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랑
이언 매큐언 지음, 황정아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첫눈에 반한다고 했던가. 처음 만난 순간 무작정 이끌리는 사랑은 얼마나 가슴 설레고 달콤한 꿈을 안겨주는 로망스로 다가오던지. ‘-던-’이라고 과거형으로 쓴 것은, 지금은 그것의 이면에 치명적인 독도 함께 공존할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따질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너는 나의 운명’을 절로 운운할 수밖에 없이 단번에 강력하게 끌어당기는 사랑 이야기는 무모하지만 열정적인 순수함으로 먼저 아름답게 다가온다. 하지만 어떤 아름다움이든 파괴될 여지는 언제나 내포하고 있다. 이언 매큐언은 그 파괴의 지점을 너무나 잘 짚어낸다. 그는 빛나는 아름다움으로 여러 겹 포장된 인간의 심리를 그냥 두고만 보지 않는다. 양파 껍질을 한 겹 한 겹 벗겨내듯 빛나는 아름다움 속 어두운 추악함을 들춰내고야 만다.

『이런 사랑』에서 이언 매큐언은 ‘드 클레랑보 신드롬’이라는 강박증으로 ‘첫눈에 반하는 운명적인 사랑’의 허상을 철저히 깨부순다. 특히 상대의 감정에는 아랑곳없이 혼자만의 일방적인 감정일 경우. 드 클레랑보 신드롬의 주체는 ‘거의 만난 적이 없거나 아예 만난 적이 한 번도 없는 대상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강렬한 망상적 믿음’을 가진다. 대상이 미혼이든 기혼이든 개의치 않고, 그가 아무리 무관심과 혐오를 보여도 자기 합리화하여 ‘실제로는’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확신한다. 그 확신에는 결코 흔들림이 없다. 너무나 지독히도 슬프고 끔찍하기 그지없는 착각. 내가 그를 사랑하고 그도 나를 사랑한다는 믿음. 하늘이 두 쪽 나도 변할 수 없는, 변해서는 안 되는 사랑의 정체는 나도, 그도 파괴하는 망상으로 드러난다.

돌풍만 빼면 나쁠 것이 없었던 어느 봄날, 연인인 조와 클라리사의 기분 좋은 피크닉이 망쳐진 순간부터 모든 상황, 모든 심리를 조의 시선으로 빠짐없이 생생하게 묘사해 나간다. 아이를 실은 채 돌풍에 더는 제어되지 않는 헬륨 풍선을 목격하고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이타심에 모여들어 로프를 끌어당겨 지상으로 헬륨 풍선을 끌어내리지만 자기 목숨이 위태롭다는 경고음이 울리자마자 너나 할 것 없이 로프를 놓는다. 나 아닌 다른 누군가가 먼저 그랬다는 환각 혹은 변명에 기대어. 그리고 단 한 사람만 로프에 매달려 있다가 죽음으로 추락한다. 봄날과 어울리지 않는 비극적인 사고는 조의 죄의식과 자기 변명 혹은 합리화로 이어지고, 첫눈에 조를 사랑하라는 숙명을 받아들인 제드 패리의 드 클레랑보 신드롬으로 반전된다. 사랑일까? 제드 패리의 강박적이고 맹목적이며 저돌적인 애정은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제드 패리의 망상적인 성애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조와 그것을 도무지 이해해 주지 않는 클라리사는 정말 사랑했을까? 추락사한 남편의 차에서 여자 스카프가 나왔다는 이유로 외도를 의심한 부인은 정말 남편을 믿고 사랑했을까?

누구나 사랑의 주술에 휩싸일 수 있다. 나는 그이를 사랑해, 머릿속으로 되뇌고 입 밖으로 내뱉으면 정말로 내가 그이를 사랑하고 있다는 느낌이 복받친다. 그것이 진실임을 믿고 싶어지고, 그런 마음으로 믿어버리게 된다. 헛된 사랑의 망상에서 깨어나는 일은, 그동안 공들인 내 사랑이 헛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은 실로 아프다. 더는 그 사랑을 이어나갈 수 없는 불가피한 궁지에 몰리기 전까지는 단꿈에서 헤어나기 어렵다. 문득 사랑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무서워진다. 내 사랑은 ‘사랑’이겠지? 내가 그를 사랑하고, 그만큼 그도 나를 사랑한다는, 이토록 확고한 믿음은 나만의 착각은 아니겠지? 결코 자기최면은 아닐 거야……라고, 또 나를 속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언 매큐언은 단순히 사랑의 측면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드 클레랑보 신드롬을 중심으로 종교와 과학, 이성과 광기, 사랑의 실체를 투과하여 끊임없이 변주하며 인간의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부각한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스펙트럼은 너무나 넓어서 한 호흡, 한 흐름으로 꿰뚫어 정리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어느 측면에서 시작하든 독자의 이야기는 풍성해지고 자칫 중언부언 늘어나기 마련이다. 내가 이언 매큐언에게 감탄을 금치 못하는, 그를 진정한 작가로, 최고의 소설가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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