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
레이철 커스크 지음, 김현우 옮김 / 민음사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레이철 커스크의 『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는 영국의 런던 근교 알링턴파크에 사는 다섯 주부의 어느 비 오는 하루를 세밀하게 따라간다. 무심하게 흘러온 나날들과 마찬가지로 권태로운 상념으로 가득 찬 또 하루가 그렇게 더해진다.

‘알링턴파크’는 작가가 일상에 부유하는 주부들을 한곳에 몰아놓은 가상 공간으로, 부유한 축에 속하는 중산층의 베드타운이다. 근사한 집, 멋진 마당과 정원, 잘 닦인 도로, 초록빛 무성한 공원, 각종 편의시설까지 빠짐없이 갖춘 알링턴파크에서는 화려하고 활기찬 런던과 달리 아침에 남편들이 출근하고 나면 부인들만 남아 아이들을 챙긴다. 알링턴파크의 주부들은 대부분 습관적으로 남편들을 출근시킨 후 등교 시간에 맞춰 자동차로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하교 시간에 맞춰 또 아이들을 데려오기까지 집안을 예쁘게 장식하거나 쇼핑몰에서 쇼핑을 즐기거나 다른 주부들과 함께 커피 타임을 가지면서 의미 없는 대화로 시간을 죽인다.

이보다 더 안온한 생활은 없을 것 같지만, 레이철 커스크가 의도적으로 조명하는 다섯 주부들의 마음은 갖가지 불만 가득한 상념들로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총명한 학생으로 전도유망했던 시절을 희생시킨 것만 같은 남편이 자신을 죽였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줄리엣, 집안을 쓸고 닦고 광내며 단장하는 데 집착하는 어맨다, 빈방에 세 든 외국인 여자들의 삶을 엿보며 출산 기계가 아닌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꿈꾸는 솔리, 자기 삶에 더없이 만족하는 듯 알링턴파크 주부들의 커피타임과 쇼핑 같은 사교 모임을 당당하게 주도하지만 언제 자기 삶에 균열이 갈까 전전긍긍하며 편협한 사고방식을 권력인 양 강요하는 크리스틴, 런던이 싫어 자기 고집으로 알링턴파크에 이사했지만 남편이 더 흡족해하는 이곳도 도무지 만족할 수 없는 메이지까지 레이철 커스크의 다섯 주부들은 무기력한 권태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어 금방이라도 폭발할 지경인데도 안전한 쳇바퀴 밖으로 이탈할 용기를 내지 못한다.

커피타임으로, 쇼핑으로, 공원 산책으로, 저녁 만찬으로 함께 모여도 그들의 대화는 상대의 마음을 울리지 못하고 파편화되어 흩어진다. 형식적인 인사치레와 경청 없는 자기 이야기로 가득한 대화는 어느 비 오는 알링턴파크의 하루처럼 지루하게 흘러간다. 레이철 커스크의 다섯 여자들은 하나같이 ‘자기 자신’은 없이 남편의 ‘아내’, 아이들의 ‘엄마’라는 이름에 갇힌 ‘주부’들이다. 주부의 역할은 충실히 해내지만 아이들에 대한 모성도, 남편에 대한 애정과 신뢰도 결여되어 있다. 그저 맡은 역할을 남들 보기에 멋지게 연기할 따름이다.

참으로 무료한 하루가 길기도 했다. 줄리엣은 자신을 죽인 남편이 아끼는 긴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버렸지만, 어맨다는 죽기 직전까지 자신이 차갑다고 비난한 할머니의 말에 상처받았지만, 솔리는 곧 아이를 하나 더 출산하겠지만, 크리스틴은 저녁 만찬에 사람들을 초대하고서 잠시 자기 확신을 흔들렸지만, 메이지는 잠깐 아이들을 상대로 분노를 폭발했지만, 내일도 오늘처럼 소소한 일들로 하루를 채울 것이다. 하지만 내일은 알링턴파크에 비가 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따스한 햇살이 간지럼을 태우는 날이었으면 좋겠다. ‘완벽한’ 하루가 아니어도 좋으니 별 이유를 찾지 못하는 불만으로 점철된 가운데도 ‘행복한’ 순간이 빛나는 하루였으면 좋겠다.

별 부족함 없이 여유롭게 살아가는 알링턴파크 여자들의 고민과 불만과 상념은 호사스러운 액세서리처럼 여겨질지도 모른다. 하루하루 살아내기에 급급한 사람들에게는 눈살 찌푸려지는 푸념일 것이다. 사실 나도 그녀들이 끊임없이 쏟아내는 이야기들에 전적으로 공감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나는 ‘빵만으로는 제대로 살 수 없다’고 외치는 그녀들에게 강한 연민을 품는다. 이것이 부유해도 만족스럽지 못한 허례허식 가득한 현실을 벗어나 진정한 행복을 찾아가는 그녀들의 첫걸음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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