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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불쾌함

 

박용준

 

“청춘―청춘은 불쾌하다. 그때는 어떤 의미에서 보아도 생산적이라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539절

 

 

 























 

 

청춘(靑春)이라는 시간은 분명,

‘푸른 봄(푸를 청, 봄 춘)’이라는 본래의 뜻이 무색하게

어둡고 쓸쓸하여 불쾌하다.

어느 것도 정해진 것 없이 떠도는 이 헛된 젊음은

불안하고 두렵고 가난하기 때문이다.

청춘을 미화하는 많은 수식어들은 그래서

비릿하기 짝이 없다.

그 어느 것 하나 내 청춘의 은밀한 열정을

위로해주지 않으니,

푸른 봄(靑春)의 하늘은 되려 무정하리만치

차갑고 앙상하기만 하다.

 

사랑은 늘 실패하고, 희망은 여전히 묘연하다.

그래서 청춘의 봄은 곧 밤이다.

 

 

 

 

 

 









 

“10 밤의 여행자들

당신은 사는 게 힘겨워져 밤마다 어디론가 떠나는 꿈을 꾸었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그 밤을 따라서 한없이 달려가다 보면 누군가를 혹은 당신이 알지 못했던

그 무엇인가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신이 어디론가 달려가는

동안에도 천사들은 쉽게 나타나지 않고, 당신은 수없이 촛불을 꺼트려야 했다.

촛불이 꺼진 캄캄한 어둠 속에서 당신은 오로지 믿을 수 있는 자신의 몸을 더듬어

길을 내고, 새롭게 이 세계의 지도를 그려야 했다.

그럴 때마다 당신은 당신이 숨 쉬는 매 순간의 공기들이 너무 답답해 어디론가

떠나려고 했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허공에다 당신은 매일 간절한 키스를 한다. 그 입맞춤이 대지의 가슴에 닿아

그곳에서 아름다운 나무들이 태어나기를, 그 나무 아래서 사랑하는 사람과

오래 함께 머물 수 있기를 기도한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어느 날 당신은 창밖에 환하게 핀 앵두꽃을 보고 밤이 어디론가 사라진 줄 알았다.

당신은 그 꽃을 보면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에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때로는 음악이 된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다.

그래서 당신은 매일 밤마다 촛불을 켜 들고 어디론가 여행을 떠난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 박정대, 「열두 개의 촛불과 하나의 달 이야기-10 밤의 여행자들」,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중에서

 


















힘겹게 버티듯 걸어가는 청춘의 밤길 끝에는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기다리고 있는 그 무엇이 있기는 할까.

 

간절한 키스는 늘 허공을 향할 뿐이고,

뜨거운 눈물은 새싹하나 꽃피우지 못하고,

대지에 흩어진다.

사랑하는 사람과 오래 머물 수 있기를 기도하는 촛불이

홀연한 연기만을 남긴 채 꺼지고 마는 청춘의 어두운 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팔매질하는 어리석은 나의 청춘은 매일 밤마다 촛불을 켜 들고 어디론가 떠나는 꿈을 꾼다.

그 밤길 속의 나의 한걸음 한걸음이

세계의 지도를 새롭게 그리는 것인지,

제자리를 맴맴 도는 것 것에 불과한지는,

도무지 모를 일이다.

 

 

“청춘은 독보적이어야 하고 혼자만의 길을 열심히 도도하고 고고하고 당당하게 걸어가라. 판에 박힌 듯 한 삶에 얽매이지 말고 약동하는 젊음을 불태워라, 청춘들아.”

- 김열규, 『그대 청춘』 중에서

 




 










도도하고 고고하고 당당하게 걸어가라는 한 작가의 주문은

청춘의 영혼에 별 위로가 되지 않는 말이다.

약동하는 젊음을 불태우려는 나의 사명이

불꽃처럼 산화한들 또 무엇이 그리 문제가 되겠는가.

그래서 청춘이 빚어내는 강렬함과 밀도의 이 시간이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린들 또 무엇이 그리 문제가 되겠는가.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 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

(김수영, <달나라의 장난> 중에서)

 

온몸 곳곳이 아픈 밤이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전문

 


오직 사랑하는 자만이 질투를 드러내는 법이다.

