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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의 찬양 무보수의 찬양 ㅣ 분도소책 67
쟈끄 러끌레르끄 지음, 박인우 옮김 / 분도출판사 / 1996년 6월
평점 :
우리 시대를 잘 설명하는 말 중의 하나가 지식정보사회라는 말입니다. 현대인이 이 지식정보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창출되는 지식을 습득해야 합니다. 지식을 습득하는데 낙오하면 인간다움, 존엄성마저 훼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이 지식은 이렇게 인간에게 봉사하는 단계를 넘어서서 오만함 마저 띠고 있습니다. 인간을 윽박지르는 것이죠. '배워라. 못하겠으면 비참해지리라!' 라고 떠벌이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인간과 지식 사이의 관계가 역전되고 왜곡되는 단계에서 러끌레르끄 신부는 프랑스의 문필가 알랭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젠 그만 배우라, 생각하라!' 라고 현대인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제 인간을 학습하는 시스템은 너무나 철저하게 구축돼서 심지어는
즉흥적인 일들도 계획적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입니다. 이제 인간이 만든 학습시스템은 스스로에게 올무를 매고 있습니다. 운동을 하지만 체력은 갈수록 허약해지고 수많은 시간을 학습에 투여하고 있지만 인간은 역사에도 무지하고 기억력도 점차 감퇴되고 있는 것이죠.
저자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 세대에서 가장 위험한 것 중 하나가 창조적 노력 없이 교육을 받아들인 졸업장 인생들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노력으로 깨우친 것만을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이죠. 출세를 보장하는 졸업장을 받기 위해 그저 교사가 주는 대로 받아먹기만 한 사람들은 지식의 노예, 졸업장의 노예가 될 위험성이 있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박학다식함에 경탄한 사람에게 이렇게 얘기했다고 합니다. '나는 책에서보다는 성체 앞에서 기도하면서 더 많이 배웠습니다.'라고 말이죠. 또 성자 이씨시의 프란체스코는 스물 다섯 살 때까지 한량 생활을 했던 젊은이였고, 영혼에 대해 뛰어난 통찰력을 가졌던 아르스의 성자 성 비안네 신부도 스무 살이 되기까지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공부를 지지리 못하던 인물이었지요. 저자는 이들이 배우지 못하고 자유로움 속에 놓여 있었던 것이 깊은 통찰력의 배경이 됐던 게 아닌가 유추해봅니다.
저자는 다시 이렇게 힘줘 얘기합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고 바로 인간은 무엇보다도 인간성을 의미하며, 이 인간성은 무엇보다도 정신의 생기요, 창조력이다.'라고 말입니다. 이 인간의 생기와 창조력은 다른 말로 하면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고, 생각한다는 것은 정신이 흐르게 두는 것이며 꿈꾸도록 하는 것입니다. 결국 배우기를 멈추고 생각하기에 들어서는 것이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이라는 게 저자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이밖에도 저자는 무보수의 찬양이란 글에서 무용함, 무보수로 세상을 섬기는 것을 찬양합니다. 대가 없는 행위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행위이며 하나님의 영역 속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저자인 러끌레르끄가 초대하는 게으름의 세계, 스스로 생각하기의 세계, 무보수 삶에 여러분도 조용히 귀를 기울여보시기를 권면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