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박한제 / 한길사 / 1997년 11월
평점 :
품절


누구나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글 이전에 생각이 있고 생각은 머리와 가슴 속에 정리되지 않은 말들로 고여있다. 그러다가 머리와 가슴이 생각과 말을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넘쳐나게 될 때 사람은 비로소 펜을 들거나 피시의 모니터에 불을 켜고 키보드를 두둘겨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되면 그 사람은 비로소 글 쓸 자격을 획득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46년생인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교수인 박한제(朴漢濟)는 나이 50에 이르게 되면서 드디어 가슴 속에 고여있던 마음의 글들을 쏟아내기 시작하였다. '나의 오십자술'이란 부제가 붙은 '인생'이란 제목의 자서전은 이렇게 해서 탄생한 책이다. 서울대학교 교수라는 번듯한 자리를 빼고나면 저자에게 이렇다하게 '튀는' 구석이 없다.

오히려 160센티미터를 조금 넘는 작은 키 때문에 맞선 본 여성에게 퇴짜를 맞아 깊은 상처를 입은 경험이 있고 집 안에는 '20년이 넘도록 쓰는 싱크대와 10년이 넘은 텔리비젼, 15년을 써온 선풍기, 12년이나 된 가스레인지'를 두고 사는 구식 성격에, 손을 사용하는 모든 운동에는 가능성을 전혀 보이지 않는 문제투성이의 인물이다. 게다가 강박증마저 심해서 평소의 우수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시험에는 번번이 떨어져 서울대학교도 여러 차례 실패한 끝에야 겨우 입학에 성공하더니 결국은 그의 마지막 시험이 될 지 모르는 운전면허시험에마저-그것도 서울대학교 교수 신분으로 상당한 준비를 한 끝에 치른 필기시험에서-낙방하는 낭패를 겪게된다. 저자의 이런 부끄러운 이야기들은 이 책에 숨김없이 자발적으로 폭로되고 있다. 독자는 예상치 않았던 '서울대학교 교수'의 연속되는 실패담에 못된 쾌감마저 느끼게 된다.

그러나 독자의 이런 '못된 쾌감'은 곧 잔잔한 감동으로 이어진다.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에게도 잘난 점과 못난 점은 다 있게 마련이고 우리네 인생은 이렇게 잘난 점과 못난 점을 함께 지고 사는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저자의 내성적인 성격은 말을 아낀 대신 깊은 생각을 하게 했고 이를 통해서 볼 것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게 된 것이다.

책을 읽다가 필자가 밑줄을 그어놓은 글들 중 일부를 옮겨본다. ''젊은 날 면책될 수 없는 우행과 거짓에서 비롯된 고뇌'는 해소되지 않고 아직도 가시처럼 나의 가슴을 찌르고 있다. 이 거짓의 세워에서 해방되는 날은 언제인가? 나도 진실 속에서 조용히 살고 싶다',('망각과 거짓말' 중에서)
'...노여움보다 더 아픈 것은 허무함입니다. 정조와 충절은 한번 잃으면 그만인 것입니다...'('정희성 시인에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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