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의 찬양 분도소책 35
러끌레르끄 지음, 장익 옮김 / 분도출판사 / 1986년 1월
평점 :
절판


밀란 쿤데라는 소설 '느림'에서 이렇게 탄식한다. '...어찌하여 느림의 즐거움은 사라져버렸는가? 아, 어디에 있는가... 옛날의 그 한량들은? 민요들 속의 게으른 주인공들, 이 방앗간, 저 방앗간을 어슬렁거리며 총총한 별아래 잠자던 그 방랑객들은? 시골길, 초원, 숲속의 빈터, 자연과 더불어 사라져버렸는가?...'

그렇다. 이제 음풍농월(吟風弄月)하던 시대는 우리를 떠나갔다. 통신과 교통수단의 획기적인 발달은 20세기 말의 현대인을 광기 어린 속도세계 속에 떨어뜨렸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지식산업, 지구촌을 네티즌으로 묶는 컴퓨터 통신망의 빠른 확장, 도시화로 인한 과밀경쟁사회... 현대인은 이 엄청난 속도사회에서 심한 피로를 느낀다. 이제 우리는 과학기술이 창출한 이 놀랄만한 속도사회가 인류에게 축복인가 아니면 재앙인가를 진지하게 따져볼 때가 왔다.

벨기에의 철학자이며 사회학자요, 또 법학자이며 신학자인 쟈끄 러끌레르끄는 '게으름의 찬양'이라는 아주 짧은 책에서 현대의 속도사회를 향하여 따끔한 일침을 가한다.

'...우리 시대는 치열한 생활을 자랑하고 있는데, 치열한 생활이란 실상 소동의 생활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의 상징 또한 경쟁이고 보면, 뛰어났다고 과시하는 온갖 발명 역시 슬기의 발명이라기보다는 모두 속도의 발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이 제대로 인간적이라면 거기에는 느림이 있어야 합니다. .. 일이나 힘씀은 역시 쉼에서 비롯되고 쉼에서 그쳐야 하는 법이고, 위대한 업적이나 크나큰 기쁨은 뛰면서는 이루어질 수도 음미되는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러끌레르끄는 계속 이야기한다.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보다는 짧은 시간에 얼마나 많이 여러 곳을 다녔는가가 더 중요한 것이 되어버린 여행, 안내인의 소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정해진 작품을 보고 공식처럼 따라다니는 설명만 듣고오면 그것이 곧 감상이 되고 마는 현대인의 미술관 관람.... 그러나 글을 쓸 때도 뭔가 생각할 만한 내용을 써내려갈 때는 자판을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겨야 한다. 이것이 인간다운 속도이다.

이제 여름휴가철이다. 우리는 또 어디서 무엇을 하며 이 휴가를 보낼 것인가. 또다시 차로 열 몇시간을 달려서 바글바글한 사람들 속에 뒤섞여 약간의 쾌락에 몸을 맡기려는가... 아서라! 이번 여름휴가 만은 느릿느릿 몸을 움직이며 음풍농월로 지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