사랑의 희망을 잃은 자는 결코 질투하지 않는다.

 

내 희망의 내용이 비록 질투뿐임을 발견한다 할지라도,

내가 가진 것이 오직 탄식밖에 없음을 알아차린다 할지라도,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나의 청춘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맨다.

이 방황이 절대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청춘이라는 이름뿐이나,

허영과 교만으로 가득 찬 내 청춘의 비열함은

언제쯤 세상에 굴복할 수 있을 런지.

그럼에도 나는 우선 여기에 한 줌의 재로 흩어지고말

헛 것의 짧은 글을

청춘의 기록으로 남겨둔다.

 

껍데기로 점철된 이 헛 것의 글도

오직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용서받을 수 있기를.

행여나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라면,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 없는 책갈피 속에서 떨어지는

그런 종이에 적힌 사소한 글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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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로스적 감각의 근원

 

박용준

 

“엄마가 우 리에게 입을 다물라고 하셨다. 엄마는 자신의 혀끝에서 맴돌고 있는 어떤 단어를 어떻게든 반드시 떠올리려고 안간힘을 쓰셨다. 온몸이 굳어진 엄마는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어원 하나를 건져 올리려고 애를 쓰셨다. …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을 찾고 있는 여자의 앞면에 더 이상 얼굴은 없다.”

- 파스칼 키냐르, <메두사에 관한 소론>,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 중에서
















 

 

 

 

 

 

 

 

 

 








 말이 멎는 순간이 있다. 아니, 혀끝에서 무언가 맴돌지만 차마 입 밖으로 소리 내지 못하는 그런 순간. 사랑을 고백하기가 힘들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망설임 보다 더 깊은, 그러니까 단적으로 할 말을 잃어버리게 되는, 그래서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도무지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어떤 경험 말이다.


 소리 내어 말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혀의 단련이 필요하다. 새로운 언어를 배울 때의 기억을 떠올려보라. 우리는 혀의 움직임과 위치를 통해 발음하는 법을 배우지 않았던가. 인간의 말(음성)은 혀의 역동적이고 현란한 운동을 전제로 한다. 결국 말을 해야만 살 수 있는 인간의 욕망은 바로 이 혀로부터 시작되고 또 달성된다. (에로스적 행위의 대부분이 혀로 이루어지듯.)


 물론 발설하고자 하는 욕망만이 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손에 잡히는 물건은 우선 입으로 가져가고야 마는 아기의 본능적인 행동과 같이, 또는 사랑하는 여인과의 짜릿한 키스와 같이, 수많은 점막의 돌출물로 이루어진 인간의 거친 혀는 생의 단맛, 쓴맛, 신맛, 짠맛의 생생한 에로스적(사랑의) 감각의 근원이다.


아테나 여신의 성스러운 신전에서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사랑을 즐기다 발각되어 끔찍한 괴물이 되어버린 메두사. 입 밖으로 축 늘어진 긴 혀와 청동으로 굳어져 버린 손, 뱀으로 된 머리카락과 멧돼지의 이빨을 갖게 된 메두사의 흉측한 얼굴.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가졌던 메두사를 이토록 기괴한 괴물로 만든 것은 과연 무엇일까. 혀의 욕망은 아닐까?


 

“나 는 그를 죽이는 중입니다 / 잔뜩 피를 빤 선형동물, 동백이 뚝뚝 떨어지더군요 그는 떨어져 꿈틀대는 빨간 벌레들을 널름널름 주워먹었습니다 나는 메스를 더욱 깊숙이 박았지요 ...... 나는 또 한번 그를 죽였습니다 / 나를 고소할 수 있는 법정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내 혀는, 그의 입 속에, 비굴하고 착하게 갇혀 있으니까요.”

- 김선우, <만약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중에서
















 

 거짓말을 일삼거나, 허풍을 떠는 것을 두고 우리는 종종 ‘혀를 놀리다’는 표현을 쓴다. 그리고 함부로 혀를 놀린 자의 비극적 최후를 동화 ‘양치기 소년’은 일깨워준다.

