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어른노릇 사람노릇 - 개정판
박완서 지음 / 작가정신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요즘 시대에 60대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드문 일이 돼버렸습니다. 농경시대에 60대는 집안의 어른으로 공동체의 권위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때론 60대의 권위는 아랫 세대에게 억압의 상징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 우리 시대의 어른들은 젊은 세대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견디기 어렵게 됐습니다. 60대에겐 사나운 시절이 온 것이죠. 그러나 60대의 목소리까지 무용지물이 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시대가 첨단을 향해 발전해갈수록 경험은 같은 무게로 뒤를 받쳐줘야하는 것인데요. 안타깝게도 우리는 앞을 향해서만 흘러갈 뿐, 뒤를 돌아볼 여유를 상실했습니다. 이런 시대에 반가운 책이 나왔습니다. 이제 원로로 불러도 될 것 같은데요. 31년생 소설가 박완서 님이 쓴 산문집 '어른노릇 사람노릇'이란 책이 바로 그 책입니다.
이 책에서 박완서 선생은 자신의 세대를 '여름엔 쉰 밥을 씻어먹고 겨울이면 구들장 밑에 살인가스를 깔고 자도 윗목에서는 걸레가 어는 취위를 견딘' 세대라고 말합니다. 또 이분들은 전쟁과 궁핍의 세월을 온몸으로 겪어온 세대이며 슬프게도 자랑거리가 없는 세대라는 자평합니다. 그런 이들이 최근의 IMF 시대를 바라보는 심정은 다른 세대에 비해 각별할 것입니다.
작가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삼풍백화점, 성수대교의 붕괴, 아현동의 가스폭발, 이렇게 끝도 없이 이어지는 부실사회에 대해 우리는 의무처럼 격앙된 분노를 보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아무리 분노해봤자 나만 손해라는 구경꾼의 입장으로 다시 돌아오고 말게되고 이렇게 '신속한 망각과 체념을 부추기는 거대하고도 조직적임 힘' 같은 것을 느끼면서 작가는 결국 '왜 우리는 분노조차 아무런 뒤끝 없이 부실하기만 한가'라며 통탄의 심정을 토로하고 맙니다.
새로운 세대인 손녀에게는 어쩔 수 없이 잔소리꾼을 자처합니다. 소풍을 가서는 우르르 자판기에 달려가서 차가운 음료수 깡통을 빼오고, 다 마신 뒤에는 깡통을 찌그러트려서 축구놀이를 하더니 나중에는 쓰레기통에도 버리지 않은 채 돌아나오는 손녀를 향해 따끔한 야단을 치고 지하철 안에서는 쌍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주고받는 청소년들을 바라보면서 마음이 저려오는 것을 숨길 수 없습니다. 작가는 싸구려나 헌옷을 입어도 기죽지 않을 늠름한 세대들의 탄생을 꿈꾸며 이들과 손잡고 산과 들로 꽃과 나무의 이름을 가르쳐 줄 기대를 마음에 품고 삽니다.
바깥세상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가슴앓이를 하면서도 또 마음 안으로는 어느덧 성큼 다가온 죽음을 연습합니다. '내가 꿈꾸는 나의 죽음'이란 제목의 글에서 하루 생각의 반을 죽음에 대해 할애한다고 고백하는 작가는 죽을 때 받을 고통을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죽는다는 것이 무(無)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대자연의 일부로 환원되는 것임을 꿈꾸며 꽃의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의 가슴을 스치는 바람으로 자식들과 다시 만나게 될 것을 기대합니다. 이렇게 이 책에는 60대가 갖는 엄숙한 질책과 진지한 고민이 담겨 있습니다. 아마도 공동체의 고난을 처음으로 겪게되는 청년들로서는 60대의 이런 충고와 질책이 이제는 더 이상 나이든 사람들의 노파심으로만 다가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녁노을이 지는 모습이 하루 중 가장 아름답다고 하죠. 또 백발은 인생의 면류관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인생을 소모하지 않고 잘 축적해서 성숙한 인격을 이룬 박완서 선생님의 낮은 목소리...'어른노릇 사람노릇'을 여러분께 소개해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