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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쓸쓸한 당신
박완서 지음 / 창비 / 1998년 12월
평점 :
이 책에는 '마른 꽃', '환각의 나비', '너무도 쓸쓸한 당신' 등 모두 아홉 편의 소설과 한편의 꽁트가 실려 있는데요, 치매노인을 둔 가족의 얘기, 노년에 만난 남녀의 연애 이야기, 이민간 노인들의 얘기 등 주로 노인들의 얘기가 주제로 다뤄지고 있는데요, 작가는 이 작품집에서 노년 세대에 대한 세밀하고 풍부한 묘사로 그동안 우리 문학이 도외시했던 허전한 한부분을 잘 메꿔주고 있는데요, 노년의 삶과 문학이 이렇게 즐겁게 만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줍니다.
노년기의 연애 이야기를 그린 '마른 꽃'이란 글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글의 화자인 노년의 여성이, 점잖고 우아해 보이는 노신사와 노부인이 바텐더를 마주보는 스탠드에 앉아 크리스탈 잔을 부딪히며 천천히 술을 마시는 장면을 보면서 저 나이가 되어야 비로소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진정한 화해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여전히 자신에게도 가슴의 울렁거림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장면이죠. 그러나 이 주인공은 여전히 젊었을 때와 다름없는 연애감정을 느끼면서도 그 속에 정욕이 비어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정서로 충족되는 연애는 겉멋에 불과하고 자신은 노년에 만난 새로운 이성과의 만남을 그럴듯한 겉멋을 부려본 것으로 치부하고 맙니다.
'길고 재미없는 영화가 끝나갈 때'라는 작품은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을 둘러싼 노부부와 그 자손의 표정을 마치 한 장의 잘 찍은 사진처럼 그려내고 있습니다. 평생을 시부모 공양과 남편의 난봉질 속에서 인고의 세월을 보내던 주인공의 어머니는 고생이 걷힐 무렵에 불치의 병에 걸려 시한부의 인생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내가 시한부의 삶을 살게됐다는 것을 알게된 남편으로부터 태어나서 처음으로 애정고백을 듣고 행복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런 속사정을 모르는 아들의 입장에서는 어머니의 죽음을 기다리는 심정이 마치 '길고 재미없는 영화의 끝을 기다리는' 심정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밖에도 이 작품집에는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어머니를 모시려는 딸의 애달픈 노력, 그리고 치매 어머니와 점쟁이 처녀 사이의 화해를 그린 '환각의 나비', 나이가 들수록 추레해지는 남편의 모습을 애증의 시선으로 쳐다보는 아내의 모습을 묘사한 '너무도 쓸쓸한 당신' 같은 작품들이 있습니다.
이 단편집은 작가의 일곱 번째 창작집이 되는데요, 저자는 이 책의 서문에서 '늙은이 너무 불쌍해 마라, 늙어도 살맛은 여전하단다, 그래주고 싶어 쓴 것처럼 읽히기도 하는데 그게... 내가 아직도 사는 것을 맛있어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저절로 우러난 소리 같아서 대견할 뿐만 아니라 고맙기까지 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저자가 이렇게 자기작품에 대한 만족감을 표시하는 것도 이례적인데요, 책을 읽다보면 저자의 이런 만족감이 괜한 것이 아님을 금방 느낄 수 있습니다. 아울러 말씀드릴 것은 이 책에는 즐거움과 함께 가슴 속에 묵직하게 드러앉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저자의 삶의 대한 통찰력에서 오는 것이죠. 이 책을 읽는 독자들께선 부디 이 묵직한 그 무엇을 이 책에서 반드시 챙겨가시기를 바란다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