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평점 :
품절


인간이라는 동물보다 못한 존재에 환멸이 느껴진다.

17 : 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은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34 : 정신을 잃듯 잠 속으로 빨려든 뒤 몇분 지나지 않아, 기억할 수 없는 무서운 꿈에 퍼뜩 눈을 떴다. 꿈보다 무서운 생시가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45 : 체머리 떠는 노인의 얼굴을 너는 돌아본다. 손녀따님인가요, 묻지 않고 참을성 있게 그의 말을 기다린다. 용서하지 않을 거다. 이승에서 가장 끔찍한 것을 본 사람처럼 꿈적거리는 노인의 두 눈을 너는 마주 본다.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 자신까지도.

53 : 똑같은 죽은 몸인데, 누군가의 손길이 남아 있는 그 몸이 한없이 고귀해 보여서 나는 이상한 슬픔과 질투를 느꼈어. 몸들의 높은 탑 아래 짐승처럼 끼여 있는 내 몸이 부끄럽고 증오스러웠어.

76 : 이런 순간엔 자신의 일부를 잠세 떼어놓아야 한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여러번 접어 해진 자국을 따라 손쉽게 접히는 종이처럼 의식의 한 부분이 그녀로부터 떨어져나간다.

77 : 얼굴은 어떻게 내면을 숨기는가 그녀는 생각한다. 어떻게 무감각을, 잔인성을, 살인을 숨기는가.

99 :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122 : 죽음은 새 수의같이 서늘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때 생각했습니다. 지나간 여름이 삶이었다면, 피고름과 땀으로 얼룩진 몸뚱이가 삶이었다면, 아무리 신음해도 흐리지 않던 일초들이, 치욕적인 허기 속에서 쉰 콩나물을 씹던 순간들이 삶이었다면, 죽음은 그 모든걸 한번에 지우는 깨끗한 붓질 같은 것이리라고.

130 : 그러니까 형, 영혼이란 건 아무것도 아닌 건가. 아니, 그건 무슨 유리 같은 건가. 유리는 투명하고 깨지기 쉽지. 그게 유리의 본성이지. 그러니까 유리로 만든 물건은 조심해서 다뤄야 하는 거지. 금이 가거나 부서지면 못쓰게 되니까, 버려야 하니까. 예전에 우린 깨지지 않은 유리를 갖고 있었지. 그게 유린지 뭔지 확인도 안해본, 단단하고 투명한 진짜였지. 그러니까 우린 부서지면서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었단 걸 보여준 거지. 진짜 유리로 만들어진 인간이었단 걸 증명한 거야.

136 : 달은 밤의 눈동자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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