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 퍼즐 픽션 Puzzle Fiction 2
드니 게즈 지음, 최정수 옮김 / 이지북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제로는 개념이다. 인간의 손가락이 열 개인 덕분에 십진법을 사용한 이후 수(數)의 역사는 제로를 발명하기 전 까지는 불완전했다. 1부터 9까지의 숫자는 굳이 지금의 형태가 아니더라고 어떤 모습으로건 대체해서 사용할 수 있겠지만 0의 발명이야말로 불완전한 수 체계를 단번에 뛰어넘을 정도로 혁명적인 것이었다. 0은 숫자를 자유롭게 했으며 공간의 제약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0 덕분에 숫자는 무한히 확장되었으며 자유롭게 표기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드니 게즈의 『제로』는 아에메르와 오베이드의 5000년을 이어온 사랑과 거듭된 삶 속에서 숫자 제로를 발견하는 과정을 그린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흙공에서 시작되어 점토판에 기호를 기록하는 것으로 시작된 수의 개념은 천 년의 세월이 지난 우르에서 수를 표현하는 못과 꺽쇠를 이용한 새로운 기호와 기호의 위치를 통해 영역을 확장시킨다. 천오백 년이 흐른 바빌론 왕국에서 숫자는 제로의 모태가 될 수 있는 기울어진 기호의 발명으로 숫자의 위치를 표현하는 선을 제거해 숫자는 보다 자유로운 형태가 된다. 이후 9세기 바그다드에서 부존재를 존재로 간주하는 숫자 0이 발견되고 아홉 개의 기호는 0을 통해 완전한 것이 된다. 오랜 시간 동안 윤회를 거듭하면서 아에메르와 오베이드의 삶은 수와 함께하였으며 수의 기록자였다.

하지만 정작 이 책에는 제로가 없다. 제로의 존재를 의심하는 부분만이 있을 뿐 제로의 발명은 완전히 타인의 몫이다. 바그다드의 모한드는 아홉의 숫자로는 완전하지 못하며 부재를 나타낼 수 있는 기호가 없다는 것을 의심했지만 그 앞에 다가온 것은 인도의 숫자 제로(0)였다. 숫자는 완전해졌지만 이 소설은 그만큼 부족해졌다. 작가는 왜 제로의 발명을 아에메르와 오베이드에게 맡기지 않았을까ς 점토판에 기호를 기록하는 것, 새로운 기호를 발명하는 것, 기호의 위치를 구분하는 줄을 없앤 것도 그들이었지만 제로의 발명에는 미칠 수 없었다. 그만큼 이 소설은 가장 중요한 부분을 슬쩍 넘어가 버렸을 뿐 아니라 수많은 시간을 거친 아에메르는 수의 역사를 기록하는 역사가의 역할 외에의 이야기마다의 큰 연관성은 없어 보인다. 이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아에메르라는 동일한 이름과 현대의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유물들을 내세웠으나 설득력이 약해 보인다.

숫자 제로는 하나의 개념일 뿐이지만 나머지 아홉 개의 숫자들을 완전하게 만들어 주었다. 위치를 표현하는 선 속에 갇힐 수 밖에 없었던 숫자들은 0 때문에 자유로워졌다. 메소포타미아의 숫자를 표현했던 흙공처럼 숫자 제로(0)는 최초의 동그란 흙공 모양의 최후의 숫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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