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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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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간은 따스하고 시간은 차갑다. 정들수록 아늑한 공간과는 달리,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은 변주도 되풀이도 마찬가지로 두렵다. 제아무리 의지로 계획한들 어쩌란 말인가. 시간은 어느 때고 다가오고야 말 것을. 내 할아버지, 미카게 할머니의 죽음같은, 깜박이다 꺼져가는 소멸의 시간들.  

  암울하고 쓸쓸한 이 산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오직 한가지가 빛나는 것이라는 걸 안 때가 언제였을까.
 
언젠가는 모두가 산산이 흩어져 시간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p30)

  복도를 걸어가는 발자국 소리, 화면에 썼다 지운 무수한 글자들, 개수구로 흘러가는 비누거품... 그런 것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영영 사라져버리는 것은 없다고, 바위는 먼지가 되고 물은 피가 되듯, 보이지 않게 된 모든 것들도 어디엔가는 있을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진리, 궁극적인 힘, 뭣 보담도, 낙관적이니까. 하지만 이젠 바나나의 말도 옳다고 인정한다. 죽음의 잔상이 신경을 건드릴 땐 더더욱. 길을 비추던 가로등이 깨어져버리고 없는, 길고 캄캄한 골목길에 주저앉게 되는 막막함. 사라졌든 남아있든, 알 수 없어 포기해버린 진리의 저울에 나를 놓으니, 왼쪽 접시가 기운다. 회복할 수 없는 사랑으로 인해, 어쨌거나 지금은 삶이 슬픈 것이다. 
  
  죽음을 대하면 달라지지 않느냐고, 책을 건네며 친구가 묻는다. 삶을 반추할 여력같은 것? 글쎄...생의 의미를 접는 일은 아무래도 죽은 자의 몫일 뿐, 남은 자들은 판단중지의 세월을 그저 사는 거 아닐까. 빈 자리를 인정하는데만도 충분히 오래, 혼돈스러운 시간과 맞서야 할테니까. 시간의 공포를 이기려 애쓰다보면, 질문할 필요도 없이 삶은, 등짐처럼 무겁게 그러나 익숙해져 있는 것이 아니겠냐고. 사랑을 잃고 키친을 벗삼아 자는 미카게의 바닥. 냉장고 소리로 달래려 애쓰는 밤의 고독. 그 세월을 견뎌내려면 또다시, 더욱 깊이, 마지막까지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 이해한다, 진부하나마. 그런 반복이 生의 법칙이라면, 사랑이여, 내게도 와 주렴. 조금 더 급히.

  차가운 시간도 상처를 다하면 새살을 주는 법. 천애고아인 미카게라도 조금씩 흉터를 밀어올리는 힘은 있고, 살아야 할 이유는 끝에 매달려 반짝인다. 진짜일까. 때로 그렇다 여길뿐, 아직 다는 절망해보지 못한 탓인지, 절망의 끝에서 반드시 희망을 만나게되는 삶의 기적에 대해, 바나나와 코엘류와 오스터의 주인공들에 대해 나는 또 의심해본다. 하지만 믿자. 믿음을 다해도 흔들리는 것이 삶이니까. 만약 진짜로 그런 기적이 있다면, 아흔 생을 함께 한 빈 방의 할머니께 기적은 어떻게 다가가고 있을까. 지금은 절대 아닐거라는 생각이, 잠든 미카게의 키친으로 공허히 따라가 눕지만.

  저리고 펴는 심장, 흐르고 멎는 바람, 떴다 감기는 눈꺼풀, 쥐고 펴는 손가락. 결국은 하나인 양면. 짧고도 가볍게 소멸을 향한 징검다리를 놓아준 바나나에게 고맙다는 말 전한다. 미카게도 유이치도, 사츠키도 우라라도 아마 다 고마워 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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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에 아픈 사람 민음의 시 120
신현림 지음 / 민음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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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의 폭동, 행복한 쓸쓸함이라..참 속편하게도 택해 썼군. 책을 덮으려는데 뒷표지에 적힌 발문들이 어째 좀 성의없고 얄팍하다는 생각에 씁쓸하다. 애써도 사랑은 외롭고, 갈구하는 것들은 떠나고, 한끼 때우는 일은 우울한.. 생각해보면 그런 날들의 쓸쓸함은 행복하지도 않았고, 폭동같은 희망에 휩싸이는 일도 없이 다만, 절절한 두려움으로 목메는 일이 더 많았기 때문인데, 아마 그녀도 나와같은 심정이 아니었을까. 참신한 행복으로 전복되는 쓸쓸함, 외로움, 가난, 아픔, 그런 일상이라니. 쳇!