마을 사람들에게 늑대가 온다는 거짓말을 일삼다가 결국 진짜 늑대가 나타나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는 이 이야기는 입 속에 갇힌 혀가 가진 어떤 극단적인 힘을 떠올리게 한다. 평균 7cm의 이 혀를 통해 발설된 이야기는 세상에 태어나 허공을 떠돈다. 그리고 허공을 떠돌던 이 말은 때론 칼(메스)이 되어 누군가를 죽이기도 한다.

 무심코 뱉은 말이 화근이 되어 그것이 무성한 소문들로 불어나고, 결국 한 소녀를 죽음으로까지 내몬 오대수(영화 <올드보이>의 주인공, 최민식 분)가 맞는 복수극의 최후는 처참하다. 그것은 바로 직접 자신의 혀를 가위로 싹둑 자르는 것. 영원히 입 속에 갇혀버린 혀. 말도 맛도 잃어버린 오대수에게 주어진 최후의 형벌은 바로 침묵이다.



 

“열 다섯, 나는 시인이 되리라 생각했다. 삶의 그윽한 심연은 시로써만 다가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개의 혓바닥은 이빨 사이로 삐져나와 주둥이를 핥는다. 붉고 긴 혓바닥은 앞발을 핥는다.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삐져나온 내 혀의 욕망을 나는 오랫동안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붉고도 씩씩거리는 욕망, 침이 질질 흐르는 갈급함으로 점철된 붉은 점막들. 이 세계를 핥아주기엔 나의 혀는 턱없이 짧았다. 이런 절망이야 차치하더라도 여전히 앞발에 머물러 있는 내 혀에 대한 반성과 성찰조차 용렬하기 그지없다.

이 세계를 핥을 수 있는 길고 긴 혓바닥은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지상에서 천공까지 한 번에 핥을 수 있는 혀에 대한 욕망은 가끔씩 나를 찾아와 우울하게 한다. 그 우울 속에서도 나는 한 마리 개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못한다.”

- 박대현, 『헤르메스의 악몽』 중에서

 




 

 

 

 

 

 






 


인간의 혀는 도통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 이빨 사이를 비집고 나와, 끊임없이 말을 하고, 맛을 본다. 그러한 인간의 혀가 용서받을 수 있는 순간은 오직 그것이 에로스를 위해 봉사할 때만이 그럴 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상처를, 세상의 고통을, 나의 찢겨진 영혼을, 소리 없이 핥아 주는 것.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옥따비오 빠스는 “시는 앎이고 구원이며 힘이고 포기이다. ... 시는 이 세계를 드러내면서 다른 세계를 창조한다.”고 했지만, 달콤 쌉싸름한 시의 언어는 창조는 커녕 세계를 핥기에 턱없이 짧은 혀에 불과할 때도 허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는 것을 거부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가장 근원적인 형태의 에로스적 행위이자, 세상을 온 몸으로 받아내는 가장 원초적인, 그리고 유일한 단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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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준의 아포리즘

인디고잉 26호



체취의 신뢰감

 

박용준

 

“다소 서툴더라도 문장 하나를 읽었을 때 누가 썼는지 확연히 알 수 있는 시가 있는 반면,

진한 울림을 주더라도 글쓴이의 흔적을 파헤치기 어려운 시도 있다.

전자가 자기 확신과 긍정에서 얻어지는 것이라면,

후자는 오랜 기간의 습작 훈련으로 얻어질 수 있는 일종의 스킬이다.

상당수의 시인들은 후자에 천착하면 전자가 저절로 따라온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매 시대마다 잘 쓴 시는 넘쳐 나지만, 글쓴이의 땀내가 느껴지는 시를 찾기는 쉽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세련을 제련할 수 있을까.

근사한 어휘를 늘어놓고 펀치라인을 곳곳에 배치한다고 해서

언어를 대하는 물리적 태도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언어를 가지고 늘였다 줄였다 부풀렸다 쪼그라드렸다 스트레칭하는 모험을 즐기지 않는 한

태도는 형성되지 않는다.

