피어올라 ‘가스미초’로 불렸다는 이전 “시대”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인다고 한다. ‘안개’는 가스미초 시대의 청춘과 가족과 친구와 우정과 사랑을 추억하는 데 아련한 아름다움을 더해 준다.

아사다 지로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소설을 쓸 때 두 가지 원칙이 있다. 쉽게, 그리고 아름답게 쓰는 것이다. 아름다운 소설은 읽는 순간 독자의 고통과 어려움을 사라지게 한다.” 쉽게, 그리고 아름답게. 이것은 아사다 지로가 자기 소설을 명명한 가장 적확한 언어일 것이다. 독자들도 고개를 끄덕이는. 『가스미초 이야기』도 그렇게 쉽고 (제3자의 시선에서는) 아름답다(‘그래, 착하고 흐뭇한 이야기야’라고 긍정하게 되는 것, 그리고 그 아름다운 이야기에 마음이 요동치는 것은 별개라서 ‘제3자의 시선’이라는 사족을 달았다. 나는 어떤 이야기든 내 마음이 절로 요동치면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감정적 의미로 ‘아, 아름답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스미초 이야기』는 모두 여덟 편의 연작으로 작가 아사다 지로의 분신이기도 한 이노의 청춘을 추억한다. 이노의 청춘에는 사랑과 우정으로 채색된 가족과 친구가 있다. 이노의 추억은 할머니,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다니는 어린 소년에서부터 리젠트 머리를 뽐내는 도쿄 토박이 고등학생까지 시간의 이랑을 넘나든다. 더욱 편리하고 효율적인 생활을 위해 성장과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옛것이 점점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그 자리를 대체하는 풍경 속에는, 오래된 라이카 카메라를 평생 목에 걸고 다니면서 고관대작의 인물 사진을 찍어준 일본 최초의 사진 명장인 할아버지와, 도쿄가 발전함에 따라 번성한 유흥가의 유혹을 만끽하는 리젠트 머리의 고등학생 손자 이노가 함께 있다. 게이샤였던 아름답고 위풍당당한 할머니를 기적에서 빼내어 평생을 가족으로 함께한 할아버지의 사랑과, 게이샤로 사랑하여 끝내 가슴속에 묻어두어야 했던 할머니의 첫사랑은 이노와 그 친구들의 풋사랑, 그리고 어설픈 이별과 공존한다.

일단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면 어떤 시간을 견뎠든 그 기억들은 애틋함과 그리움과 아름다운 것에 조응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어느 시간도 내게 그리 녹록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나간 시간은 언제나 지금보다 녹록했음을 깨닫게 되고 그 시간이 부질없이 애틋해지고 그리워지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이노, 곧 아사다 지로의 추억도 그렇게 빛난다. 이노의 추억들 가운데 가장 부러웠던 것은 트루먼 카포티의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읽은 닥터 해리의 영어 수업! 그 때문에 다른 모든 결점들에도(리사와의 무책임하고 지리멸렬한 사랑까지) 불구하고 그가 좋아졌다. 이노의 추억들 가운데 가장 아쉬웠던 것은 「해질 녘 터널」! 왠지 TV 프로그램 ‘진실 혹은 거짓’에 거짓으로 나올 법하게 작위적인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단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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