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러스킨의 드로잉
존 러스킨 지음, 전용희 옮김 / 오브제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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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생활은 내 관심사를 탐색하는 시기였다. 이과계열의 전공 내에 갇힌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고자 인문학 전반에 기웃거려보기도 했고, 마음의 위안이 될 수 있는 진심어린 취미도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양한 시도를 통해 몇 가지 새로운 관심사를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시사 등 사회 시스템 전반에 지대한 흥미를 느꼈고, 경제학적 상식을 요구하고 있었으며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에 대해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찾아낸 또 하나의 영역은 바로 그림에 관한 것이었다. 거장의 그림이든, 아마추어 작가의 습작이든 특정한 속성의 그림과 조우했을 때, 정체모를 설렘의 파동이 요동쳐오곤 했다. 허나 가슴 속에서 느껴지는 벅찬 감정의 기제를 설명하기엔 그림에 관한 나의 지식이 너무 짧았다. 내가 어떤 그림과 디자인에 흥미를 느끼는가 하는 설렘의 실체를 손아귀에 움켜쥐기 위한 여로는 2년 내내 이어졌고, 말미에 이르러서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 정체는 한가지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그림의 감상과 관련된 관심은 그림을 그려내는데 대한 관심과 발걸음을 나란히 하게 되었다. 특이했던 점은 감상에서 감동을 얻는 객체와, 이를 내 손으로 표현해내고 싶은 객체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는 점이다. 설렘의 대상으로 규정된 몇 가지 요소 중 단 한 가지에만 직접 표현에 대한 욕심이 들었다. 그것이 바로 일러스트레이션, 좁게 보자면 손그림, 스케치, 드로잉 등으로 이름 붙여질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 연유로 드로잉의 기술을 제시하는 책들을 쫓아다녔고, 이 책 ‘존 러스킨의 드로잉’에 이르게 된 것이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기술보다는 사물을 관찰하는 시각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학생들이 자연을 관찰하며 그것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가르쳐주기보다는 드로잉을 통해 어떻게 자연을 사랑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싶다. p.9

‘존 러스킨’의 명성에 현혹되어, ‘드로잉’이라는 단어에 매료되어 이 책을 선택했다. 허나 이 책은 드로잉의 기술에 초점을 둔 책이 아니었다. 습작을 위한 여타의 드로잉 도서를 보면 그려내는 과정을 풍부한 삽화로 설명하며, 쉽게 따라할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을 잡는 것이 보통이다. 허나 이 책은 존 러스킨의 드로잉 기술에 대한 강의를 옮겨둔 듯 디테일한 습작 과정을 글로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어서 실제에 적용하기에는 상당히 힘이 든다. 저자의 접근 또한 드로잉 능력의 기술적 성장보다는 드로잉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의 확립에 좀더 힘을 준다. 드로잉 능력의 배양만을 위해 이 책을 좇았던 내 자신이 세속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을 정도다.  

각종 학문에 입문하기 전에 필요한 교양이란 것이 으레 있기 마련이다. 관련된 기초 지식이 될 수 있고, 필요한 마음가짐이나 관점이 될 수도 있으리라. 사실 입문서의 성격을 띠는, 수위 ‘원론’이라고 이름 붙여지는 것들은 대개 실제 활용에 선행 되어야 하는 기초 지식들을 나열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지루하기도 하고 ‘이 책을 꼭 봐야하는가’하는 효율성의 문제에 직면하기도 한다. 허나 기본이라는 것은 분명 최종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올바른 표지가 되며 반드시 거쳐야 할 기항지와 같은 존재이다. 드로잉의 입문서인 이 책이, 드로잉을 막 시작하려는 현 시점에서는 시간이 조금 아까울 지도, 원론적인 내용에 조금은 괴로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후에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서는 상당히 뿌듯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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