이를 도외시하면 평생 자기 자신조차 제 시에서 나는 땀내를 맡을 수 없을 것이다.

 

요컨대, 떨림은 순간이고 섬광은 찰나다.

이런 점에서, 결국 남는 것은 스타일이다.

그것은 그림자처럼 신체에서 결코 분리될 수 없고 지문처럼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눈이 감기는 어두운 밤,

어떤 글은, 그것을 읽는 순간 정말이지 눈을 번쩍(!) 뜨이게 한다.

오늘밤은 그의 체취가 담긴 김수영의 글이 그렇다.

 

스타일이란 제련할 수 없는 하나의 세련이다.

그것은 몸의 언어이고, 몸 그 자체가 주는 하나의 충격적 체험과도 같다.

 

“그러나 양식(Typus)은 스타일이 아니다. 스타일은 흉내와

더불어 죽는다.

스타일에는 매 순간 스스로의 부끄러움을 치열한 실존의 열정 속에서 승화시키는 아이러니의 빛이 있다.

키에르케고르처럼 말하자면 스타일 속에는 일반자적 양식

속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단독자적 체취가 생생한 것이다.

그것은 사태의 진실을 향해 유연하고 실제적으로 파고드는

방식에 주력해야 한다.

자신의 스타일로 사실에 충실한 글을 쓰면 그것이 곧

기이하고 새롭게 된다는 것이다.”

- 김영민, 『공부론』 중 「스타일은 양식이 아니다」 일부 중에서


















 

단독자적 체취가 생생히 담긴 스타일리쉬한 글쓰기,

그리고 공부.

스스로의 부끄러움을 치열한 실존의 열정 속에서

승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에서 나는 땀내.

오직 이 땀내 나는 공부, 체취가 담긴 글쓰기만이

의미 있지 않을까.

 

실존을 향한 치열한 열정만이 스타일의 생명을 담보한다.- 김수영, 「체취의 신뢰감」(1966년 7월 시평) 중에서

 


 

 

 

 

 

 

 

 











 

“콕토가 지적한 바 있듯이, 장식적인 스타일이라는 것은 없다.

스타일이 곧 영혼일진대,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 영혼을 형식이라는 몸뚱이쯤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 수전 손택, 『해석에 반대한다』 중 「스타일에 대해」 중에서















 

그렇다! 스타일은 곧 영혼이다.

스타일에 담긴 생생한 에너지와 생명력, 그리고 탁월한 표현력은

곧 영혼의 에너지이자 생명력을 뜻한다.

그것은 결국 삶의 추출물이자 영혼의 섬세한 무늬이다.

의식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인위적 노력에는 스타일이 틈입할 여지란 없다.

스타일은 영혼의 단련과 삶의 세련이 짠! 하고 소리를 내며 만나는 찰나,

섬광처럼 우리의 피부를 때리는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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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박용준의 아포리즘 - 인디고잉 25호















“좋은 사진은 사진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 롤랑 바르트, 『사진론』 

 


 

 

 

 

 

 

 

 

 

 

 

 

 

 

 

 

 

 

 

 

 

 

 

 

 


지난 4년 동안 게재된 아람샘 다이어리에 이어 박용준의 아포리즘을 시작하며 오늘은 사진이 담긴 책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아니, 때론 말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하는 사진들로 말을 건네보고자 합니다. 

 

 


 

 

 

 

 

 

 

 

 

 

 

 

 

 

 

 

 

 

 

 

이 사진은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보통 사람들의 스타일리쉬한 사진을 담은 책, 『사토리얼리스트』의 저자인 스콧 슈만이 자신의 블로그에서 가장 소중한 사진 중 하나라고 소개하고 있는 사진입니다. 정갈한 흰색 가운에 담긴 아름다운 삶의 한순간.














“대부분의 경우에는 우리의 겉모양새가 사실상 우리의 존재 방식이다. 가면이 곧 얼굴인 것이다.” - 수전 손택

또 하나의 사진집이 있습니다.
붉은 소파를 들고 전 세계를 돌며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러 다닌 호르스트 바커바르트의 책, 『붉은 소파』


 


 

 

 

 

 




 

 

 

 

 

 

 

 

 

 

 

 

 

 





1979년 뉴욕의 소호거리에서 낡은 ‘붉은 소파’를 발견한 바커바르트는 이 소파에 길을 지나가던 사람들을 앉히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이 소파는 30년간 세계를 돌아다니며 보통 사람들을 만나 묻습니다.