  더이상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지지> 않는 그녀는, 이번 시집에서 징하게 서글프고, 약하지만 강한 다른 모습으로 변해있다. 싱글과 맘의 결합에서 일어나는 절박한 삶의 씨너지. 행복해도 아프고, 아파도 희망을 가져야하는 운명. 그래서인지 그녀의 시는 때로 홀로 울었을 우리 엄마같기도 하고, 총체적으로 부실한 나같기도 해서 만약 그런 그녀가 홀로 빗속에 있거나 마음이 강바닥처럼 어두워져 있거나 수평선을 물들이며 울고있다면  사막의 눈먼 검객 황약사처럼 복사꽃 핀 어느 날, 취생몽사를 들고 찾아가 천지분간 못할만큼 마셔도보고 싶다. 언젠가 잘못보낸 시간의 보복인 불행, 흐느끼는 키스, 변하여도 사랑인 사랑, 해질녘에 아픈 사람과 평화의 빵나무, 그 모든 시간의 모래 위로 잔을 돌리며.

  당신이 잘지내길 빕니다. 다시 힘내는거에요. 작별할 때가 되면 나도 그녀에게 하얀 빨래처럼 웃어주면서. 나도 힘든 내자신을 꿰뚫고 가는 세상의 모든 싱글들이여, 원더풀 유어 라이프! 건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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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특별판)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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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아 사막에서 길을 잃었어. 모래 위에 당신 이름을 쓴다. 난 사막이 좋아. 당신 이름을 쓸 자리가 많으니까"-1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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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토끼
앤디 라일리 지음 / 거름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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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획적인 죽음은 없다. A.알바레즈의 <자살의 연구>에 따르면 오랫동안 자살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사람도 반드시 죽음의 의지끝에는 구원의 실마리를 남겨둔다고 한다. 열어 둔 가스밸브 밑에서 잠이 들더라도 몇 분 후면 방문하게 될 검침원을, 무의식은 기억하고 있다는 것. 앤디 라일리의 토끼는 그런 의미에서 자살토끼라기보다는 구원해야 할 토끼에 가깝겠다. 이토록 잔인하지만, 풍부하고도 가벼운 상상력은 죽음보다는 삶에 더 잘 어울리니까.

"죽는게 무서운 건가, 정상적인거지... 사람들은 원래 다 죽잖아" 죽음을 앞 둔 남자 주인공이 내뱉는 대사. 그렇다해도 여자의 표정은 나아지지 않는다. 죽음이란 원래 가는 자의 몫이 아니라 남겨진 자의 몫이니까.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았던 중세에는 죽은 자를 보내는 일이 종종 공동체의 축제처럼 치러졌다고 하지만 우리들의 죽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보내봤던 사람은, 아니 그래보지 않아도 안다. 어쩌면 죽음보다도 슬픔이 더 정상적이라는 사실을.

  그런데도 나는 왜 웃고 있는 걸까. 사람이 아닌 토끼라서? 하는 일마다 엽기 똘짓이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뭣보담도 제일 큰 이유는 그럴 수가 없다는 것. 입에서 감탄이 절로 새어나오는 이토록 기막힌 죽음의 방법들 중 단 한가지라도 가능만 하다면 토끼는 여지없이 죽어버릴 것이다. 하지만 " 나 이렇게..또 이렇게..아니면 이렇게라도 죽어버린다" 고 외치는 토끼는 죽을수가 없다. 정말로는 죽고 싶지 않았던, 오히려 더욱 살고 싶었지만 나를 혼쭐내시는 엄마에 대한 복수로, 억울한 세상에 대한 불타는 응징으로써, 어릴 적 내가 상상했던 발칙한 죽음들은 그 이유를 알 것이다.

 내미는 손은 얻을 권리가 있고, 우리는 그 앞에 무엇이라도 꺼내보일 의무가 있다. 별짓을 다 해도 살아남을 토끼라고 해서 이처럼 열렬한 자살의 열망 앞에 마냥 따라가며 실실 웃기만 할 수 있겠는가. 삶을 파괴하는 모든 미친 것들을 그 자리에 끼워넣고 우리의 자살토끼를 구해오는 일. 기다리게, 친구!  나도 뭔가 해 줄 일이 있을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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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niz 2005-01-01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저 그림이... 저 뾰족하게 솟아오른 하얀 것 두 개가 그것이란 말이지 토스트기에는 어떻게 들어갔을까나...신통하시......

잠팅 2005-01-05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꿀꿀한 날엔 저 토스트기에라도 들어가, 삶이 좀더 건조해지고 바삭바삭해질때까지 앉아있다가 마른 식빵처럼 통통!! 튀어나와 보고도 싶답니다

deniz 2005-01-08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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