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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을 보는 눈
허태수 / 당그래 / 1998년 10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쓰신 허태수 목사님은 춘천에서 성암교회를 담임하고 계신데요, 이전에도 이미 '삶은 금식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존재의 가벼움에 이르는 명상', '거기 시들지 않는 기쁨이 있으니' 같은 책들을 내셨구요, 이번에는 오늘 소개해드리는 '여백을 보는 눈'이라는 책과 '자기포기'라는 책을 동시에 발표했습니다.
춘천은 무척 아름다운 마을입니다. 소양강변에 가면 눈물나게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볼 수 있구요, 서울 같은 대도시처럼 귀퉁이까지 꽉 막힌 것이 아니라 중심만 조금 번잡할 뿐, 변두리는 산과 강을 향해 확 트여있어서 자연과 문명을 더불어 누릴 수 있는 공간입니다. 저자가 시무하는 성암교회는 도심보다는 변두리 쪽으로 중심이 향해 있어서 맑은 공기가 넉넉한 곳입니다. 여백을 보는 눈이란 책은 이런 환경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책에는 모두 192가지의 작은 얘기들이 실려 있는데요, 일부를 소개해보겠습니다.
'춘천은 닭갈비와 막국수 외에도 인형극 축제와 판토마임으로도 이름이 났다. 마임배우 유진규도 춘천에 산다. 며칠 전에 만난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드라마나 연극, 영화 같은 것들은 말로 하지만 판토마임은 순전히 몸으로만 해야 합니다. 말은 일절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를 믿는 것도 판토마임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말로 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 보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글도 있습니다.
'...목사님 이제 기적이 일어나겠지요?.. 그럼요. 하나님은 늘 막다른 골목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지요.. 나는 집사님께 그렇게 대답했었다. 그때는 집사님이 말하는 기적이 유방암에서 고침을 받는 것으로 생각을 했었다. 그때 그녀는 이미 숨쉬는 것이나 몸을 움직이는 것이 전혀 자유롭지 않았었다. 거의 생명이 꺼져가는 상태였다. 그리고 얼마 후 집사님은 하늘나라로 가셨다. 알면서도 살 가망이 없는 줄 알면서도 이제 기적이 일어난다고 하던 집사님의 말을 이제야 알 것 같다. 그에게 있어서 기적은 유방암이 낫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드디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그에겐 기적이 아니었을까?'
또 이 책의 102쪽에는 아무 글도 없이 책 한가운데 큰 점을 찍어놓고는 이렇게 적어 놓습니다. '점 밖에 보이지 않는다면 난 아직 멀었군 하고, 흰 여백이 그대를 보고 웃거든 기뻐하라. 꿈을 깼으므로...' 이 책의 제목인 여백은 보는 눈은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죠.
이 책은 마치 우리시대의 복음서를 읽는 느낌을 줍니다. 복음서의 비유가 대부분 삶의 언어로 기록된 것처럼 이 책은 많은 작은 얘기들도 주변의 삶에서 채취한 생활언어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의 나이는 이제 불혹을 갓 넘었습니다. 언어의 성숙함은 물리적인 나이에서 오는 게 아니라면 저희들은 허태수 목사에게서 삶을 깨우는 말들이 앞으로도 샘솟듯 계속 솟구쳐나올 것을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