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토끼
앤디 라일리 지음 / 거름 / 200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계획적인 죽음은 없다. A.알바레즈의 <자살의 연구>에 따르면 오랫동안 자살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사람도 반드시 죽음의 의지끝에는 구원의 실마리를 남겨둔다고 한다. 열어 둔 가스밸브 밑에서 잠이 들더라도 몇 분 후면 방문하게 될 검침원을, 무의식은 기억하고 있다는 것. 앤디 라일리의 토끼는 그런 의미에서 자살토끼라기보다는 구원해야 할 토끼에 가깝겠다. 이토록 잔인하지만, 풍부하고도 가벼운 상상력은 죽음보다는 삶에 더 잘 어울리니까.

"죽는게 무서운 건가, 정상적인거지... 사람들은 원래 다 죽잖아" 죽음을 앞 둔 남자 주인공이 내뱉는 대사. 그렇다해도 여자의 표정은 나아지지 않는다. 죽음이란 원래 가는 자의 몫이 아니라 남겨진 자의 몫이니까.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았던 중세에는 죽은 자를 보내는 일이 종종 공동체의 축제처럼 치러졌다고 하지만 우리들의 죽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보내봤던 사람은, 아니 그래보지 않아도 안다. 어쩌면 죽음보다도 슬픔이 더 정상적이라는 사실을.

  그런데도 나는 왜 웃고 있는 걸까. 사람이 아닌 토끼라서? 하는 일마다 엽기 똘짓이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뭣보담도 제일 큰 이유는 그럴 수가 없다는 것. 입에서 감탄이 절로 새어나오는 이토록 기막힌 죽음의 방법들 중 단 한가지라도 가능만 하다면 토끼는 여지없이 죽어버릴 것이다. 하지만 " 나 이렇게..또 이렇게..아니면 이렇게라도 죽어버린다" 고 외치는 토끼는 죽을수가 없다. 정말로는 죽고 싶지 않았던, 오히려 더욱 살고 싶었지만 나를 혼쭐내시는 엄마에 대한 복수로, 억울한 세상에 대한 불타는 응징으로써, 어릴 적 내가 상상했던 발칙한 죽음들은 그 이유를 알 것이다.

 내미는 손은 얻을 권리가 있고, 우리는 그 앞에 무엇이라도 꺼내보일 의무가 있다. 별짓을 다 해도 살아남을 토끼라고 해서 이처럼 열렬한 자살의 열망 앞에 마냥 따라가며 실실 웃기만 할 수 있겠는가. 삶을 파괴하는 모든 미친 것들을 그 자리에 끼워넣고 우리의 자살토끼를 구해오는 일. 기다리게, 친구!  나도 뭔가 해 줄 일이 있을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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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niz 2005-01-01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저 그림이... 저 뾰족하게 솟아오른 하얀 것 두 개가 그것이란 말이지 토스트기에는 어떻게 들어갔을까나...신통하시......

잠팅 2005-01-05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꿀꿀한 날엔 저 토스트기에라도 들어가, 삶이 좀더 건조해지고 바삭바삭해질때까지 앉아있다가 마른 식빵처럼 통통!! 튀어나와 보고도 싶답니다

deniz 2005-01-08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