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로스적 감각의 근원

 

박용준

 

“엄마가 우 리에게 입을 다물라고 하셨다. 엄마는 자신의 혀끝에서 맴돌고 있는 어떤 단어를 어떻게든 반드시 떠올리려고 안간힘을 쓰셨다. 온몸이 굳어진 엄마는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어원 하나를 건져 올리려고 애를 쓰셨다. …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을 찾고 있는 여자의 앞면에 더 이상 얼굴은 없다.”

- 파스칼 키냐르, <메두사에 관한 소론>,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 중에서
















 

 

 

 

 

 

 

 

 

 








 말이 멎는 순간이 있다. 아니, 혀끝에서 무언가 맴돌지만 차마 입 밖으로 소리 내지 못하는 그런 순간. 사랑을 고백하기가 힘들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망설임 보다 더 깊은, 그러니까 단적으로 할 말을 잃어버리게 되는, 그래서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도무지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어떤 경험 말이다.


 소리 내어 말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혀의 단련이 필요하다. 새로운 언어를 배울 때의 기억을 떠올려보라. 우리는 혀의 움직임과 위치를 통해 발음하는 법을 배우지 않았던가. 인간의 말(음성)은 혀의 역동적이고 현란한 운동을 전제로 한다. 결국 말을 해야만 살 수 있는 인간의 욕망은 바로 이 혀로부터 시작되고 또 달성된다. (에로스적 행위의 대부분이 혀로 이루어지듯.)


 물론 발설하고자 하는 욕망만이 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손에 잡히는 물건은 우선 입으로 가져가고야 마는 아기의 본능적인 행동과 같이, 또는 사랑하는 여인과의 짜릿한 키스와 같이, 수많은 점막의 돌출물로 이루어진 인간의 거친 혀는 생의 단맛, 쓴맛, 신맛, 짠맛의 생생한 에로스적(사랑의) 감각의 근원이다.


아테나 여신의 성스러운 신전에서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사랑을 즐기다 발각되어 끔찍한 괴물이 되어버린 메두사. 입 밖으로 축 늘어진 긴 혀와 청동으로 굳어져 버린 손, 뱀으로 된 머리카락과 멧돼지의 이빨을 갖게 된 메두사의 흉측한 얼굴.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가졌던 메두사를 이토록 기괴한 괴물로 만든 것은 과연 무엇일까. 혀의 욕망은 아닐까?


 

“나 는 그를 죽이는 중입니다 / 잔뜩 피를 빤 선형동물, 동백이 뚝뚝 떨어지더군요 그는 떨어져 꿈틀대는 빨간 벌레들을 널름널름 주워먹었습니다 나는 메스를 더욱 깊숙이 박았지요 ...... 나는 또 한번 그를 죽였습니다 / 나를 고소할 수 있는 법정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내 혀는, 그의 입 속에, 비굴하고 착하게 갇혀 있으니까요.”

- 김선우, <만약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중에서
















 

 거짓말을 일삼거나, 허풍을 떠는 것을 두고 우리는 종종 ‘혀를 놀리다’는 표현을 쓴다. 그리고 함부로 혀를 놀린 자의 비극적 최후를 동화 ‘양치기 소년’은 일깨워준다.

마을 사람들에게 늑대가 온다는 거짓말을 일삼다가 결국 진짜 늑대가 나타나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는 이 이야기는 입 속에 갇힌 혀가 가진 어떤 극단적인 힘을 떠올리게 한다. 평균 7cm의 이 혀를 통해 발설된 이야기는 세상에 태어나 허공을 떠돈다. 그리고 허공을 떠돌던 이 말은 때론 칼(메스)이 되어 누군가를 죽이기도 한다.

 무심코 뱉은 말이 화근이 되어 그것이 무성한 소문들로 불어나고, 결국 한 소녀를 죽음으로까지 내몬 오대수(영화 <올드보이>의 주인공, 최민식 분)가 맞는 복수극의 최후는 처참하다. 그것은 바로 직접 자신의 혀를 가위로 싹둑 자르는 것. 영원히 입 속에 갇혀버린 혀. 말도 맛도 잃어버린 오대수에게 주어진 최후의 형벌은 바로 침묵이다.



 

“열 다섯, 나는 시인이 되리라 생각했다. 삶의 그윽한 심연은 시로써만 다가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개의 혓바닥은 이빨 사이로 삐져나와 주둥이를 핥는다. 붉고 긴 혓바닥은 앞발을 핥는다.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삐져나온 내 혀의 욕망을 나는 오랫동안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붉고도 씩씩거리는 욕망, 침이 질질 흐르는 갈급함으로 점철된 붉은 점막들. 이 세계를 핥아주기엔 나의 혀는 턱없이 짧았다. 이런 절망이야 차치하더라도 여전히 앞발에 머물러 있는 내 혀에 대한 반성과 성찰조차 용렬하기 그지없다.

이 세계를 핥을 수 있는 길고 긴 혓바닥은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지상에서 천공까지 한 번에 핥을 수 있는 혀에 대한 욕망은 가끔씩 나를 찾아와 우울하게 한다. 그 우울 속에서도 나는 한 마리 개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못한다.”

- 박대현, 『헤르메스의 악몽』 중에서

 




 

 

 

 

 

 






 


인간의 혀는 도통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 이빨 사이를 비집고 나와, 끊임없이 말을 하고, 맛을 본다. 그러한 인간의 혀가 용서받을 수 있는 순간은 오직 그것이 에로스를 위해 봉사할 때만이 그럴 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상처를, 세상의 고통을, 나의 찢겨진 영혼을, 소리 없이 핥아 주는 것.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옥따비오 빠스는 “시는 앎이고 구원이며 힘이고 포기이다. ... 시는 이 세계를 드러내면서 다른 세계를 창조한다.”고 했지만, 달콤 쌉싸름한 시의 언어는 창조는 커녕 세계를 핥기에 턱없이 짧은 혀에 불과할 때도 허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는 것을 거부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가장 근원적인 형태의 에로스적 행위이자, 세상을 온 몸으로 받아내는 가장 원초적인, 그리고 유일한 단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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