 

 

 

 

 

 

 

 

 

 

 

 

 

 

 

 

 

 

 

 

 

 

 


‘당신의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에게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당신에게 가장 흥미로웠던 경험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삶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에게 사랑은 어떤 의미죠?’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죠?’, ‘개구리 왕자가 되고 싶어요. 공주의 키스를 받자마자 왕자가 될 것이니까요.’


“장식적인 스타일이라는 것은 없다. 스타일이 곧 영혼일진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 영혼을 형식이라는 몸뚱이쯤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 장 콕토


 

누구든 이 소파에 앉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하게 하는 이 마법의 소파. 이 소파 하나로 모든 인간을 존재론적으로 평등하게 만드는 이러한 기획.

사진은 이렇게 많은 말을 걸어오기도, 또 많은 이야기들을 창조해내기도 하나 봅니다. 하지만 때론 사진보다 더 섬세하고 세밀한 묘사로 하나의 얼굴을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게 하는 글도 있지요. 

여러분도 아름다운 글을 읽으며, 하나의 방과 책상, 그리고 시와 같은 공간에 있었던 한 여인의 얼굴을 그려보시길….

아마도 가로 0.8미터, 세로 2미터쯤 되리라. 열차 침대칸 크기 정도다. 오크 나무는 아니지만 더 따뜻한 느낌의 배나무로 되어 있는 책상. 거기에 역시 나무로 된, 아마도 가족들이 아파트로 처음 옮겨 온 이십 년대부터 놓여 있었을, 바우하우스풍의 테이블 램프 하나. 거의가 수동으로 만들어진 듯 보이는, 하지만 그녀가 단 한순간도 신뢰하지 않았던 근대성의 약속, 그 약속에 맞게 만들어진 소박하고 기능적인 램프.
그녀가 집에 있는 동안 공부하고 잠자던 방에 그 책상이 놓여 있다. 이러 저리 휘돌던 그녀의 삶에서, 다른 어디에서보다 이 책상에서 더 많이 읽고 썼을 것이다.
그녀를 아는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다. 사진들은 많이 보아 왔다. 사진을 보고 그녀의 초상을 그려 보기도 했다. 아마 이 때문에 그녀를 오래 전부터 알아 왔다는 야릇한 느낌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에게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을 느낀다. 육체에 대한 혐오, 나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자각, 그녀가 줄 것 같은 사랑의 기회에 대한 들뜬 기분 등. 플라톤의 『티마이오스Timaeus』에서처럼 가난을 어머니로 삼아 생겨난 사랑. 그녀는 늘 의문의 여지 없이 나를 당혹시키곤 했다.
지난 주 파리에서 그 책상을 보았다. 책상 뒤에 있는 책꽂이에는 그녀가 보던 책들이 꽃혀 있었다. 책상과 마찬가지로 그 방 역시 작고 길쭉했다. 책상에 앉는 자세에서 왼쪽으로 출입문이 있다. 문은 복도로 이어져 있는데, 맞은편에 아버지의 진찰실이 있다. 복도를 따라 현관으로 걸어 나오면 왼쪽이 대기실이었다. 그녀의 방문 바로 바깥에 병든 사람들 혹은 병에 걸렸는지 불안해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버지가 사람들을 보내고 맞는 인사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봉주르 마담, 앉으세요. 어디가 불편하지요?

