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 귀 토끼
오오사키 코즈에 지음, 김수현 옮김 / 가야북스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오래된 저택, 수많은 방, 비밀 통로, 은밀한 공간, 고풍스러운 골동품들, 그리고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불길하지만 아름답고 가슴 아픈 전설……에 혹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런 장치들은 내가 쉽게 가슴 설레는 소재들이기 때문이다. 세밀하고 유려한 풍경 묘사와 비밀스러운 긴장감에 신비로운 분위기까지 감돌면 책 읽은 후에 만족도는 크게 증폭한다. 오오사키 코즈에의 『한쪽 귀 토끼』를 욕심낸 것도 이런 나의 취향 탓이 크다.

실제로 『한쪽 귀 토끼』에는 그런 소재들이 오밀조밀 적절하게 섞여 있다. 오래되고 유서 깊은 쿠라나미 가의 저택, 저택 단면도가 필요할 만큼 넓은 부지에 들어찬 많은 방들과 복도, 지붕 아래 천장 위 어둡고 음산한 공간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들, 차마 선물하지 못한 고가의 예쁜 소품들과 아기자기한 장난감들이 가득 진열되어 있는 은밀한 아틀리에, 그리고 “토끼의 원한을 잊지 말지어다. 바람 없는 밤의 반쪽 달, 요괴들이 모여 연회를 연다. 인간의 자식은 죽고 토끼는 춤을 춘다”는 불길한 ‘한쪽 귀 토끼’ 전설에 얽힌 70여 년 전 슬픈 치정(TV 드라마처럼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이야기)까지 골고루 갖추었다. 거기에 귀여운 추리까지 양념으로 곁들여졌으니.

그런데도 도중에 책장을 덮어버릴 뻔한 것은 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초등학교 6학년생 나츠의 투덜거림으로 시작되는 첫머리부터 꽤 지루하게 유치했기 때문이다. 나츠가 쿠라나미 저택의 모험을 함께할 중학교 3학년생 사유리를 소개받기까지 불필요하게 길어졌다. 게다가 나흘에 걸친 쿠라나미 저택의 모험은 조금 험난한 ‘가벼운 산책’ 수준이랄까.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 소재들이 한껏 범벅되어 있다 해도 밀도 없이 단선적인 이야기의 유치한 흐름은 소설에 깊이 몰입하지 못하게 방해했다. 멋진 소재들을 고품격 소설로 빚어내는 저력이 작가에게 모자랐다는 점이 무척 아쉽다. 하지만 마지막 책장까지 넘긴 후의 감상을 말한다면, 아기자기한 읽기의 재미는 그럭저럭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내가 나츠의 또래였다면 더 즐겁게 읽을 수 있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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