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탑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수첩 리틀북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게으름 피우지 말고 크리스마스 즈음에 읽을 걸 그랬다. 물론 언제든 읽어도 모리미 도미히코의 유쾌함과 깜찍한 망상은 여전히 유효하겠지만 말이다. 여기서 ‘여전히’는 작가의 작품 발표 순서와 상관없이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를 먼저 읽었기 때문이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를 아껴가며 읽을 때 그토록 앙증맞은 귀여움이 모두 모리미 도미히코라는 남자의 머릿속 풍경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지브리 애니메이션풍 신비롭고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마음껏 연출하는 이 남자, 모리미 도미히코의 소설은 더는 읽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한껏 반한 콩깍지가 벗겨질까, 덜컥 겁이 났다. 

『태양의 탑』을 읽기 시작할 때 내 마음이 그랬다. 그의 머릿속 깜찍한 풍경들을 더 들여다보고 싶은 호기심이 커질수록 더는 아무것도 없을까 봐 노심초사했다. 하지만 웬걸, 『태양의 탑』은 자신을 차버린 여자, ‘미즈오’를 스토킹하면서(아무리 ‘미즈오 씨 연구’라고 강조해도!) 매사에 구구절절 망상 가득한 의미를 부여하는 꽤 귀여운 구석이 있는 남자(‘나’)와, 연애에 서툴러(절대 인정하지 않지만!) 세상 모든 연인들을 질투하는 사내즙 풀풀 풍기는 남자들을 가득 들이민다. 이 남자들이 내 글을 읽으면 십중팔구 분기탱천하겠지만 이런 남자들의 크리스마스 저주 이야기는 별로 산뜻한 이야기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유쾌하다. 마음껏 킬킬거릴 수 있다. 왠지 그게 헤어 나올 수 없는 매력처럼 나를 둘러싼다. 

『태양의 탑』은 미즈오를 연구하는(‘연구’라고 해주지, 뭐!) 남자가 ‘나’로 등장하여 소설을 이끌어 나간다. 이 소설은 크게 두 가지 이야기로 진행되다가 크리스마스 이브 ‘에에자 나이카(괜찮겠지, 아무렴 어때, 좋고 말고!)’ 소동으로 한데 휩쓸린다. 

첫 번째 이야기. 소설에 실제로 등장하여 말하거나 행동하지는 않지만 미즈오는 ‘나’와 미즈오를 짝사랑하는 또 다른 남자, 엔도의 비장한(그러나 너무나도 우스운!) 복수전을 이끌어낸다. 서로 미즈오를 스토킹하지 말라고(자신은 스토킹의 사심이 결코 없음을 주장하면서!) 으르렁대던 그들이 에이잔 전차를 타고 미즈오는 없는 미즈오의 꿈속에서 단둘이 만나는 장면은 눈물 나도록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다정한 연민도 한껏 불러일으켰다. 꿈속에서 미즈오를 뒤쫓아 그들이 함께 도착한 곳은 태양의 탑 앞, 모든 것을 초월하여 이계로 들어서는 입구 앞이었다. 

두 번째 이야기. ‘나’는 ‘미즈오 씨 연구’를 하면서 연적 엔도와 유치한 복수전을 주고받으면서도 ‘나’와 같은 교토대생 친구들과 함께 연인들을 거리로 불러내는 크리스마스 테러를 공모한다. 한때 미즈오와 연애를 했지만 크리스마스 선물로 마네키네코를 준 뒤 이별을 통고받은 ‘나’와 친구들은 “여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 혹은 여성이 필요로 하지 않는 사내들”로(바로 말하자면, 여성이 필요로 하지 않는 사내들에 가까운!) “크리스마스를 저주하고, 성 밸런타인을 매도하며, 세계 평화와 사회 평화의 초석을 쌓기 위해 난폭한 영혼을 진정시키느라 신작 성인 비디오를 뒤적이는” 일에 천 가지 만 가지 그럴듯한 의미쯤은 줄줄이 읊어대는 애인 없는 백수들이다. 

그들이 크리스마스 이브, 연인들로 가득한 거리에 “에에자 나이카!”라고 속삭인다. 순식간에 그 작은 속삭임이 퍼져 나가 온 거리가 들썩이고 블랙홀처럼 온갖 인파들을 빨아들인다. “괜찮겠지, 아무렴 어때, 좋고 말고!”를 축제 이벤트처럼 외쳐대는 군중들 속에는 연인들도 있고, 엔도도 있고, ‘나’의 친구들도 있고, ‘나’도 있고, ‘미즈오’도 있다. 

『태양의 탑』의 별 볼일 없는 남자들, 궁상맞은 행동에 변명 늘어놓듯 제법 그럴듯하게 빛나는 의미들을 부여할 줄 아는 남자들, 크리스마스를 몰아내자는 야심 찬 계획으로 “아무렴 어때!”라고 속삭이는 남자들, 왠지 순수한 바보들 같지 않은가! 순진한 소년들 같지 않은가! 그들의 넉살과 반어와 망상도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만담과 함께 즐거웠다. 모리미 도미히코의 『다다미 넉장반 세계일주』도 읽어볼 거다. 그런데 모리미 도미히코가 사랑하는 몇몇이 있나 보다. 다다미 넉장반이나 찰랑거리는 흑발 단발머리, 마네키네코, 에이잔 전차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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