책상 오른쪽은 창문이다. 북쪽을 향한 커다란 창이다. 오귀스트 콩트가(街) 육층에 위치한 아파트는 낮은 언덕에 자리잡고 있어서, 바로 아래의 뤽상부르 공원부터 사크레 쾨르까지 파리 전체가 내다보인다. 그 창가에 서서, 창을 열고, 겨우 비둘기 네 마리 정도 앉을 수 있는 발코니 쇠 난간에 기대어, 저 지붕들과 역사를 넘어 상상 속으로 비행한다. 상상 속의 비행에 꼭 맞는 높이다. 한 시대가 끝나고 다른 시대가 시작되는 도시의 먼 외곽, 그 방벽들을 향해 날아가는 새들의 높이. 그런 비행이 이 도시만큼 우아한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녀는 창 밖으로 보이는 그 풍경을 사랑했고, 그것들이 가진 특권의 부당함에 깊이 절망했다.

“진리와 고통은 자연스런 동류이다. 둘은 우리 존재 안에, 영원히 말없이 서 있도록 저주받은 침묵의 애원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파리 고등사범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던 앙리 4세 리세(프랑스의 중등교육기관)시절, 이 책상에서 글을 썼다. 그때 이미, 그녀 평생을 이어 갔던 일기의 세 권째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녀는 1943년 8월, 영국 켄트 주 애시퍼드의 한 요양소에서 죽었다. 검시 보고서는 사인을 ‘굶주림과 폐결핵에 기인한 심장 근육 변성. 그에 따른 심부전’이라고 적고 있었다. 서른네 살의 나이였다. 법적 사인은 자살이었다. 굶주림은 단식에 의한 것이었다.
그녀의 글씨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은 무엇일까. 어린 학생들의 글씨처럼 끈기있고 공들여 씌어 있는데, 글자 하나하나가-로마자든 그리스 글자든- 이집트 상형문자의 모양을 하고 있다. 마치 단어를 이루는 개개의 글자 모두가 저마다 육신을 가지기를 원한 것처럼.
여러 곳을 옮겨 다녔고 묵었던 곳에서마다 글을 썼지만, 그녀가 쓴 모든 글들은 이 자리에서 씌어진 것처럼 여겨진다. 손에 펜을 쥘 때마다 마음은 그 첫 생각을 꺼내기 위해 늘 이 자리, 이 책상으로 돌아왔다. 쓰기 시작하면 책상은 잊혀진다.
어떻게 아느냐고? 대답은 나도 할 수 없다.
그 책상에 앉아, 나는 그녀 삶의 전환점이 되었던 한 편의 시를 읽는다. 그녀는 상형문자 같은 그녀의 글씨로, 그 영어로 된 시를 베껴 쓰고 외었다. 절망이 엄습하거나 편두통에 시달릴 때면 마치 기도하듯이 그 시를 암송했다.
그러던 중 어느 순간, 그리스도의 육체적 현존을 느끼게 되는 전율할 만한 경험을 한다. 아주 쉽게 눈앞에 나타나는, 신약성서에 나오는 기적과도 같은 환영들에 아연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순식간에 나를 지배했고, 나의 상상력과 감각은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았다. 고통을 가로질러,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에 나타난 미소에서 읽을 수 있는 그런 사랑의 현존을 그저 느끼기만 했다.”
오십 년이 지난 지금, 조지 허버트의 그 소네트를 읽는 나에게, 시는 하나의 공간, 하나의 집이 된다. 그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하라 사막에 가면 볼 수 있는 무덤과 집들처럼 그 안은 돌로 만든 벌집 모양이었다. 살아오면서 많은 시를 읽어 왔다. 하지만 시를 찾아가 그 시 안에 머물러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낱낱의 시어들은 내가 찾아든 집을 이루고 있는 돌멩이들이었다.

아파트 입구(지금은 들어가려면 비밀번호를 눌러야 한다) 위 벽에 명판이 하나 붙어 있다.
“철학자 시몬 베유, 1926년에서 1942년까지 여기서 삶.”


- 존 버거, 「안티고네를 닮은 여자」,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에서

 

 

 

 

 

 

 

 

 

 

 

 

 

 

 

 

 


 

 











“얼굴이 완전히 순수할 경우……, 그 얼굴은 바로 의미이다.” - 리처드 아베든

[출처] 얼굴|작성자 asa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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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다, 책을 펼쳐놓고 읽다 - 허아람의 꿈꾸는 책방
허아람 지음 / 궁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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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다, 책을 펼쳐놓고 읽다...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로 듣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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