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학교
이윤기 지음, 북디자인 정병규, 정재규 그림 / 민음사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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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정병규 선생이 기획을 하고 삽화는 정병규 선생의 동생인 정재규 선생이 그렸는데요, 저자를 포함해 이 세 분이 모두 만만치 않은 분들이죠. 이윤기 선생은 우리나라 최고의 번역가이며 소설가이구요, 정병규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북디자이너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소설가 한수산의 '부초(浮草)'라는 작품의 표지가 그이 첫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 정재규 선생은 프랑스에서 작품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내용 뿐만이 아니라 책 자체도 아름답습니다. 이 책은 서가에 꽂혀있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책에 실려 있는 글들은 대체로 짧습니다. 그런데 이런 글의 짧음은 눌리기를 하지 못해서 짧아진 것이 아니라 농축된 짧음입니다. 질적인 빈곤함을 양으로 메꾸려하는 태도가 정직하지 못한 것이라면 이 책에 실린 글들의 길이 속에도 긴장이 서려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중국의 유인경이 쓴 '세설신어(世說新語)'의 한 대목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왕휘지는 눈 내리는 밤에 술을 마시고 있다가 문득 대규가 그리웠다. 그는
사공에게 밤새 배를 몰게 하여, 새벽녘에야 대규의 집에 이르렀으나 문도 안 두드린
채 돌아설 것을 명했다. 사공이 왔으면 만나지 왜 그냥 돌아가느냐고 묻자 왕휘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흥에 실려 왔다가 흥이 다하여 돌아갈 뿐이다.(乘興而行興盡而
返)"라고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 저자는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대인은 살고 소인은 쓴다는 말이 있는데 나는 그걸 굳이 써놓기를 좋아하고
이렇게 책 묶어내는 것도 사양하지 못하니 아직은 소인임에 분명할 터입니다 …'
이윤기 선생의 글을 읽을 때마다 경험하는 것이지만 작가는 글을 가벼이 쓰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어느 작가나 글을 가볍게 쓰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이윤기 선생에게 유독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은 작가 내부를 향한 엄정함이 행간에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연극배우 김명곤의 얘기를 인용한 대목입니다.
      '… 소리를 하든, 연기를 하든, 연출을 하든, 자기가 하는 일에 깨어 있어야 하는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직업상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데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한가지 특징이 있더라. 자기가 하는 일에 깨어있더라는 것이다. 저금하는 놈과 공부하는 놈에게는 못당한다는 옛말이 있다. 깨어있는 상태에서 조금씩 조금씩 쌓아가는 전문성, 그걸 뭔수로 당하겠는가…'
      또 김용택 시인의 '백 년을 한 산만 바라보며 나는 살 자신이 있다.'라고 한 말을 인용하면서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영원의 알레고리는 도처에 있습니다. 문제는 영원의 지각범위가 되는 우리의 시력입니다. 영원한 것이 존재하느냐 마느냐 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라고 말이죠. 우이가 영원한 것이 존재하느냐 라고 묻는 어리석음보다는 영원한 것을 지각할 수 있는 우리 내부의 시력에 대해서 성찰해보라라는 훈수인 것입니다.
     거짓은 늘어나려는 반면 참말은 짧아지려는 지향을 갖습니다. 참 글이 참 삶보다는 한 수 아래인 것이겠지만 그러나 참글을 쓰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우리는 저자의 이 짧은 글들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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